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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혜 Dec 04. 2021

보이스 피싱의 전형적인 수법이네요

  11월 26일 금요일 오전.

  골다공증 수치가 낮아서 일 년에 한 번씩 주사를 맞는 날이다. 일찍 집을 나섰건만 줄을 서서 기다렸다. 코 선생님과 독감님 백신 접종자와 일반 내과 진료가 겹쳐져서 무려 40분이 지나서 병원 침대에 누웠다. 시계가 10시 35분이었다. 뜨뜻해져 오는 침대에서 느긋이 눈을 감았다. 눈을 떠서 시간을 확인하며 다시 감기를 반복했다. 12시면 다 맞으리라 예상했는데 그렇지 않아서 머리맡에 둔 손전화기에 신경이 쓰였다. 딸의 목이 길어질 대로 길어진 학의 목으로 깍! 깍! 될 것 같았다.  


  11시 09분, 엄마 아침에 폰 수리보내서 통화가 안돼... 문자 보면 답장줘   

  모르는 번호네. 또 딸의 전화기가 말썽을 부렸나. 아침부터 수리를 한다니… 서비스 직원 전화기로 문자를 보내는 가보다. 오른손이 고정되어서 답을 보낼 수 없었다. 베개 밑에 전화기를 밀어 넣고 천자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12시 즈음 예상했던 골다공증 주사는 1시가 가까워져도 수액이 그대로였다. 딸이 조바심을 내면서 안절부절하는 모습이 선연했다. 간호사에게 주삿바늘을 뽑아달라고 말을 했으나 점심시간과 자기들 업무가 바빠서 금방 오지 않았다. 담당 간호사 아닌 간호사가 와서 주삿바늘을 겨우 뽑아주었다. 오른손이 자유로워져서 12시 48분에 '이제 다 맞았어. 조금만 기다려줘.' 침대에서 문자를 보낸 뒤 수납 창구로 갔다. 


  병원 앞 횡단보도를 건너 버스 정류장으로 걸었다. 걸으면서 손전화기를 들여다보니

1시 04분에 아까 수리맡기고 폰보험금 신청중인데 바쁘면 시간 내줘..

1시 05분 지금 버스 타러 가

1시 05분 본인인증 안돼서 엄마 명의로 신청해야될꺼 같은데

1시 05분 해봐

1시 08분 일단 엄마 돈받을 계좌번호랑 민증사진찍어보내줘 엄마폰 연결해서 폰 보험금 신청해볼게

  


  병원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걸으면서 문자를 주고 받았다. 1시 11분 정류장 가까이서 주민증 사진을 찍었다. 계좌번호는 전화기 삼성 노트에 적어둔 것을 복사해서 붙여 넣기 하였다. 목적지까지 타고 갈 버스를 기다리며 사진을 찍어서 보냈더니 

  1시 12분 엄마 사진 정면으로 빛반사 안돼게 다시 찍어줘

  속으로 딸의 부탁이라서 해주지만 별 것 다 시킨다고 생각하며 빛을 피해 신경 써서 단추를 눌렀다. 1시 14분 주민증 사진을 보내주었다. 버스를 탔는데 전화기에 바로 글이 들어왔다. 


  좌석에서 딸의 착실한 학생으로 입이 댓 발이나 빠져나오는 것을 감수해야만 했다. '어제는 말이 없었는데 갑작스럽게 폰을 고치러 가? 사위에게 전화해 봐? 근데 사위는 근무 중에 전화를 잘 받지 않잖아. 딸은 고장이 났으니 전화를 해볼 수도 없고여러 가지로 속을 썩이고 있어…


  1시 20분. 손전화기에 딸의 이름이 떴다. '어?'  "엄마, 어디야! 12시 즈음 온대 놓고 왜 이렇게 늦어!" 

'앗차! 보이스 피싱이구나. 이걸 어쩌나'  입이 바싹 타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딸은 내가 말할 여가도 없이 일방적으로 속사포를 쏴대고는 끊어버렸다. 딸은 즉시 전화를 받았다.  

