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7 사과를 떠올리고 사과라는 단어를 절대 쓰지 않고 글을 읽는 사람이 사과를 연상할 수 있도록 글을 써주세요.
지난 9월 어느 날이다. 퇴근하던 사위가 장인 가방을 여러 개 힘겹게 들고 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사위에게 놀라서 물으니 장인의 호출로 영문도 모르고 짐과 가방을 들고 온 것이라고 했다. 남편은 딸의 아파트에 살 것처럼 자신의 많은 소지품들을 옮겼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떤 피치 못할 사건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 바리바리 싸들고 올 수 있냐 말이다.
11월 중순인 근래, 남편은 얼마 전부터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야, 캄캄한 집에 들어가려니 얼마나 서글픈지…" 남편은 아침마다 자신이 먹는 것을 손수 만든다. 딸이 주방을 잠깐 비우는 사이에 자기 식사를 준비하면서 손자에게 과일을 먹이려고 애를 썼다. 손자는 이 과일이라면 주는 대로 받아먹어서 할아버지에게 기쁨을 제공한다. 할아버지는 아파트에서 두 달이 지나는 동안 행복의 묘미를 알아가는 것 같다.
"할아버지가 깎아줄게. 잠시만 기다려 줘." 손자가 할아버지 손에 쥐고 있는 것만 쳐다보고 팔을 뻗었다. 할아버지는 손자의 눈을 바라보고, 손자는 할아버지 손에만 관심이 있었다. 잘 먹는 손자가 대견하여 남편 혼자 신이 나서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는다. 손자는 기다리지 못하여 "에! 에!"라고 마구 소리를 질렀다. 안고 있는 내가 뒤로 밀릴 정도다. 남편은 손자의 재촉이 마냥 좋은 모양이다.
"아버지가 너희들에게 아침마다 챙겨주는 것이 정말로 행복해." 하루 바삐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눌러앉을 것 같이 말을 했다. 며칠 전에는 내 집에서 겨울 옷을 다 챙겨 왔다. 한 지인이 '남자는 나이가 들면 불쌍해지니 누님이 매형에게 잘해주세요.'라는 문자를 보냈다. 그도 비슷한 나이여서 남편이 혼자 있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남편은 때깔 곱고 꿀이 박힌 것을 찾아서 밀양까지 다녀왔다. 남편의 얼굴빛이 좋을 때는 처자에게 빵점이었다. 남편이 퇴근하거나 외출했다 집으로 돌아오면 TV 앞에 있던 아이들은 각자의 방으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언젠가 거실에서 재밌게 시청하는 것을 무시하고 남편이 선호하는 채널로 돌렸다. 최근까지 남편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 또한 방으로 들어가서 사경을 하거나 컴퓨터를 마주했다.
"할머니 먼저, 엄마도 한 개, 우리 강아지도 하나~" 남편이 손자의 손에 노르스름한 조각을 쥐어 주었다. "아삭, 아사삭!" 앞니 네 개와 아랫니 4개로 베어 무는 소리가 경쾌했다. 손자는 우리 가족이 하나가 되도록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나 또한 손자를 키우면서 많은 생각을 하였다. 불시에 딸의 아파트로 기습하다시피 쳐들어오는 연극을 할 땐 얼마나 외로웠으면 그랬을까 추측이 되었다.
그런데 사돈이 뒤에 있다. 사전에 사돈에게 의논이 있었다면 떳떳하게 머무를 수 있다. 그러나 남편은 그렇지 못했기에 딸의 처지가 곤란해질 것이다. 남편은 미리 헤아려서 내 집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남편은 손자가 꿀이 박힌 맛에 빠졌듯 그도 역시 짧은 이 행복함에 완전히 푹 빠졌다. 남편은 신선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는 듯하다.
사진: 정 혜.
대문 사진: 대구 안심체육공원에는 억새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억새 너머 저 하늘이 허허로워서 목이 아프도록 올려 보아도 또 그립다.
아래 사진: 꽃사과 꽃. 봉오리와 꽃잎의 색깔이 다르다.
