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장 우에 있는 기 머고?

by 정 혜

Day 30 어린 시절 당신 방에 있던 한 가지 물건에 대하여 써주세요. 단 그 물건의 입장에서 당신과 대화를 나눈다고 상상하고 글을 써주세요.



학교 사택은 2간(間) 장방(長房) 옆으로 한 칸의 길쭉한 부엌이 있었다. 마당이 아주 넓었다. 건물 앞에는 화단, 옆으로 텃밭과 푸세식(洗式) 변소가 있었으며, 그 뒤로도 빈 터가 있었다. 뒤 안에도 내가 놀이터 삼아 놀았을 정도로 넓디넓은 사택이었다.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때 아버지께서 대구 근교 국민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아버지는 화훼 가꾸는 것을 무척 좋아하였다. 봄, 여름, 가을의 아침은 화단에 물을 주고 텃밭을 돌보았다. 나는 잠자리에서 꼬물 락 거리며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이 꿈꾸듯 환하게 보일 즈음이면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겨우 눈을 뜨고 대답을 하면서 기지개를 켰다.


안방은 아버지와 어머니와 어린 동생이. 작은 방에는 나와 바로 밑 여동생과 일 하는 언니가 잤다. 아버지가 계시는 안방에는 내 키보다 높은 서랍장 위에 라디오 하나가 항상 재잘거렸다. 일 하는 언니가 틀어놓고 라디오 소리를 들으면서 일을 했다. 어릴 적의 나는 무척 몸이 약했다. 사흘들이 폐렴에다 기관지염으로 집에 누워 있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러다 보니 라디오에서 나오는 소리에 자연히 관심이 많아졌고, 언니와 같이 들었다. 나는 특히 연속극 그리고 가요는 모르는 것이 없었다.


어느 날 라디오가

"야야, 니는 맨날 아파가 그래 들누버 있나?"

내가

"어. 아픈 걸 우야노. 어젯밤에도 우리 아부지가 까무라친 나를 업고 병원에 댕기 왔는 갑던데…"

"자꾸 아파가 우짜지?"

"나도 모리겠다. 내도 모리게 아픈데 우짜겠노. 그란데 니는 도대체 무슨 노래를 그리 많이 아노?"

"내가 노래를 부를 줄 아나. 여어 방송국에 가수하고 성우들이나 아나운서들이 와 가 즈그가 안 하나."

"그런나?"

"그런데에 니는 날마다 노래 가사는 와 따라 적어쌌노?"

"그기야 노래가 듣기 조으끼네 받아 적는 거 아이가. 그라고 노래 가사가 기가 맥히더라."

"거어 '오발탄' 카능거 말이다. 성우가 저녁마다 하더라."

"니는 빌 거를 다 아네. 또 국민학생이 무신 연속극을 그러케 들어 쌌는데?"

"그기야 언니가 노상 안 듣드나. 그카이 따라서 나도 재미있어가 안 든나."

"그리 재미있더나?"

"어. 내가 연속극 주인공이 댔는 거 맨치로 하루 종일 대사가 떠 오르는데 우야노. 다음 날 어떤 내용이 나올낀지 궁금해가 연속극 생각 마이 한대이~"



라디오에서는 뉴스와 연속극, 대중가요, 일반 상식 등이 계속 나왔다. 나는 이 시절 일 하는 언니가 받아 적어가며 배우는 가요를 따라서 부르고, 나도 보고 배웠다. 그리고 그 노래들은 현재까지 기억하고 있다. 평소 생각지 않다가 노래를 부르면 저절로 나오기도 하고, 머리를 싸매고 두어 시간 후면 가사가 떠오른다. 나는 기억력이 정말로 안 좋은 사람이다. 공부하는 것에 취미를 못 붙이는 이유 중 하나다. 그러나 어릴 적 듣고 배운 대중가요는 더듬거릴 망정 다 따라 부를 수 있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엄마의 계가 대형사고로 불거지면서 그 사택을 떠났다. 사택을 떠나기 전 이미 경찰을 비롯하여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와서 집안을 뒤지는 것을 봤다. 그 이후 라디오는 어디로 갔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다. 그런 와중에도 꾸준히 듣던 연속극의 다음 편이 궁금하기도 했다. 사건이 있은 그 이듬해인가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철없는 사람은 하숙집 안방에서 들려나오던 새로운 연속극이 듣고 싶었다. 어떤 날은 하숙집 안방 마루 끝에 앉아서 살며시 엿듣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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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정 혜.



대문 사진: 아파트 단지에서 가을 하늘이 아름다워서 올려다 봤다. 잎이 작고 얇은 벚나무가 어느새 잎을 다 떨구고 허허롭게 하늘을 열어 보였다.


아래 사진: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아래 소나무와 은행 단풍이 절묘하게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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