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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혜 May 22. 2021

남편의 어머니

 

  남편은 시어머니 모시는 것이 소원이었다. 나와 한 마디 의논도 없이 집으로 모시고 왔다. 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이혼까지 불사하면서. 칠 남매 다섯 아들 중 막내인 남편의 거침없는 일방통행이었다. 1984년 서울의 13평 군인 아파트에서 이빨 빠진 호랑이 시어머니와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1987년 7월엔가 남편이 갑자기 대대장으로 차출됐다. 그는 공석(空席) 중인 부대장의 막중한 임무였던 삼팔선을 지키러 먼저 떠나갔다. 내가 서울에서 작은 부인과 살고 있는 시아버지를 찾아서 모처로 갔다.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집안이 안정되면 시어머니를 모시고 가겠다는 제의를 했다. 시아버지는 일언지하로 내 말을 잘랐다. 나는 속초행 버스 속에서 여러모로 생각을 하였지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시아버지가 어른이지만 한 마디로 괘씸했다.


  며칠 뒤 대한통운 트럭에 이삿짐을 실었다. 운전석 뒷자리에 요를 깔고 시어머니를 눕도록 했다. 그리고 요강을 함께 모셨다. 다른 것보다 거동이 불편하여서 오줌이 가장 걱정되었다. 운전사가 강원도 속초시에서 철원군 마현리까지 6시간이나 걸린다고 하였다. 일단 출발하였다.


  가는 길은 꼬부랑 고갯길. 구비 구비 돌아서 오르락내리락. 어머니는 요강을 아예 끌어안고 머리를 들지 못했다. 나중에는 헛구역질하느라 눈만 껌벅댔다. 뼈마디만 앙상히 남아서 작아 질대로 작아진 시어머니였다. 괴로워하는 모습에 나의 입술이 바싹바싹 탔다. 그리고 시부에 대한 원망심만 커졌다. 기사는 자신에게도 노모가 계신다며 식당에서 점심만 먹고 쉬는 시간 없이 목적지까지 내달렸다.


  마현리는 휴전선 아래 동네였다. 관사는 한 동에 두 집이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파란 하늘과 사방이 시퍼런 산으로 둘러싸인 오지였다. 서울로 가는 버스가 하루 세 번, 군 트럭이나 지프차, 버스가 지나가면 누런 흙먼지 풀풀 날렸다. 또 여름 장마철 냇가는 흙탕물이 거칠게 흘러내려서 마치 황하를 연상케 했다. 겨울에는 무릎까지 빠지도록 눈이 내렸다. 비포장 길에 눈이 쌓이면, 병사들은 우리들이 잠자는 시간에도 쉴 새 없이 눈을 쓸었다.


  3구 3탄 보일러가 유행하였다. 한 구멍에 연탄 3장씩, 세 구멍 9장의 연탄불을 피웠다. 어머니는 연탄불을 활활 피워도 아랫도리가 시리고 춥다고 했다. 믿기지 않아서 이불 밑으로 손을 넣으면 방바닥이 뜨거웠다. 삼십 초반의 며느리는 시모가 억지를 부린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낯선 곳에서 몸과 마음을 추스른 시어머니는 활동하기 좋은 봄부터 지팡이를 짚고 관사 주변을 운동 삼아 다녔다. 봄볕에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릴 대로 그을려서 관사 구석구석을 누볐다. 눈을 씻고 봐도 노인 老자도 찾을 수 없는 동네였다. 군복 입은 남정네는 어쩌다가 만날 수 있는 젊은 여자와 아이들의 왕국이었다.


