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도덕적 우위를 점한 자, 가장.
저번에 이어 커플의 돈 문제다.
자꾸 금전적인 부분이 화두에 오른다는 건, 그만큼 관계가 현실적이 되어간다는 의미이자 증표이다. 일반적 커플 혹은 부부 사이에서도 돈 문제는 정답이 없다는데, 결혼하지 않았지만 사실혼으로 인정되는 동거 커플의 돈 문제는 더욱 복잡하고 애매한 편이다.
사실, 나는 같이 살기 전부터 크게 데이트 비용을 내지 않는 편에 속했다. 일부러 내지 않았다기보다는 용돈 한 푼 받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통해 생활비를 충당하는 나와 부모님의 카드를 쓰면서 아르바이트 수입은 본인의 추가 비상금으로 쓰던 그의 생활 차이 때문이었다. 이따금 부모님의 카드를 쓰기 민망한 내역들을 빼고 대부분 그의 어머님 카드를 애용했고, 관계가 그렇게 굳혀지다 보니 한 달 데이트 비용에 대해 무지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던 중 첫 직장 입사와 동시에 시작된 동거, 그는 경제적 독립을 목적으로 그제서야 부모님 카드를 반납했지만, 여전히 우리의 데이트 비용 지불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문과생의 중소기업과 #IT 전공자 개발자의 대기업. 더 이상의 수식어가 필요 있을까. 그의 수입과 나의 수입은 얼추 천만 원 가까이 차이가 났기에, 나는 동거를 하면서 사실상 전기세와 가스비 등의 고정 지출 비용을 담당해 대신 지불할 뿐, 데이트 비용 지불 대상자에서 자연스레 제외되었다.
변화는 나의 2번째 직장생활과 함께 시작됐다. 이제 그보다 많이 받는 나. 솔직히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연봉 4천이 넘으면 결혼하겠다고 말했던 내가 얼마나 어렸던지 체감했고,(동거남의 의견으로 밝힙니다) 만 3년이 되어가는 그의 연봉보다 많이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한 그가 모은 돈은 나보다 한참 더 많았지만,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IT 개발자의 연봉을 신입사원의 초봉으로 따라잡았다.
돈 때문에 관계에 변화가 오다니. 참으로 속물같이 느껴져 민망하지만 사실이다. 난 평상시 경제적인 안정성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고, 그와 동거, 더 나아가 미래를 생각할 때 그의 직업이 4차 산업혁명의 최대 수혜 직업인 개발자라는 것에 점수를 많이 준 편이다. (오해하진 말자. 인성이 첫 번째다) 내가 문과이며, 문과생으로서 취직이 너무 힘들다는 사실을 직접 오랜 취준 기간으로 느꼈기에, 이과에 앞으로 전도유망한 직업을 가진 사람을 미래 배우자로 삼고 싶었다. 나란 사람은 경제적인 부분이 너무 중요한 사람이기에, 연봉을 기준으로 집안일을 해야 한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랬기에 똑같이 칼퇴를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내가 더 집안일을 하려고 노력했고, 부엌에 관련된 일 (밥 차리기, 장 보기, 설거지 등)은 당연히 내게 속한 일이라 생각해 임했다.
그런 그를 내가 한방에 넘어버렸다는 것은 우월감이 아니라 한없이 무거운 가장의 무게감을 이제 내가 느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 중에 누군가 한 사람이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면,(퇴사를 하고 싶다면) 이제는 그가 그만두는 것이 맞으며, 내가 휴직을 하고 싶어도, 그가 휴직을 하는 것이 가계에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뜻이었다.
문득, 기업은행에 다니시던 엄마가 우스갯소리로 여동생을 가진 이유에 대해, “합법적으로 쉴 수 있는 방법이 임신이었어”라고 말씀하시던 것이 생각났다. 난 더 이상 마음대로 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이 단 두 명의 관계에서 가계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한때 장항준 감독이 말한 가장의 정의에 무릎을 쳤던 적이 있다.
“저는 가장이란 가정 내에서 경제적, 도덕적 우위를 점한 자라고 생각해요”
위의 정의를 토대로 나는 그를 가장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도덕적으로 내가 한참 그보다 모자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그보다 영원히 연봉이 높을 수 없다는 사실에 안주하며, 나는 그렇게 가장의 무게감에서 자유롭고 싶었다.
이제 경제적 가장으로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도덕적 우위를 위한 마음의 빚을 청산하는 것이었다. 나의 연봉이 그에게 한참 미치지 못해서, 그가 가장으로서 버텨주고 있어서 나는 마음 놓고 첫 번째 직장을 탈출할 수 있었다. 백수로 있는 3개월 동안, 가계에 보탬이 되지 못했고, 어떻게 보면 연애를 하는 만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에게 가장의 무게를 씌우고 있었다. 그가 내 연봉 상승 이후 데이트 통장을 쓰자고 제안했고, 흔쾌히 동의한 이유도 이러한 마음의 빚을 청산하고 싶었던 데에서 기인했으며, 어차피 가장이 될 거라면, 도덕적 우위를 점한 가장이 되고자 한 나의 결정이었다. 그의 카드빚을 대신 냈고, 조만간 있을 친구의 결혼식을 위해 그의 정장을 구입했다.
그 대신, 연봉과 비례하여 집안일에 대한 나의 관심 또한 떨어졌다. 더 이상 저녁상을 차리지 않고, 청소는 드문드문하며, 빨래와 관련된 집안일은 거의 손대지 않는다. 전 직장과 비교해 업무 강도가 센 이유도 있겠지만, 가장으로서 내 건강이 우리 둘의 관계와 직결된다고 믿기에 운동하고, 쉬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돈과 관련된 문제에 정답은 없다.
데이트 통장을 쓰게 되면서 드디어 우리의 한 달 데이트 비용을 알게 되었고, 내 가계부를 쓰면서 그가 모아둔 돈이 얼마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동거남을 두 번이나 울렸다. (난 그가 운 거라고 생각한다) 회사를 나갈 때도 애플워치에 화면을 쳐다보면서, 내가 일해야 하는 이유를 다짐하고, 그렇게 한국의 가장이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