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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혜 Nov 04. 2021

외로워, 외로워서

  "엄마아~" 축축한 목소리다. '뭔 일이 있는 건가' "엄마만 알고 있어. 나 있잖아, 고양이 키워" 

  2021년 7월에 아들은 다시 새끼 고양이를 입양했다. 4개월이나 지난 뒤 신고를 한다. 이름은 까몽이라나. 아들과 내가 멀리 떨어져서 사는 것이 다행 중 다행이다. 누나가 둘 있지만, 헛헛한 내면은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 같이 빠져나가고 고이지 않는다. 외로움으로. 


  한 달 전이다. 아들이 키우던 고양이를 대신 키워 줄 분을 찾아봐 달라고 했다. TV나 거리에서 애완동물을 데리고 활보하는 이들이 많아서 쉽게 나의 제의를 수락할 줄 알았다. 의외로 동물을 싫어해서, 안에서 키우는 것이 못 마땅하여, 장소가 협소하다느니, 아내가 질겁한다며 손사래를 쳤다. 맡아줄 보호자를 찾으면서 안온한 의지 처를 찾지 못해 헤매던 길 고양이가 생각이 났다.


  지난해 이른 봄 고양이가 지하실을 드나들었다. 그것도 새끼를 세 마리나 겨우내 키우면서 말이다. 그동안 수상쩍게 여기기는 했으나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따뜻한 날, 집안에서 어린 고양이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집히는 바가 있어서 밖을 내다보았다. 창문 너머에는 호기심 많은 새끼 한 마리가 밖으로 나왔다 지하로 내려가지 못해서 어미를 찾고 있었다. 그동안 지하에 숨어들어 몰래 새끼를 양육하는 어미의 고충이 느껴져서 당분간 관심을 두지 않기로 했다.


  남편은 나와 생각이 달라 한 치 양보가 없었다. 아들이 원룸에서 송아지만 한 고양이를 키우는 줄도 모르면서. 어미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드나들었다. 사실 내가 사용하지 않는 지하공간을 조금 내어주어도 좋으련만 왠지 게름직하여 그러지 못했다. 날씨가 좋은 어느 하루 네 식구가 밖으로 나와서 정답게 놀았다. 어미는 흐뭇한 듯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며 졸았다. 냉정하게도 지하 입구를 철저히 봉쇄해버렸다. 네 마리가 집 안을 헤매고 다녔다.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다행히 여름으로 접어들어 새끼들이 잘 크려니 방심했다. 흥부의 많은 식구가 쫓겨나 비바람 피할 곳을 찾는 애처로운 광경이 연상되었다. 


  아들이 지인의 소개로 겨우 젖을 뗀 새끼를 데려다 키웠다. 대학교 입학하면서 갑자기 홀로 살며 마음 붙일 곳이 없어서 많이 외로웠다고 고백했다. 대안으로 고양이와 교감하며 안정을 찾았던 것이다. 짐작컨대 공부는 뒷전이었고, 고양이 연구를 했으며, 갖은 정보를 두루 섭렵하였을 법하다. 아들을 이해하려다 오히려 길 고양이에 대한 나의 편견이 깨졌다. 또 인간들과 공존하며 사는 짐승들에게도 천차만별의 삶이 존재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인의 집착 같은 사랑을 받으며 제한된 자유로 호사를 누리는 애완용, 사랑 애(愛)와는 무관하게 가난을 등에 지고 영역 안에서는 구속받지 않는 야생이 있었다.


  애완동물은 온실 안의 화초처럼 자라서 천적이 없다. 하지만 한 순간에 환관이 되거나 후두를 제거 당한다. 고양이의 발정 음은 사람에 의해 난소를 잘라내어서 본연의 기능을 자연으로 돌려보냈다. 고양이의 고유한 기능이 아들을 통해서, 인터넷 검색으로 길고양이나 애완 고양이를 인간의 입 맛 대로 조종하는 것 또한 알았다. 이것저것 모를 때는 사람들의 개입이 옳다고 생각했다.

 

  길고양이를 포획하여 수컷의 고환을 도려냈다. 암컷도 자궁을 적출했다. 이를 일러 ‘길고양이 중성화’. 길고양이 개체수가 인간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또 수술을 마치고 왼쪽 귀 끝을 1센티 잘라 표시를 낸다고 한다. 구속받지 않는 조건 외 먹이사슬이 무너진 척박한 도시는 드높은 파도가 사납게 쳐대는 밤바다나 다름없다. 그래서 우리 동네가 조용하였고, 눈에 많이 뜨이지 않았다. 사람과 동물이 공존하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럴싸한 이유지만 참 씁쓸했다. 애완견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인간이 최대 천적인 셈이다.