댓글 25 공감 25
fragancia Nov 18. 2020
작가님 글을 읽으면서 저희 친정아빠께서 저희 아들에게 사과를 깎아주셨던 모습이 떠올랐어요~ 사진으로 남겨놓길 너무 잘했다 생각이듭니다!! 예쁜모습 글로 표현해주셔서 감사해요
상선약수 Nov 18. 2020
손주에게 먹일 맛있는 사과를 구하기 위해 밀양까지 다녀오신 것을 보면 할아버지가 손주 사랑에 푹 바지신 것 같습니다. 혼자 계시다가 딸, 사위, 손자와 같이 사시니 행복에 겨워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듯 합니다. 손주가 소원했던 가족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가교 역할을 해서 귀엽고 기특하면서도 행여 사돈이나 딸 부부에게 신경이 쓰일까 염려도 되고... 작가님이 남편분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이 드시는 것을 아주 유쾌하게 표현하셔서 읽는 사람이 절로 미소짓게 되는 것 같아요. 작가님의 사진 또한 항상 저의 마음을 정화시켜주곤 하는데 오늘 글 말미의 사진도 넘 예뻐요. 행복한 마음으로 하루를 정리합니다~^^
박유신 Scott Park Nov 19. 2020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그 과일 사과 맞죠?
혜나무 Nov 19. 2020
작가님의 사랑스런 손자가 복덩이 입니다. 강팍한 마음들을 녹여주고 하나로 모아주는 천사네요.
이 사과라는 과일은 웬만한 나라에는 다 있고 웬만한 사람들은 다 좋아하는 신묘한 과일입니다.
과육속에 투명하게 박혀있는 꿀! 그런 사과를 고르기란 쉽지 않더라구요. 손자를 위해 먼길도 마다하지 않으시는 할아버니의 사랑이 흐믓합니다.
그 사랑스런 손주가 얼마나 보고싶으시겠어요. 그 환한 곳에 있다가 홀로 댁으로 들어설때의 낯섬, 서늘한 외로움은 남편분께 충분히 따님집으로 짐을 옮기는 용기를 주었겠죠 ^^.
마지막 표현이 재밌으면서도 짠하게 다가오는 건 왜일까요? ㅎㅎ. 사랑가득한 글 잘 읽었습니다 !
정 혜 Nov 22. 2020
아버님은 차도가 좀 있으세요?
연세 때문에 조금 더디게 차도가 있더라도 느긋이 계셔요.
건강하신 분이셔서 아마 잘 이겨내실 거예요.
그러고 보니 이모님도 편찮고, 아버님도 그러시네요.
향기님의 건강한 향기로 치유의 효과를 올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향기님 힘 내세요!
정 혜 Nov 22. 2020
저의 사진이 도움이 되신다니 더 고맙습니다.
말미의 사진은 꽃사과 꽃입니다. 올 봄에 아파트 내에서 찍었어요.
글의 주제가 사과여서 일부러 꽃사과 꽃을 첨부했답니다.
12월이 지나면 선생님 글 읽고 댓글을 여유 있게 쓸 수 있어요.
그때까지는 빠르게 답글 올리지 못해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정 혜 Nov 22. 2020
@박유신 Scott Park
맞습니다.
저가 주어진 글의 주제에 맞게 잘 쓴 것 같습니다.
저에게 질문 하신 것을 보면 말입니다. ㅎㅎㅎ
고맙습니다!
정 혜 Nov 22. 2020
멋 모르고 키우던 내 자식과 풍부한 경험과 여유 있는 사고로 대하는 손자는 확실히 다르네요.
어제 사위와 저의 집으로 오는 도중에 부모는 몰라서 놓치는 부분을 조부모는 짚어서 가르쳐준다고 알려주었답니다. 저의 내외도 그랬으니까요.
혜나무님께서도 손자를 보시면 저와 비교가 안 될 글이 나올 것입니다.
그 날이 기대되는 데요.
사랑이 가득한 혜나무님의 댓글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옥돌의 책 글 여행 Nov 22. 2020
아삭 아사삭
사과 씹는 소리에 군침이 도네요.
제가 젤 좋아하는 과일이에요.
사과와 손주와 남편분과 딸, 사위 온 가족에 사과가 새콤달콤함 행복을 선물하네요
꼬마마녀 Nov 22. 2020
꿀이 들어있는 과일에 할아버지의 사랑이 듬뿍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맛난 글 잘 읽었습니다
gogogo Nov 22. 2020
밀양 얼음골사과 최고의 맛이지요
어쩜 글을 이리도 구수하게 재미나게 표현하실까요
잼나게 읽었어요..생활속에 글감들을 생각하고 사시는지요?
넘 대단하셔요.
가족들이 한꺼번에 회목한모습 그립습니다..
