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 혜 Oct 16. 2021

참아야 하느니

  인식하기 어려울 정도로 멀고 오래된 날의 풍경. 아기를 안은 여인과 일행은 굶주림과 두려움 가득한 눈빛으로 사방을 살펴가면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세월이 흐른 뒤 보드라운 동물 가죽이나 식물 줄기의 껍질을 이용하여서 맨 손으로 어린아이를 안고 움직이는 것을 대신하였을 것이다. 또 갑작스러운 천재지변 등으로 영유아를 데리고 피난을 가려면 안전한 도구가 필요했으리라 짐작한다. 


  셀 수 없을 만큼 무한한 주야(晝夜)가 반복되고… 한 무리가 눈비를 막아주고, 생명을 위협하는 동물로부터 안정적인 정주처(定住處)를 지었다. 불을 피우면서 구들을 고안했으며 덮을 이불도 만들 만큼 지혜로워졌다. 조상님들은 아기를 감싸서 안을 용도와 업을 수 있는 이불을 얇고 작게 만들었다. 일명 두디기는 아기를 폭 감싸서 보온을 했다. 뿐만 아니라 조그만 이불은 영아의 두 팔을 옆구리에 붙여서 단단히 오므리면 허우적 대거나 깜짝깜짝 놀라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도 한다. 더하여 영아용 이불은 아기를 업고 두른 다음 긴 띠로 감아 앞을 여미면서 조여주면, 엄마와 아기는 하나가 될 수 있다.  


  두디기의 역사는 뚜렷하게 기록이 드러나지 않는다. 조상님들의 지혜가 발달하면서 편안한 생활을 추구하며 그 기능이 글로 쓰이던 시절부터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우리 조상님들의 의식주 문화 속에는 실생활에서 활용하며 녹아든 편리한 점이 아주 많다. 아기를 안아서 재우려고 서성이면 우선 팔부터 괴로움을 호소한다. 그럴 때 두디기를 두르면, 팔은 자유롭고 아기는 포근히 이내 잠이 든다.  

 

  사람 꼴을 한 손녀를 5일 만에 만났다. 신생아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지만 입맛은 다셨다. 아기는

아늑했던 태 안을 찾는 듯 양 손을 내두르며 두려워서 빼빼 울어 댔다. 어미가 젖을 먹이려고 안으면 보이지 않는 젖꼭지를 찾아서 얼굴을 가슴에 파묻었다. 손녀는 본능적으로 어미젖을 빨았다. 신생아는 엄마의 심장 소리, 아기를 어르는 목소리에 살이 올랐다. 눈을 떴으며, 차츰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손녀가 사람 꼴을 갖추는데 한 달 남짓 걸렸다.


  손녀는 점점 사람다워졌다. 신생아는 태 안이 아닌 안방 환경에 적응하느라 한 달가량 무척 힘들다. 한 시간 간격으로 젖 먹고, 기저귀를 갈아달라며 울음으로 호소하였다. 산모와 아기, 산바라지 모두 고생하는 한 달이다. 갓난아기는 자궁의 안락함이 그리워서 다시 가고 싶다며 '응애' 거리는 것 같았다. 신생아는 태어났으니 낙원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미 고달픈 생애는 시작된 것이다.


  손자가 한 달여 밤마다 울어댔다. 빽 빽 우는 신생아를 안고 어르는 것은 어른의 인내를 실험하는 것과 진배없다. 울화까지 치밀어 오르지만 "참아야 하느니라, 내 몸이 무너져도 참아야 되느니" 태어나서 보름도 되지 않은 녀석이 얼마나 지겹게 울어대는지 업으면 그칠 것 같았다. 두디기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위에게 손자를 내 등에 업히라고 말했다. 산후조리하며 누웠던 딸이 침대에서 발딱 뛰어내렸다. 아기 죽일 일 있느냐면서. 긴 기저귀로 업을 요량이었으나 딸의 강력한 저지로 무산되고 말았다. 손자 못지않게 손녀도 다들 자는 한밤중에 한 시간마다 할매가 약이 오를 정도였다. 이후 두디기 타령을 주야로 하였다.