  아들이 사료를 택배로 보내주었다. 비록 길고양이이지만 박대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물으라는 쥐를 물지 않던 아들이 못 미더웠다. 아들의 인정이 담긴 배려에 부모가 자식보다 미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들이 2017년 1월 말 퇴사했다. 남편이 의외로 아들의 결정을 이해하면서 열심히 준비하라고 격려했다. 아버지가 물러서는 듯하자 넌지시 키우던 ‘콩자‘ 이야기를 꺼냈다. 남편은 아들에게 재취업 준비를 집에서 하되 콩자는 절대 불가(不家)라고 선언했다.


  아들은 남편에게 타지에 혼자 살면서 부모의 명예를 먹칠하지 않았다, 외로워서 콩자를 의지하며 지냈고, 올바른 가치관으로 잘 살아가는 아들을 이해해 주라고 설득했다. 남편은 막무가내로 콩자와 함께 살 수 없다며 버텼다. 갈 곳 없는 콩자의 거취가 막막했다. 길고양이 식구가 안식처를 찾아 헤매던 것이 불과 몇 개월 전이다. 내심 아들과 콩자를 다른 곳에서 살게 할 궁리까지 했다. 부자가 탄 기차는 부산까지 평행 선로를 내달렸다.


  콩자의 갈 곳이 결정되었다. 아들이 스스로 키우겠다며 새삼스레 강한 애착심을 드러내었다. 가장 가까운 피붙이라며 화를 내기도 했다. 아들의 절박한 심정을 헤아려 주지 않는다며 입이 십리나 나왔다. 

  "아들아, 너도 아버지에게 단호히 자를 수 있는 면모를 보여야 일 년 간의 준비 기간이 부드러워질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는 거래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란다. 아버지께서 양보할 때 너도 콩자와 이별했으면 좋겠다. 보고 싶을 때 그 집에 가서 볼 수 있도록 양해를 구했단다. 한 해만 맡아 달라고 한다면 그 댁에서도 정을 떼기 힘들어진다. 다행히 4 식구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가정이란다. 무얼 더 바라겠니. 어머니가 부탁 하마" 카톡으로 문자를 보냈다.


  “엄마, 콩자와 이별할래” 아픔을 재빨리 속으로 삭이는 것이 보였다. 연인이었다면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어서 헤어져야만 했다. 애간장 녹이는 일이다. 아들은 현재 가슴이 갈갈이 찢어지고 있다. 일 분이라도 콩자와 함께 하려고 갖은 이유를 대면서 시간을 지연시켰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했던가. 내 아들은 만물이 만나면 헤어지는 세상사를 배우고 있다. 나도 아들 덕분에 진지하게 길냥이를 공부하는 중이다.

 

  어미 고양이는 몇 년 전에도 새끼를 낳아서 얼마간 키우다 앞세우는 것 같았다. 이번에 또 세 마리 먼저 보냈다. 새끼를 가슴에 묻는 과보를 겪으며, 진정한 수컷이 없는 영역을 오래도록 주름잡는 여걸이다. 내 집 주변 일대에서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새끼를 키워보겠다는 집착이 더 강해지는 것 같다. 발정 음을 밤마다 멀리 보내는 것을 보면. 새끼를 계속 키울 상황이 되지 않는다면, 포기 또한 어려운 악순환이 이어질 것이다. 


  인간이 위대하다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사람도 짐승도 순리를 역행하면서 간단명료하게 개체수와 인구수를 조절한다니 어찌 위대하지 않을 손가. 그 해 어미의 난소 제거 수술을 신청했다가 임신하기 어렵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미련 없이 철회해버렸다. 나까지 그녀의 본능을 훼손시키는 인간이고 싶지 않았다.


  


사진: 정 혜.


대문 사진: 아들이 현재 키우는 까몽이다. 아들이 회사에서 돌아올 때까지 종일 주인을 기다리며 혼자 지낸다. 이 녀석도 고자나 석녀가 되어서 아들과 교감하는 것이 전부인 줄 안다. 


아래 사진: 내 눈에는 까몽이가 어미 없이 아들의 손에서 자라는 외로움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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