일과삶Nov 22. 2020
땟깔곱고 꿀이박힌 그것 저도 한입 깨물고 싶네요. 손자가 맛나게 먹는 모습만 봐도 흐뭇할 거 같아요~
정 혜 Nov 22. 2020
동행님은 사과를 좋아 하시는군요.
사과 맛처럼 집안 식구를 하나로 만드는데 손자가 일등 공신이예요.
사과 베어무는 소리가 듣기 좋은 것은 손자가 처음입니다.
고맙습니다.
정 혜 Nov 22. 2020
맛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편안한 밤 되시고요.
정 혜 Nov 22. 2020
글감 생각은 할 수 없어요.
손자와 하루를 보내노라면 어느새 해가 지고 자야 할 시간이랍니다.
손자 없을 때 맘껏 즐기고 배우시기 바랍니다. ㅎㅎㅎ
많은 경험이 글감이 되네요.
그리고 캘리고님도 상담 분야에서는 글감이 많잖아요.
경우가 다를 뿐이랍니다.
공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정 혜 Nov 22. 2020
자식에게 못한 점이 가슴에 응어리처럼 남아 있었는데, 손자에게 보답하는 의미가 아닌가 싶어요.
실제로 손자를 키워보니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아기들이 다 예뻐요.
공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희망 Nov 23. 2020
주제를 읽고 '나는 어떤 묘사로 사과를 표현할까..' 생각하고 글을 읽었는데 일상에 녹아있는 사과를 만나서 깜짝 놀랐어요. 저는 오로지 사과 자체에 빠져 사과에만 머물러 있었거든요. '아삭'에서 선명한 꿀사과가 떠오르면서 침이 고여요. 사물 자체에 집중하지 않아도 사물을 멋지게 표현할 수 있군요. 정말 잘 읽었습니다♡
성실한 베짱이 Nov 24. 2020
과일을 깎는 모습, 조그만 조각을 아이에게 쥐여주는 모습, 쥐는 아이의 손, 씹는 소리. 적절한 묘사로 사과가 충분히 연상될 수 있는 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사과를 과일 사과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 그래서 다 읽고 나서 누구에게 사과하는 거지?라는 생각을 했죠. ㅋㅋ 생각해 보니 과일이더군요. 근데 손자가 먹는 과일이 사과라는 걸 전 알고 있었습니다. 생생한 묘사였어요~!
김영우 Nov 25. 2020
노르스름한 조각을 맛있게 먹는 손자의 모습에 모든 가족들의 웃음꽃이 피어나지 않나 싶습니다. 그나저나 주제가 쉽지 않았던 것 같은데...저는 어떻게 사과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사과를 연상할수 있는 글을 적을수 있는 고민해 보았는데, 쉽게 떠오르지가 않네요 ㅎㅎ
하이바디 Nov 26. 2020
잘 읽었어요. 글감을 던져 이렇게 글을 써보는 것도 재이있는 작업인 것 같아요. 갑자기 사과를 먹어야 할 것 같은ㅎㅎㅎ
화몽 Nov 28. 2020
밀양꿀사과 맛있죠. ㅎㅎㅎ 어릴때는 자주갔는데욤. 매일아침 사과 반개에서 하나를 먹어요. 눈뜨자마자 마시는 물을 제외하면 16시간만에 먹는게 바로 사과. 세상 이런맛이 존재할까 싶어요 ^^
정 혜 Dec 01. 2020
공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말에 묶이니까 원활한 사유를 할 수 없더라구요. 저도.
사과가 연상되었다면 저도 안심입니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
정 혜 Dec 01. 2020
표현 잘했다는 칭찬 고맙습니다.
12월이네요. 벌써.
마지막 달의 초하루도 좋은 날 되시고예.
정 혜 Dec 04. 2020
영우님도 글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실이 술 술 풀려나오듯 글이 써질 것입니다.
손자가 우리 가족을 더 화목하게 만들어 주네요.
바쁜 오늘이겠지만 또 금요일이네요.
토, 일요일 늦잠 좀 주무셔도 되겠네요.
답글이 늦어서 미안합니다.
햄릿형인간 Dec 07. 2020
할아버지도 어린 저를 귀엽게 봐주셨을까 모르겠어요 ㅋㅋㅋ 읽으니 뭔가 귀여워해주셨는데 제가 몰랐을꺼란 생각도 드네요. 가족이라는 것도, 부부라는 것도 참 어려운 거구나 생각도 듭니다. 좋은 글 감사해요!!
Nov 17. 2020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