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플 때 아프다 카지 마이소오

by 정 혜

Day 28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는 기억이 있나요?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는 기억은 없다. 그러나 듣기만 해도 눈물이 나는 경우는 많다. 다양한 상황 중에서 아버지와 관련된 이야기는 일단 마음 밑자락부터 찡하다. 불치의 병으로 고생을 많이 했거나 힘겨운 삶을 살았다면 즉시 눈물이 앞을 가린다. 유달리 아버지 이야기는 항상 가슴이 아릿하다. 나의 아버지는 평범한 교사로 재직하던 중 세상을 달리 하였다. 그것도 집안 살림이 펴질 무렵 간암 선고를 받고 삼 개월 만에 우리와 영별이었다.


아버지는 긍정적인 분이다.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아버지의 영정 사진은 그늘이 짙었다. 영정 사진을 볼 적마다 의문이 들었다. 내 가족과 복닥거리느라 아버지에 대한 생각은 안중에도 없었으나 어느 구석 한 켠에는 웅크리고 있었다. 언제 적 남편과 시가의 행사를 마치고 대구로 내려올 때 라디오에서 문득 어느 아버지를 추억하는 편지 글을 소개했다. 눈물이 어느 순간 한쪽 볼을 타고 흐르더니 양쪽으로 줄 줄 나왔다. 급기야 콧물마저 합세하여 흐느낌으로 변했다. 남편도 훌쩍거렸다. 우리는 서로 왜 우는지모르고 한참 울었다.


첫째 쌍둥이를 낳을 때다. 아이고~ 신음 소리를 최대한 작게 내려고 노력했다. 요란떠는 것이 부끄러웠고, 아버지가 옆에 계셔서 불안해 할까봐 더 그랬다. 아버지가 집에서 요양하고 계실 때 "아부지예, 통증이 심해지더라도 소리 내서 아프다 카지 마이 소오. 그라마 엄마가 더 아파합니더." 내가 아버지 소식을 듣고 친정에 내려가서 위로차 했던 말이다. 아버지는 "온야아, 내 그래보꾸마"


아버지가 별세하신 후 깨달았다. 그 아픔의 강도와 몰랐던 나의 무지를. 아버지는 신음을 내지 않으려고 진땀을 더 뺐을 것이다. "아부지예, 미안합니더. 아프거든 마구 마구 소리를 질러뿌라 캤어야 되는데… 미안합니데이…" 이때까지만 해도 피상적이었다. 내가 2016년 디스크 추간판 탈출로 통증을 느껴보니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30년이 더 지난 후에야 아버지의 고통스러움을 이해했다. 생 살을 예리한 칼로 베어내는, 아주 뾰족한 침으로 무자비하게 찔러대는 그 괴로움을…


어머니도 20년이 넘게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고생했다. 이 또한 감당 못할 쓰나미 급 이상이다. 그러나 아버지만큼 눈물이 나올 기미가 없다. 어머니의 집착은 내 가슴에서 강물이 흘렀다. 강물은 깊었고, 유장하고 도도했다. 아버지의 배는 흔들렸고 멀리 흘러가서 강기슭에 닿아 있었다. 아버지는 강물의 깊이를 알았고, 거칠었던 속도만큼 노를 저었다.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적에 전라도 오지에서 다시 교단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영호남의 차별대우로 승진할 기회에서 배제되었다. 남자로서는 불명예스러운 일이었고, 가장으로서도 면목이 서지 않았다. 나의 큰 외숙은 일제 때 경북 달성군 장학사를 지냈으며, 아버지를 만날 무렵에는 근무하던 학교의 교장이기도 하였다. 그런 오빠를 둔 엄마의 눈에는 아버지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나의 손바닥을 본다. 남의 것을 탐내지 않았는지 손을 본다.' 아마도 이렇게 적은 조그만 종이를 보았다. 세로로 써 내려간 아버지의 반듯한 글씨체가 평소의 모습과 흡사했다. 아버지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보관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어디에 들었는지 전혀 모르겠다. 아버지의 그늘로 젖어들었다. 지난했던 아버지의 생을 얼싸안았다. 이런 아버지가 시대를 감내하면서 받아들인 것은 암이었다.


아버지에게 참으라고 하면서 염불을 권했던 같다. 당시 아버지는 대구로 전근을 오지 못한 채 전라도에 혼자 있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가까이하던 마을 주민들과 무너져 가는 절을 복원하는데 앞장서고 있다고 한 말씀이 나와 마지막 대화였다. 그리고 임종할 때 세 동생에게 서로의 손을 잡고 아버지를 위해 '관세음보살'을 눈감고 외우자고 했다. 초발심 불자로서 아버지를 그렇게 보내드렸다. 아버지 얼굴에는 화색이 감돌았고, 몸이 따뜻했으며 편안해 보였다.