  "얘, 내가 보이스 피싱을 당한 것 같애"

  "엄마, 지금 뭐라고 했어?"

  "보이스 피싱을 당한 것 같다고오~"

  "전후 사정을 차분히 이야기해 봐.

  라고 딸이 물었지만 이미 조금 당황한 상태라서 몇 분 전에 보낸 것들이 기억나지 않았다. 우선 주변의 시선이 부끄럽기도 했고, 어리석은 짓을 하여서 조용히 숨을 곳이 그리웠다. 딸은 계속 물었다.

  "문자로 주민증 사진 찍어보내라고 해서 보냈어"

  "내가 그런 문자 보내는 거 봤어? 또 뭐 보내줬어?" 

  딸은 한바탕 잔소리가 늘어졌다. 위로는 못할 망정 위급한 엄마의 마음을 이렇게 모르나 싶어서 딸의 말을 강제로 잘랐다.

  "야! 엄마가 일을 당했다고 하면 대처할 방안을 알려줘야지 무슨 말이 그렇게 길어!!" 

  몇 안 되는 승객이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안면몰수하고 큰소리로 딸을 제지하면서 방법을 알려달라고 했다. 

  "112로 전화해 봐. 나도 그것밖에 생각이 안 나" 


  112에서 경찰청으로 연결해줬다. 대각선으로 앉았던 여자 승객이 전화하는 나를 보면서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경찰청 직원과 통화 중인데, 그녀는 마스크와 안경 너머로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통화하지 말라고 손으로 엑스로 만들어서 흔들었다. 그녀의 진지한 행동에 혼선이 빚어져서 어찌할 바 모르게 만들었다. 전화를 하다가 말고 '경찰청 범죄신고'와 통화하는 것을 보여주어도 손으로 아니라고 하였다. 더 헷갈리면 되지 않으므로 나의 의지대로 경찰청과의 통화를 믿었다.


  "경찰청 사이버 팀의 000입니다.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해주세요"

  속이 답답했다. 생각이 나야 대답을 할 것인데 뭘 묻는다니

  "어플 깔았어요?"

  대답할 순간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무엇 하나도 떠오르지 않더니 '그래 뭔가 이상한 것이 어플이었지'

  "네, 깔았어요. 주민증 사진도 찍어 보냈어요"

  "비밀번호 알려 주었어요?"

  "아니요"

  환승할 버스정류장은 다 왔는데, 대각선으로 앞에 앉은 여인은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계속 저지하였다.


 정류장에 내렸더니 누군가가 전화를 했다. 범인의 번호와 비슷하여서 확인차 빨간색으로 밀었다. 범인은 아니었다. 경찰이 '수성대학교 앞' 정류장으로 곧 도착한다고 했으니 그들인 줄 알았다.  

  "정 혜님, 왕년에 함께 활동하던 동극(童劇) 단원인데요. 아까 버스 안에서 손으로 신호 보내던 친구가 정혜님 상황을 말해 주면서 저더러 사기단에게 속지 않도록 전화를 하라고 해서 대신 전화해요"

  그녀는 범죄단이 경찰과도 연결되어 통화하는 내용이 사기 집단으로 넘어간다면서 길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전화한 그녀에게 너의 신분을 밝혀라, 머리가 복잡해서 믿을 수 없다고 했더니, 그건 중요하지 않고 그들의 꾐에 넘어가므로 전화를 하지 말라고 했다. 전화상의 목소리는 짐작 가는 인물이 연상되었으나 경황이 없던 차라  

  "그럼 나더러 뭘 어떻게 하라는 말씀인지요?"

  "가까운 경찰서나 은행으로 들어가세요"

  그렇다면 백 번이라도 가지요. 