  손자는 생후 56일, 손녀는 59일 만에 업었다. 딸 세대들은 아기띠와 유모차를 선호하였다. 엄마가 먼저

된 옆 집이, 친구가 사용하니까 뒤질 수 없는 문제다. 사위가 유명 상호의 유모차를 정성껏 조립하였다. 사실 어멈은 두디기 관련 유튜브와 태교 및 육아 서적을 많이 읽었다. 아기띠보다 더 우수하다는 것도 안다. 근거도 없다는데 다리가 휘어진다느니, 백일이 되지 않았다는 둥 갖은 이유를 댔다. 낮에는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다. 아기가 막무가내로 울어대는데 달리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새 두디기 구입이 두 달 가까이 걸렸다. 손자도 그랬지만 손녀 역시 업히자 가만히 얼굴을 등에 댔다. 


  백일이 지나면서 손녀를 유모차에 태워봤다. 어멈이 혼자일 경우 손자는 걸리고, 유모차를 밀면서 산책해 볼 분홍빛 계획이 몇 차례 실행되었다. 한 마디로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아기는 유모차가 불편하여 우는데, 엄마는 일방적인 생각으로 쪽쪽이를 빨며 누워있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유모차를 미는 엄마들은 처녀같이 옷을 입어 세련되고, 지적으로 보이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아기의 마음은 배려하지 않고 오로지 엄마의 입장과 편리한 것만 앞세웠다. 어멈이 어쩔 수 없어서 시도했지만 거부하는 손녀를 더 태우지 않았다


  아기띠는 나와 가슴을 마주했지만 허리에 통증이 느껴졌다. 아기띠의 장점은 두디기로 등에 업을 때처럼 긴 띠가 없어서 바닥에 끌리지 않는 것이다. 손녀가 앞을 보도록 아기띠를 해봐도 흡족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방법으로 활용해봤지만, 아기가 등에 업히는 것만큼 안온하지 못하였다. 


  두디기로 손자를 업고 천자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손자가 암송하는 소리를 들으라고. 돌아서면 막막하고, 기억을 되살리면 하얀 백지만… 그럭저럭 750자를 겨우 넘기면서 어영부영 손을 놓아버렸다. 외운 것이 아까웠지만 재도전은 외우는데 자신감이 떨어졌다. 손녀를 업으면서 도전장을 내밀었다. 현재는 손자 때보다 훨씬 이해도가 높고 암기 속도 또한 빠르다. 시내버스 속에서도 작은 소리로 떠나려는 기억을 붙잡아온다. 깍짓손을 하여 더듬대며 천자문을 외우다 보면 손녀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손녀는 백일을 넘겼다. 얼마 전에는 6000보를 채우기 위해 손녀를 업고 밖으로 나갔다. 좀 촌스럽게 느껴지기도 했고, 머리 허연 할매가 업고 다니는 것이 타인의 눈에 거시기해 보일 것으로 여겨졌다. 이것은 남의 이목이 신경 쓰인 나의 생각이었다. 업힌 손녀는 산책하는 내내 편안히 잠을 잤다. 걸으면서 두 손이 자유로우니 사진도 찍었다. 틈틈이 입으로 천자문까지 주절거리면서.


  두디기는 인간 중심적이다. 업힌 손주는 천자문 암송을 들으며 잠이 든다. 할머니는 대대로 물려받은 두디기로 손주와 하나가 되어서 천자문을 읊었다. 자궁의 환경 같으며, 업혀서도 엄마의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아기가 어찌 불안하리오. 손자가 손녀를 업고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며 천자문 외우는 소리를 듣고 따라서 했다. 샛별눈을 한 손자가 알아듣기 쉽게 천천히 또박또박 발음한다. 손자와 손녀는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면서 언행을 배우며 대인관계 또한 눈여겨보면서 들을 것이다. 교육자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닌 듯싶다.  


깍짓손(깍지 상태를 한 손)

샛별눈(샛별같이 반짝거리는 맑고 초롱초롱한 눈)



                         사진: 정 혜.


대문 사진:연잎에는 물방울이 잠시도 머물지 못한다. 연잎은 무엇 하나 품어서 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며 흔들어대면 또르르 굴러 떨어져 버린다. 손주를 돌보는 마음가짐을 배운다. 연잎이 품지 않는 것처럼 집착심을 가지지 말라고. 사랑은 주고, 평정심은 유지하는 것이란다.


아래 사진: 백일 전에 손녀와 거울을 보면서. 근래는 두디기로 업는 것이 편해서 무조건 업는다.   

            


https://blog.naver.com/jsp081454/222539076233 

작가의 이전글 2013년, 3000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