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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혜 Oct 30. 2021

물에 쓰는 이름

  매향(梅香)이 어느 오전 마파람에 스쳤다. 매향은 조금 멀어도 바람이 건들대며  속살거린다. 발밤발밤 매향을 따라 걷다 보니 그리 멀지 않은 이웃 담장 너머로 녹악매(綠萼梅)가 보였다. 마치 미색 저고리에 파르스름한 동정을 덧대어서  여민 듯 음전다. 매화 곁에 서면, 눈은 감고 코만 열어두면 된다. 긴 들숨에 짧은 날숨으로 향을 알아차림 하면 된다.


  마스크가 매화 가로수 길을 걸으면서 야속했다. 애물단지였다. 유모차를 밀면서 행인들의 눈치를 봐가며 마스크 한쪽 끈을 벗겨내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매향이 들숨에 달큰하다. 은은히 가벼운 향내가 경쾌하게 나를 포옹한다. 달달한 내음이 신선하게 내 안으로 휘감아 든다. 매향의 가비야움은 결코 가볍지 않은 꽉 찬 가벼움이다. 향기는 가득 찼으나 가비얍다. 은근한 이 단내가 향긋하면서도 쇄락하여 발길이 붙잡힌다. 이른 봄날이 그리워지는 이유다.


  매실나무는 나의 삶이다. 이른 봄날이면 매향에 감싸여 매화 사진 찍는 즐거움을 만끽한다. 그 즐거움은 집착이기도 하다. 즐거움의 이면에는 반드시 괴로움도 있다. 꽃이 피어서 즐겁지만, 매실나무 아래로 미색(米色)의 점들이 낙화하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아, 드디어 때가 되었구나' 낙화를 보며 무상(無常)을 챙긴다. 현재 싱그러운 이 기분은 애착이 함께 하는 줄 분명하게 일깨우고자 수반된다. 봄과의 이별로 느낄 수 없는 매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집착이다. 끊임없이 변하는 자연현상을 보면서 항상(恒常)하는 것이 없음을 확인한다. 그래서 무상이라며 마음챙김도 해본다.


  백매 봉오리가 입을 앙다문 채 진통을 겪고 있다. 오동통한 봉오리를 보호하여 감싸고 있던 꽃받침은 애가 쓰인다. "이제 아기 머리가 보여요. 힘을 더 주세요!" 이어서 "조금만 더! 더!" 연속해서 간호사가 분만을 유도하며 내게 소리를 질렀다. 간호사는 배가 아플 때 힘을 주라고 했다. 통증이 밀려들 때 배에 힘을 주며 순간적으로 용을 썼다. 봉오리 다섯 장의 꽃받침도 "조금만 더 힘을 줘!"라면서 봉오리의 용기를 북돋우는 것 같다.


  메주콩만 한 둥근 미색 봉오리 끄트머리가 약간 벌어졌다. 겨우 끝만 들린 채 잠시 숨을 고르는가 했더니 또 힘을 주었다. 긴 호흡을 내뱉으며 진통은 계속되었다. 봉오리의 첫 장이 벌어지고, 둘째, 셋째 꽃잎도 살포시 열리면서 노란 수술머리가 보였다. 도도록하던 꽃봉오리는 벙그러진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위; 적갈색 꽃받침에 흰 꽃이라 백매(白梅), 아래: 꽃받침이 연한 풀빛이면 푸를 녹, 꽃받침 악, 매화 매여서

녹악매(綠萼梅)라고 부른다.




   매실나무는 한 두해 묵은 가지에서 꽃을 피운다. 그 꽃이 매화다. 매실나무의 새 가지는 녹색이나 갈매색 줄기에서 밀어냈다. 짙어진 녹색 부모의 몸을 뚫고 나온 풀색의 가지는 조부모의 갈매색을 만나게 된다. 조부모는 증조가 되면서 진한 갈색으로 변하였으며, 부모는 조부모 반열로 올라선다. 조상의 몸체가 손등이 트 듯 갈라졌고, 터진 틈새로 후손의 등을 떠밀어 세상으로 내보내어서 격려하며 자손들을 번성시켰다. 대가족의 공동체에서 매화가 피었다. 오래도록 조손(祖孫)이 합심하여 봄을 불러들였다. 매화는 벌과 나를 유혹하여 매실 가문의 번창을 꾀했다.


  한 가정은 삼대(三代)가 이상적이라며 딸이 토로하였다. 손자가 10개월 되었을 때 승진 때문에 복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칙만 고수하는 부모의 자녀 교육은 너그럽고 넉넉한 조부모의 완충지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듯하다. 손자가 조금만 이상스러워도 "엄마! 이 일을 어떻게?"라며 어른을 찾는다. 작은 생채기에도 놀라서 허둥지둥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나이 많은 부모 역시 손주 다루는 것은 처음이다. 단지 내 아이를 키웠다는 경험 하나로 중심을 잡아주는 것 뿐이다.


  돌에 이름을 새기면 지울 수 없다. 단단한 진흙 바닥에 새기는 것 또한 지우기 어렵다. 그러나 돌에 새기는 것보다 지우거나 없앨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어떤 사람은 돌에 글자를 새기 듯 마음속에서 잊지 못하고 병이 생기도록 속을 끓인다. 상대를 증오한다. 이럴 필요가 있을까. 또 진흙 바닥에 새기면 비가 오면 지워질 수 있다. 새긴 깊이에 따라서 완전히 또는 흔적이 완연히 남는다. 비가 내릴 때까지 속에 담아두고 마음고생하는 것이 타당한가. 물에 글씨를 쓰면 한 획을 긋기 전에 메워져 버린다. 이처럼 사람과의 관계는 물에 이름을 쓰는 것처럼 살아가야만 한다.  


  손자는 할머니가 매화 사진을 찍어도 무심하다. 큰소리치고 뻗대 봐도 소용없다는 것을 이미 깨달았다. 기다려 준 손자가 나의 손을 뿌리치면서 가고 싶은 대로 걸어가면 조용히 뒤를 따른다. 최대한 손자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려고 손자가 가자면서 움직이기 전까지 같이 대상을 바라본다. 매실나무의 조손이 하나이 듯 나 또한 손자가 되어서 응원하며 묵묵히 지켜본다. 조부모는 매실나무처럼 뒤로 물러서서 관조하며 사는 것이다. 오로지 지켜볼 것이며, 경청하면서 자식들이 잘할 수 있도록 무한한 박수를 보내리라.



흑매(黑梅). 붉디붉은 장미꽃을 흑장미라 칭하듯, 홍매 중에서 유독 진분홍 색이 짙은 매화를 흑매라고 부른다.    




대문 사진: 겹홍매. 홍매의 홍은 붉을 홍(紅)이나 실제로 홍매는 붉지 않다. 연분홍 빛이다.


아래 사진: 연분홍의 홍매(紅梅). 매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세하게 구분을 잘했다고 생각한다.

사진: 정 혜.


  

     

 https://blog.naver.com/jsp081454/222553628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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