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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혜 Apr 17. 2021

영화 암모나이트 보고

  선동이가  육아휴직을 시작하며 나에게 일주일 휴가를 주었다. 차일피일 본의 아니게 미루다 수요일 오전에 동대구역을 떠났다. 점심은 대충 샌드위치로 떼우고 오랫만에 창덕궁의 봄을 즐기러 손을 잡고 나섰다. 후동이는 2시까지 영화관으로 가야 한다고 서둘렀다. 서울의 대중교통은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곳이 아니다. 영화가 시작한 지 20여분이 지나 지정좌석에 앉게 되었다.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면 나타나는 현상이 이번에는 달랐다. 캄캄한 극장 안이 몇 초만 지나면 적응이 가능했다. 그러나 몇 분간 어두워서 지정좌석으로 가는 것이 무척 두렵고 더듬거려졌다. 늦어서 처음을 못 봤고, 어정거리느라 초반부를 놓쳐버렸다. 


  영화의 줄거리는 짧게 말해서, 여자들끼리 사랑을 하는 레즈비언(lesbian)의 '동성애'다. 우선 동성애의 의미를 정확히 알기 위해 네이버에서 정보를 찾아봤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옮겨 적은 레즈비언의 정의는,  

  "레즈비언이라는 말은 그리스  에게해의 레스보스 섬에서 유래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여류시인 사포(Sappho)는 동성애자였다는 설이 있는데, 그녀의 거주지는 레스보스 섬이었다. 즉 레즈비언이라는 말은 레스보스 섬의 사포와 같은 사람들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어, 점차 여성 동성애자를 칭하는 말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사포의 이름에서 유래된 사피즘(sapphism)도 여자의 동성애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레즈비언 사이에서도 옷차림이나 성격, 좋아하는 여성의 스타일에 따라 부치(butch)·펨(femme) 등으로 구분하여 부르기도 한다." 


  후동이가 제목을 말해 주었건만 잊고서 관람하게 되었다. 내가 마주한 화면은 1840년대의 빈한한 가정의 소박한 가구들, 무표정하면서도 거만한 인상을 풍기며 선이 굵은 고생물 학자 메리(케이트 위스렛, 메리 애닝 역), 딸의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하는 노모의 불만족스럽고 우울한 표정이 거득했다. 그리고 우중충한 날씨와 을씨년스러운 바닷가 풍경 등은  초반 장면을 놓쳐지만 그래도 구미가 당겼다. '밝지 않은 상황이 초반부터 펼쳐지니 앞으로 어떤 내용으로 전개하려고 저럴까?'라는 물음표가 앞섰다. 


  메리의 동네로 요양 차 온 상류층 부부와의 거래를 보면서 '남편과 불륜관계가 형성되려나'라고 짐작하였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 남편이 몸 약한 아내(시얼사 로넌- 샬럿 머치슨 역)를 돌봐 달라고 부탁하였다. 메리는 그런 샬럿을 아주 못마땅하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메리의 시선이 샬럿의 코르셋 끈을 조여주며 목덜미서부터 천천히 내려갔다. 샬럿의 목에서 어깨까지 흘러내리는 우아한 목선이 아름다웠다. 또 병간호를 하면서 샬럿의 등과 앞가슴을 헤쳐서 마사지하는 손길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남성적인 느낌을 풍기는 메리와 애교스러운 샬럿의 여성미를 드문드문 부각시켰다.  '동성애'를 다루려고 성감대를 세밀히 비추면서 강조하네~' 라며 생각을 바꿨다.


  샬럿이 아파서 메리 집으로 의사가 왕진 왔다. 의사가 메리에게 상당히 우호적으로 다가섰다. 메리가 자던 침대를 샬럿이 차지하게 되자 의자에서 자며 그녀를 간호했다. 샬럿이 함께 자자며 좁은 침대를 공유하고, 등을 돌려 눕는다던가 메리를 기다리는 장면 등에서 서로를 의식하는 표정이 보였다. 그래서 메리와 의사와의 러브스토리에 샬럿이 끼여서 '삼각관계가 그려질까?' 상상하며 나의 눈은 자막을 읽느라 바삐 움직였다.


  의사가 메리를 가정음악회에 초대를 했다. 메리의 요구로 샬럿도 함께 음악회에 가게 된다. 거기서 메리는 샬럿의 적극적인 사교활동을 불편해했다. 그녀는 안절부절 못하면서 흥분하는 자신을 어쩌지 못하여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귀가한 샬럿이 메리의 감정을 확인하면서 둘의 사랑은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깊이 빠져들었다. 나는 이때 '동성애'가 주제임을 알아차렸다. 전반부를 복선으로 처리하여 많이 헷갈렸다.