딸의 서재에는 외아버지의 사진이 한 장 있다. 내 쌍둥이가 5살 무렵 외할버지와 대구 동촌 유원지 '출렁다리'에서 찍었다. 이때 아버지는 통증이 밀려와서 배를 부여잡고 다녔다는 말을 얼마 전 여동생이 전해주었다. 이때는 두 아이를 맡겨두고 시가에 일이 있어서 수원에 가 있었던 것 같다. 두 딸은 할아버지와의 인연이 마지막이었던 당시를 사진으로만 기억을 할 뿐이다. 아버지의 성정은 두 손녀와 기쁘게 나섰을 나들이였을 텐데 밀려드는 통증으로 택시를 타고 귀가할 땐 속이 많이 상하였을 것이다. 몇 년 전 출렁다리는 없어지고 그곳은 새로운 환경으로 바뀌었다. 현재 출렁다리 부근에 살면서 가끔 차를 타고 지날 적마다 아버지의 사진이 떠오른다.


손자를 업거나 안고 매일 두 손녀와 찍은 출렁다리 사진을 본다. 이젠 나의 감정도 많이 무디어졌다. 그렇지만 '아버지'라는 말은 그렇지 않다. 마냥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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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정 혜.


대문 사진: 아버지는 화훼 전문가였다. 항상 꽃을 돌보고, 채소를 심는 아주 성실한 분이었다. 사계절이 변화하는 과정을 즐기는 멋을 내가 어깨너머로 배운 것 같다.


아래 사진: 1987년 여름 어느 날, 아버지는 아픈 몸으로 두 손녀를 데리고 기분 좋게 나섰던 아양교의 출렁다리 나들이에서.



댓글10 공감 23 공유 7



캘리Calli Nov 19. 2020

아버지에대한 애잔한마음이 전해옵니다.

정혜님의 그 한마디에 아버지는 어땠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지죠?
그러나 아버지는 정혜작가님의 속마음 알거예요
아버지를 사랑한다는것을요


혜나 Nov 19. 2020

아버님의 고통을 깊게 알아차리지 못했던 자식으로서의 한과, 아버님이 살아오신 인생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깊게 전해옵니다. 특히 작가님께서는 아버님에 대한 사랑이 어머님에 대한 것보다 더 깊으신 것 같아요. 제가 아버지보다 엄마에 대한 마음이 더 깊은 것처럼요.

큰 통증을 참아가시면서 사랑스러운 손주들과 함께 하셨던, 사진속 아버님을 보면서 많이 죄송스럽고
그립고 그러실 것 같아요. 저도 장면들이 연상되어 눈물이 났습니다....


상선약Nov 19. 2020

'마지막 나도 아버지처럼 손주를 데리고 매일 아버지 사진을 본다'는 구절이 우리네 인생, 삶을 축약해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아 강한 여운이 남습니다. 우리의 부모님이 걸어가신 길을 지금 우리가 걸어가며 부모님을 추억하고 그리워하듯 우리 아이들도 그러하겠지요... 마음이 촉촉하게 젖어드는 글, 저도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밤이 될 것 같습니다.


박유신 Scott Park Nov 20. 2020

그러셨군요. 가슴이 아릿한 아버님에 대한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글을 읽었답니다.


공대생의 심야서재 Nov 20. 2020

아무리 감정이 무디어졌어도, 아버지라는 단어는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ㅠㅠ


Nov 22. 2020

@캘리Calli

저의 마음을 알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따뜻한 그 마음씨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
곧 글고님 글 보러 갈게요.
좋은 시간 보내세요!


정 혜 Nov 22. 2020

@혜나무

혜나무님은 글을 파악해내는 예리한 눈을 가지셨어요.
작가로서 최고의 장점을 지녔어요.
혜나무님의 댓글을 읽은 후 다시 사진을 보게 되었어요.
얼굴에 살이 빠져서 역삼각형이더라구요.
그래서 또 눈물이 핑 돌고...
살아 생전에 전화 한 번이라도 더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진심 어린 댓글 고맙습니다.


정 혜 Nov 22. 2020

@상선약수

인생유전(人生流轉)이라는 말을 실감하며 살고 있습니다.
부모님보다 더 나은 교육으로 손자를 대하려고 항상 마음 가짐을 달리하기도 합니다.
돌 즈음 하여 보름달이 뜬 어느 날 손자에게 달을 설명하였더니 인식하였나 봐요.
14개월인 요 사이 상현달을 보면서 손가락질 하며 우! 우! 소리를 질러요.
구름에 가리워져 달이 없으면 없다고 소리를 하구요.
상선약수 선생님은 손자를 보면 훌륭하신 할머니가 되실 거예요.
고맙습니다.
상선약수 선생님.


정 혜 Nov 22. 2020

@박유신 Scott Park

그때 그랬답니다.
각자의 사연으로 고인이 되신 부모님을 추억 하면 모두 가슴 아플 거예요.
다 다음 월요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정 혜 Nov 22. 2020

@공대생의 심야서재

몇 달 전에 공심님의 아버님을 추억 하는 글 읽은 적 있습니다.
공심재에 가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저와 문체가 다르다는 것을 느끼기도 했지요.
감정이 무디어져도 '아버지' 단어에는 슬프다는 말씀,
동감입니다.
잘 이끌어주셔서 고맙습니다.



Nov 19. 2020 작성






oNov 19. 2020 1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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