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농약맛댕댕이 Jun 03. 2022

데이트 통장을 다시 쓰기로 했다.

동거커플의 공금 통장

 

 내 연봉이 오른 후, 가장 먼저 그가 제안한 것은 데이트 통장이었다. ‘이제 고정 수익이 있으니 돈을 내!’라는 의미가 아니라 같이 볼 수 있는 통장에서 누가 무엇을 계산하는지 눈치 보지 않고 조절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라고 했다. 


 그가 데이트 통장을 제안하는 순간, 난 잠시 회상에 빠졌다. 

데이트 통장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첫 연애에 전부를 다 줄 수 있을 것만 같던 20~23살 연애에서, 난 데이트 통장을 썼었다. 둘 다 학생이고, 용돈을 받지 않는 두 사람이 장기 연애에 돌입하면서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똑같이 돈 없는 학생 둘이서 누가 무엇을 낼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데이트 통장은 소소한 데이트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일 것 같았다. 하지만 서로 매달 첫 일에 입금하기로 한 20만 원 규칙은 얼마 가지 못했다. 


많이들 쓰고 있는 카카오뱅크 모임통장. 우리도 이걸로 쓴다 (출처: Google)



그 당시, 회상

 당시 (구) 그분은 카페 알바를 했음에도 20만 원을 입금하기 힘들어했고, 과외 알바를 해 또래 친구들보다는 형편이 그나마 나은 내가 무리 없이 20만 원을 내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자신은 전 재산 가까이 내는 20만원이 내게는 상대적으로 과외 몇 시간 만에 낼 수 있는 돈이라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의 그러한 불만은 내가 대학시절 로망이었던 한복을 사는 것을 보고 결별을 통보하게 만들기도 했다. (한복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맞춤한복을 한 벌 짓는 것이 대학시절 로망이었다)


 돈이라는 무게와 금액도 사람에 따라서는 너무나 상대적이고, 데이트 통장의 아름다움(?)을 느끼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깨달았던 사건이다.


 그런데 다시?

 

 학생이 아니라 둘 다 직장인이고, 남자친구가 아니라 생활을 같이 하는 동거남이라 괜찮을까? 돈은 항상 부족하기 마련인데, 공금이 충분하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만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지만, 이제는 동등한 수준의 직장인으로 관계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기로 했다. 


다시 시작해도 괜찮을까..? (출처:Google)



 단계 1 : 적정 금액 정하기

데이트 비용을 파악하는 게 필수였다. 그래야 50%를 내든, 그 이상을 내던 비용을 정할 수 있으니까. 입이 그래도 둘인데 한 달에 얼마를 쓰는지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매달 고정비로 잡히고 나니 부담스러우면서도 절약정신이 절로 생기는 느낌이었다. 한 달 치 카드 내역을 조사한 결과, 같은 집에 살아서 옛날과 같이 MT비도 필요가 없음에도, 배달음식을 포함한 엥겔 지수가 매우 높았다. 최대한 장을 보자고 다짐하고, 엥겔지수를 줄인 금액대에서 나 55%, 그 45%로 협상을 체결했다. 



 단계 2 : 이 금액은 어디까지 유효한가. Boundary 설정

 일반적으로 같이 살지 않는 데이트 통장이라면 데이트 통장의 금액을 어디까지 쓸 것인지를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서로가 같이 있을 때 쓰는 비용만 지불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린 사실상 데이트 통장=생활비이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공금에서 빼 써도 되는지가 매우 어려웠다.


 하루는 샴푸, 폼 클렌징, 화장품이 동시에 동이 났다. (이런 것들은 꼭 최고로 돈이 없을 때 한.꺼.번.에 동이 난다) 자연스럽게 올리브영에서 나름 비싼 샴푸와 폼 클렌징을 샀는데 (TMI : 그분이 태생적으로 얻은 것은 피부요, 잃은 것은 머리숱이다. 얻은 것은 잘 관리하고, 잃은 것은 더 잃지 않기 위해 항상 좋은 샴푸와 폼 클렌징을 구매한다) 아무튼, 샴푸와 폼 클렌징은 공금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매일 하루 두 번씩 폼 클렌징을 쓰는 나이기에 그보다는 내가 확실히 더 많이 쓰고 있지만, 그 역시 최소 하루에 한 번씩은 클렌징을 하지 않나?


 모든 걸 다 공금에서 쓰기엔 공금 통장이 샘솟는 마법 우물도 아니고, 어느샌가 폼 클렌징이 비어가면 아깝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전기, 가스, 수도비를 포함한 정해두었던 공급 품목을 점차 늘려 와이파이, 유튜브 프리미엄 등 온갖 자잘한 항목들을 넣고, 심지어는 생리대 비용까지 안에서 해결하자 제안했다. (이 부분은 독자들의 의견이 궁금하기도 하다. 생리대 공금 품목인가 아닌가?)



그의 말에 따르면, 생활필수품에 들어가니 공금 통장에서 쓰라고 했다. 당신의 의견은? (출처: unsplash.com)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쓰고 싶은 거 다 쓰는 용도로 데이트 통장을 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제는 그 재화 역시 한계가 있다는 점에 있다. 저녁, 필수 생활비에도 벅찬 우리의 소박한 데이트 통장은 아니나 다를까 우리의 월급날이 비는 그날부터 벅차 허덕이기 시작했다. 가장 단순한 해결책은 그 공금 통장에 더 많은 생활비를 넣는 것이며, 더 나아가 쓸 수 있는 자신의 재화(연봉)을 늘리는 것이리라. 하지만 지금, 적어도 자신의 재화를 늘리기 전까지는 자동적으로 생기는 절약정신을 온전히 체험해 보려고 한다. 



PS. 데이트 통장 이름은 매그니토다. 옛날 웹툰 [낢이사는 이야기]에서 작가님의 에피소드를 따서 모든 고철을 모았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동거남의 연봉을 넘어버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