  눈이 허옇게 쌓인 겨울 어느 날이었다. 시어머니는 서울로 간다면서 괴나리봇짐을 들고 나섰다. 시어머니의 고집은 손 위의 동서들이 시아버지와 별거 원인의 하나였다고 했다. 앉은자리에서 한 자씩 뛰어오를 정도로 불같은 성미라고 큰 동서에게 들었다. 대대장이었던 남편의 체면도 있었으나 시모는 막무가내였다. 참으로 속수무책이었다. 나는 몇 집 앞에 사는 부대대장 관사로 쫓아가서 나의 곤란함을 말했다. 부대대장 댁이 친정 노모를 대하 듯 나긋나긋하게 시어머니의 마음을 가라앉도록 해주었다. 시어머니는 오지 않는 남편과 어쩌다가 오는 자식들에 대한 원망을 내내 혼자 삭혔다.


  느닷없이 대대 군의관이 수하를 데리고 관사를 방문했다. 1987년 시모와 영별 하기 일주일 전이다.  남편은 원주 상급부대로 출장을 떠난 상태였다. 군의관이 시어머니에게 패혈증 증세가 보인다며 서울 큰 병원으로 빨리 모시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남편도 없는 그  순간은 참으로 당황스러웠다. 내가 난감해하던 차에 반갑게도 남편이 지프차를 타고 나타났다. 나는 노모와의 마지막인 줄도 모르고 택시에 모자를 태워서 서울로 떠나보냈다.


   시어머니는 7남매를 둔 부잣집 안방마님으로 군림하였다. 시부가 안 계시는 동안 장성한 자식이 도박판에 빠졌다. 또 그 자식은 아버지의 사업용 트럭을 운전하다 상사(喪事)를 냈다. 부잣집 아들이 대형 사고를 친 것이다. 그녀는 아들노름빚, 사고 보상비용 독촉은 열화와 같았을 것이다. 연락이 닿지 않는 남편을 기다릴 강심장의 어머니가 몇이나 있을까. 1960년 대 그녀의 남편은 사업 차 외지로 떠나면 한 달이 지나야 돌아왔다. 지금처럼 통신이나 교통이 원활한 시절이 아니었다.


  시어머니는 그 상황을 견뎌내지 못한 것 같다. 몇 차례 그녀의 독단적인 재산처분으로 가세가 기울었으며 남편이 하던 사업도 완전히 넘어졌다고. 그리고 중풍으로 쓰러져서 큰아들 내외에게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그 당시 시모는 다른 여인에게 사랑을 뺏기고, 남편의 냉대를 견디며 살아야 했다. 나는 그녀가 남편과의 불화 원인을 제공했다고 짐작한다. 이후 세 번째 중풍으로 쓰러진 시어머니를 내 집에 남편이 모시고 왔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가끔 시아버지도 마음이 편치 않았던지 고인(故人)이 고생을 자초했다면서 내게 말했다. 손바닥은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독자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시아버지와 의논했다면, 그리고 시모가 자식을 위해서 저질렀던 일들이 시부의 외도와 별거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까. 부부의 불화는 바늘 하나 꽂을 곳 없이 살림은 줄어버렸다. 그 많던 재산은 시부모의 몫이 아니었다. 잠시 보관하고 있으라는 의미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남편의 건강한 몸만 만났다.


   한동안 생 속이던 삼십 대를 종종 되짚어 봤다. 30대의 나는 시모의 아팠던 속내를 헤아릴 줄 몰랐다. 내 나이 50쯤에 모시고 왔다면 시모를 외롭게 하지 않았을 것 같다. 나 또한 아랫도리가 시리고 추위를 많이 타면서 억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동감하였다. 이해되지 않았던 시모를 있는 그대로 보았을 것 같다. 내가 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안목이 키워지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나는 인과의 도리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깨우치고 있다. 




사진: 정 혜



대문 사진:

나도 사진처럼 저물어가고 있다. 오늘은 저물고 있지만, 저 달은 차오르는 중이다.



아래 사진: 찔레꽃.

 인생은 흥하면 망하고, 성하면 쇠하는 것이요, 또 생주이멸(生住異滅; 모든 사물이 생기고, 머물고, 변화하고, 소멸하는 현상.)이라 했던가.




https://blog.naver.com/jsp081454/22236180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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