  나는 동성애가 아직까지도 이성애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몇 년 전 서울시청 광장에서 소수성애자들의 인권과 그들의 삶을 인정해 달라는 집회 광경을 보았다. 무심히 딸에게 '저런 있을 수 없는 일을 당당하게 요구한다'며 못마땅해하였다. 후동이는 소수성애자도 사람인데 멸시하는 발언을 한다며 나에게 일침을 가했다. 내가 그 순간 딸의 폭넓은 사고에 부끄럽기도 하면서 시대적으로 '꼰대' 소리 들을 나이가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전에도 영화를 통하여 부적절한 성관계를 보면서 '저러니 에이즈에 걸리고, 에이즈가 만연하지…'라며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스님에게 질문했다. 이런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고. 스님은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이다. 나는 질문을 하기 전 여러 모로 사유를 하며 한 결론을 잠정적으로 내렸던 터였다. 스님의 대답은 역시나 였지만, 나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 갑갑했다. 부적절한 성행위였으므로. 그런데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은 나에게 이해의 폭을 넓히는 기회라고 치부하면서도 개운하지 않았다.


  사랑은 소유하려는 속성이 있다. 메리는 고생물학자로서 외롭게 생계를 이어갔다, 사회적으로도 소외되어 힘들고 고독한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학자이다. 샬럿의 일방적인 호의의 배려는 그들의 관계에 금이 가는 계기가 된다. 상류층의 샬럿 집에는 메리의 방이 마련되어 있었다. 샬럿은 오롯이 그들만의 시간과 장소에서 사랑을 가꾸기를 기대했다. 메리는 고생물을 연구할 수 있는 바닷가, 자신을 온전히 인정해주며 독립적인 인격체이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샬럿은 사랑하는 사람은 소유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사랑하는 사람도 가지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사랑하는 연인을 보지 못해서 집착하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유하려고 집착하므로 번뇌가 일어나서 무척 괴롭다. 결국 사랑은 집착인 것이다. 이 집착은 상대방이 내게서 멀어지는 원인이 된다. 결국 메리는 샬럿의 제의를  단칼에 무우를 잘라 버리 듯 하고 냉정하게 대영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녀가 어릴 적에 박물관에 팔아서 전시되어 있는 암모나이트를 살펴 보려고. 샬럿이 대형 유리관 안을 살펴보는 메리 너머에 섰다. 그리고 둘은 서로를 응시했다. 카메라는 그렇게 한참 고정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대형 유리 전시관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며 움직이지 않은 채 영화는 끝났다.  


  상반되는 삶을 사는 두 사람이었다. 메리의 어머니는 자식 10명을 낳아서 다 죽고 둘 만 남았다고 했다. 그 어머니는 매일 동물 인형을 씻기고 닦아주는 한 많고 병적인 노인이었다. 메리의 궁핍한 생활은 시대가 여성의 권익(권리와 그에 따르는 이익)이나 권위(일정한 분야에서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영향력을 끼칠  있는 위신)를 인정하지 않던 사회를 불신하는데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무언의 표정 연기나 옷차림은 그것을 대변하였다. 노모의 병적인 집착심으로 더 그러하지 않았을까 하는 사유도 하면서. 메리는 부정적인 면이 강하게 느껴졌다.


  반면 샬럿은 아기를 잃고 마음 붙일 곳이 없었다. 남편은 아내를 소유물로 여기는 가부장제의 전형적인 남자였다. 샬럿은 남편에게서 안주할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였다. 그리고 부정적인 메리는 남성들이 여성을 완전한 인격체로 대하지 않았고, 권위를 보장하지 않던 시절의 여자 고생물 학자로서의 길은, 남성에 대한 불신의 골짜기만 깊어졌을 것이다. 그런 아픔을 지닌 두 여자는 서로를 알아보는 것은 지당하다고 여겨졌다.


  이 영화는 허구가 가미된 실재 인물을 그렸다고 한다. 나는 여러 영화를 통해서 '동성애', '양성애'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레즈비언'이다 '게이'라는 말은 여러 사람에게 들었다. 그러나 정확히 알지 못했다. 영화 후기를 써보려고 검색을 하면서 대강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나는 그런 사랑은 여전히 올바르지 못하다고 인식되었다. 여자와 남자의 성이 나뉘어진 이유가 무얼까.


  암모나이트는 시대의 한 단면을 짚으며 함께 고민해보자는 의도가 있었으리라. 그리고 이런 사랑도 있으니 동성애를 인정하라는 뜻도 다분하다. 이 영화는 나와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아무튼 이해의 폭이 넓어진 것은 분명하다. 


  


   사진: 정 혜


  대문 사진은 창경궁 내부의 어느 곳이다. 저 좁다란 길로 궁녀들이 다녔다. 그녀들 중 몇, 몇은 은밀히 동성애를 나누다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거나 궁을 쫓겨나기도 했다고 들었다.


   아래 사진은 오래 전의 그들은 모두 떠났고, 빈 집의 마당에는 민들레 꽃과 제비꽃이 땅바닥을 메우다시피 어우러져 있었다. 무상(無常), 항상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아련함이 가슴 한 켠을 눌렀다.

 

  


https://blog.naver.com/jsp081454/222313659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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