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크 세례 받아본 적 있나요?

by 정 혜

Day 34 당신이 구입한 물건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물건에 대해 써주세요.



지인이 재작년인가 리필용 만년필을 하나 주었다. 상당히 편리했을 뿐만 아니라 실용적이어서 매우 흡족했다. 우선 잉크 넣으려는 시간 낭비와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었다. 만년필 잉크가 바닥나면서 재활용하지 못한 채 차일피일 구입을 미루며 잊힌 존재가 되었다. 금년 11월부터 시 필사를 하면서 잉크를 보충하여 사용이 가능하면 볼펜보다 만년필로 써야겠다 싶어 문구점으로 가봤다.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는 연필로 글씨 쓰는 것을 배웠고, 연필을 사용하는 시대였다. 볼펜이 처음으로 나왔던 시절이라 다 쓴 볼펜 대에 몽당연필을 끼워서 알뜰히 꽁지만 남을 때까지 글씨를 썼다. 꽁지의 길이는 약 1센티 남짓 되어도 빈 볼펜에 단단하게 끼우면 제법 쓸 수 있다. 연필 깎기 불편할 때 버리면 됐다. 중학교 입학하면서 펜에 병에 든 잉크를 찍어서 글씨를 쓰게 되었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는 교실에 학생 수가 많아서 책상과 의자를 다닥다닥 붙였다. 잉크는 우리들에게 익숙하지 않아서 앞에 앉은 학우에게 민폐를 많이 끼쳤다. 하얀 교복 상의에 잉크가 튀기거나, 잉크 병이 넘어지면서 앞 학우에게 불똥이 튀는 것이 곳곳마다 벌어지는 진풍경이다. 한 번은 옆의 친구가 깨끗하게 손질해서 입은 흰 옷에 잉크 세례를 받았다. 기겁을 하면서 새청맞은 신경질을 부렸다. 이 일을 어쩌면 좋으냐고 들뛰었다. 치마는 감색이나 검정이니 튀어도 별 표시가 없어도 화를 내기 여사였다. 본의 아니게 일을 저지른 친구는 미안해하면서 절 절 맸다. 수돗가에 가서 교복을 벗어 빨아보지만 한 번 묻은 잉크는 지울 수 없었다. 교복 상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잉크가 튀어서 점들이 여러 군데 있었다.


나는 잉크 세례를 받거나 쏟는 예는 잘 없었다. 연필로 꾹 꾹 눌러쓰던 습관이 남아서 펜을 누르며 글을 쓰면 뒷장에 배여서 노트가 깔끔하지 않았다. 볼펜은 사치품에 속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고등학생들도 잉크를 사용했고, 좀 있는 집 애들은 만년필 쓰는 것이 가끔 보였다. 국산품으로 파이롯(pilot)이라는 만년필이 유명했으며, 미제 파커도 선물로 많이 주고받았다. 나는 파커 만년필을 가지고 싶었다.


파커 만년필과 파이롯은 펜 촉에서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이 시대 학생들은 대부분 글씨를 예쁘게 잘 썼다. 근래의 아이들처럼 악필은 아니었다. 나도 글씨를 잘 쓴다고 칭찬을 듣던 사람 중 하나였다. 혼인 한 후 글씨는 손을 놓다시피 하면서 서서히 악필이 되어갔다. 보는 사람들마다 글씨체가 좋다고 하는데, 글씨체가 퇴보하고 있어서 악필로만 써 졌다. 그리고 볼펜이 대중화되면서 나의 악필이 가중되었다. 내 딸과 아들은 초등학교에서 연필로 글씨 썼으나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볼펜도 사용하는 것 같았다. 또 컴퓨터도 대중화되면서 학교에서 연필로 글씨 쓰는 것에 공을 들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학부모인 나도 관심을 가지고 지도하지 못했다. 근래 모든 학생들의 글씨가 괴발개발이 되어서 안타깝다.


우리 아이들은 악필이 아니다. 다만 잘 쓰는 글씨체가 아니라서 불만스럽다. 나 또한 글을 쓸 때면 컴퓨터 자판을 두드린다. 딸은 펜을 사용하라고 강요하지만, 나의 악필이 보기 싫어서 악착같이 컴퓨터 앞에 앉는다. 시 필사는 악필을 교정해보자는 엉뚱한 발상으로 시작되었다. 그래서 문구점으로 갔더니 내가 가지고 있던 제품이 없었다. '봉 대신 닭'이라고 볼펜 같은 만년필을 소개받았다.


일회용 만년필은 단 돈 2000원. 호기심이 발동하여 샀더니 예상외로 매력 있는 제품이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2000원어치 글씨만 쓰면 된다. 또 잉크를 넣을 필요도 없다. 값이 저렴하다. 글씨를 쓰면 사각사각 소리가 경쾌하다. 두 자루를 사서 매일 시 필사하는 기분이 남다르다. 날마다 시 필사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한다. 그런데 단점이 재활용 불가다. 지구는 몸살을 앓고 있는 중이라 신경이 많이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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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정 혜


대문 사진: 나무 이름은 잊었지만, 수형(樹形)이 우산같이 생겼다. 잉크 세례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학생들이 손전화기에 정신을 집중한 채 비 세례 받지 않을 곳으로 다가오고 있다.


아래 사진: 석류나무의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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