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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약맛댕댕이 Apr 11. 2022

전세금 한도를 잘못 알고 있었다.

남자친구의 회색 거짓말


오랜만에 동거남 이야기이다.


흔히 사람들은 서로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커플도 예외는 아니다. 드라마 부부의 세계가 한창 인기 있었을 때, 여다경 역의 한소희 배우를 두고, 현모양처와(흔히 본인을 지칭한다)와 돈 많은 아빠를 둔 어리고 예쁜(‘어리고 예쁜’이 빠지면 섭섭하다) 재벌 딸 중 누구를 고를 거야? 같은 진부하고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들을 하곤 하니까.


지선우 VS 여다경, 세기의 질문이다 (출처: Google)

 

문제는 이 서로에게 잘 보이려 하는 수많은 거짓말들 중 어디까지를 착한 거짓말로 인정해야 하며, 후에 누군가가 사실을 고백했을 때 흔쾌히 용서를 할 수 있는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나의 그분은 평상시 내 예상을 벗어난 적이 없는 분으로, 오히려 예상을 한 번쯤 벗어나는 행동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나에게 한 큰 거짓말을 뽑으라면 (물론 내가 아는 선에서다. 아마 더 큰 거짓말이 있을 수도…) 전세금 거짓말이 있다.


 말 그대로 전세금의 한도를 속인 것인데, 우리는 여느 날과 같이 이 집 다음에는 어느 집으로 이사를 가야 할까에 대한 열띤 토론을 진행 중에 있었다. 우리가 구한 이 집이 기적 같은 집이며, 이후에도 이런 집을 구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수다를 떨던 도중 갑자기 그의 고백이 시작되었다.


나.. 고백할게 있는데, 자기가 들고 화 안냈으면 좋겠다
(화낼 걸 알기에 까는 밑밥이다)
사실 전세금 몇 천정도 더 여유 있었어.
엄마가 준다고 했는데 내가 말 안 한거야


뭐 이 자식아..? (출처: 무한도전)



 위의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집을 구하던 시절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처음에 내가 희망했던 전세금 가격은 2억이었다. 주변 시세에서 투룸을 구하려면(사실 원룸도..) 필요한 최소한의 자금이었다. 하지만 전세금은 그의 어머님의 돈.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난 그저 그에게 주변 시세가 이러하다고 전달만 할 수 있었다. 그는 어머니께서 주실 수 있는 최대한의 한도는 1억 5천이라고 말씀하셨다면 그 밑으로의 집을 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연히 나는 어머님께서 서울 시세를 모르셔도 너무 모르시는 거 아니나며, 내 돈은 아니지만 아들에게 야박하게 구는 어머님을 내심 서운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웬걸, 어머님은 애초부터 그 금액을 윤허(?)하셨고, 미리 금액의 상한선을 정해놓았던 것은 어머님이 아니라 나의 그분이었던 것이다.



 순간 금액을 맞추기 위해 집을 알아보던 나의 과정과 그 금액이었다면 만족하며 계약할 수 있었던 모든 집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화를 내지 않기로 약속했음에도(대부분 지켜지지 않는다), 일단 생각이 나는 대로 대사를 쏟아내었다.


“방이 하나 더 있었을 수도 있고, 그럼 재택근무 서로 비좁지 않게 유연하게 할 수 있고, 이사에 그 고생도 안 했어도 되며, 계절마다 내 옷을 본가로 보내고 가져오는 행위도 하지 않았어도 되는 거 아니냐… (생략)”


이사를 생각하면 다시 힘들다 (출처: 아빠 어디가)


 


 그는 내 속사포 같은 랩을 듣더니 상황 설명을 시작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듯) 전세금은 자신이 결혼할 때쯤 갚아야 하는 돈으로 생각해, 자신이 모을 수 있는 상한선을 그었다. 2억은 2~4년 안에 갚을 수 없는 돈이었다. 그래야 결혼할 때 부모님에게 제안할 나의 말이 본이 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같이 모으자는 명목하에 2억을 요구할 수도 있었지만, 집을 구할 당시 아직 첫 직장 생활을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았던 예비 신입사원에게 돈부터 같이 모으자고 말할 수 없었다.


 일리가 아예 없는 말은 아니다. 지금이야 몇 천이 1년 바짝 허리띠를 졸라맨다면 모을 수 있는 돈이지만, 그때 실제로 난 모을 돈도 받지 못한 한낱 들떠있는 신입사원이었고, 그분 역시 모아둔 돈이 2천만 원이 되지 않는 사회 초년생이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돈을 자신의 돈이라 여기지 않고, 배우자가에게 경제적 부담은 더더욱 주기 싫어하는 그 다운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내가 이해가 안되는 건...(출처: Google)

 

 내가 서운하게 생각했던 점은 그러한 점을 나에게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은 점으로 인해 내가 애꿎은 사람에게 서운함을 느껴왔다는 점이다. 나는 어머니께서 서울 사람이 아니라 현실 감각이 없는 분이라 생각했고, 거의 80%의 월급을 어머니께 보내는 그를 보며 왜 자식에게 빌려준 돈을 다 받으려고 하지라는 의문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나의 그분이 그때 솔직하게 자신의 계획을 말한다고 해서 나 역시 고분고분 그래 네 뜻대로 하자라며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 현명하게 행동하지 못하냐며, 부모님이 주시는 건 받는 것이 지혜롭게 사는 길이라며 그의 싸웠겠지만, 첫 집을 구하는 과정에서의 불투명성이 문제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가 고백하는 날 우리는 침대 위에서 한 2시간가량 긴 대화를 나눴다. 돈 문제에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다음에는 꼭 무엇이든 서로에게 100% 투명하기로, 나 역시 그가 사실을 꺼내기 두렵지 않도록 최대한 그의 의견을 수용하기로. 그렇게 그의 하얀 거짓말도 아닌 검은 거짓말도 아닌 회색 거짓말 사단은 일단락되었다.



커플들의 대화 중 제일 난이도가 어렵다는 돈 얘기, 하지만 이 대화는 꽤 오랫동안 우리의 대화 주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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