  몇 미터 거리에 대구은행으로 들어갔다. 청원경찰에게 보이스 피싱을 당한 것 같다고 하였더니 

  "에~ 또~ 그것이 보이스 피싱인데요~"

  그의 한 손을 잡고 웃으면서 

  "가르치려고 하지 마세요. 당황한 사람에게는 그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아요"

  "보이스 피싱의 수법을 알려드리려고요"

  피해당한 것이 없다는 안도감이 들기 시작하면서 침착을 되찾고 있었다. 펼치고 있던 손전화기에 낯선 번호가 재차 반짝였다. 전화받기가 은근히 두려웠다.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방황하며 청원경찰에게 전화기를 내밀며 받아달라고 들이밀었다. 


  "만촌 지구대 사이버 팀 000입니다. 아까 보이스 피싱 신고하셨지요?"

전화기에서 건강하고 굵직한 남자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사기꾼이 아니구나를 확신하는 사이 경찰차가 은행 앞에 서면서 경찰 두 명이 내렸다. 

  "비밀번호 알려줬어요?"

  "아니요!"

  젊은 경찰이 나의 손전화기를 건네받아서 '비행기 모드'로 만들었다. 만약을 위한 대비라면서 아까 물었던 것을 되풀이하였다.

  "지금의 정황으로는 당한 것 같지 않습니다. 만약을 모르는 비행기 모드를 유지하시고, 전화기는 초기화하셔야 됩니다"


  경찰차가 떠났다. 청원경찰도 은행으로 들어갔다. 서비스센터냐 통신사로 가보나, 그냥 딸이 기다리는 아파트로 가야 하나. 사위가 손전화기 잘 다루니까 저녁에 잠시 해달라고 해야겠다고 가지런히 정리를 하고 환승했다.

  "환승입니다"

  삼십 분도 안 되었다는 말이다. 웬수같은 손전화기를 펼쳐 들었다. 문자가 여러 개 와 있다.       

 

  시기꾼 이 녀석이 어느 나라 물건인지 모르겠으나 나처럼 더듬한 놈인가 보다. 이 사람아, 잘 가던 문자가 안 갈 땐 눈치를 채야지. 

  '엄마 왜 답장이 없어?'

  차 안에서 미워야 할 어리바리가 불쌍했다. 어떤 연유로 이런 사기를 치게 되었을까. 이 악업의 과보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일단 남을  속이려면 거짓말을 해야 한다. 한 번은 두 번이 되고, 점차 배가(倍加)되어서 거짓말하는 것이 악업 쌓는 일인지도 모르고 무의식적으로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악의 구렁텅이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스스로 만들고, 빠져서 허우적대며 뻘 속으로 깊숙이 처박힌다. 남 걱정해 줄 때가 아니다. 만약 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비밀번호를 가르쳐 주었을까.


  몸서리가 쳐졌다. 후동이가 자주 나의 주민번호를 이용하여 어떤 이벤트에 참가한다면서 인증번호를 보내라, 복사하거나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기를 요구했다. 기꺼이 해주던 나였기에 자연스럽게 이끌려가지 않았을까 싶다. 계좌에 돈이 많든 적든 나처럼 어이없이 당한다면 울화가 치밀어 오를 것이며, 몇 날 며칠 복합적인 이유로 머리를 들지 못할 것 같았다. 


  의심을 거의 하지 않는다. 미심쩍으면 짚고 넘어가야 하건만 대충 넘어가는 나다. 확인하지 않아서 낭패를 겪은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결심하기로는 '꼭 확인해야지' 해놓고 어느새 잊었다. 사회생활을 하지 않은 탓으로 돌리는 것은 변명이다. 부끄럽지만 각성시키고자 이런 사건이 생겼다고 사려되었다. 사고의 전환으로 기분을 쇄신하였다. 애국가의 '하느님이 보우(保佑:보호하고 도와주다)하사'

가 아니다. 하늘에 계신 님이 보호하고 도와주었다기보다 부처님이 보우하신 덕분이다. 


  지옥문을 두 손으로 밀기 직전이었다. 상황 상 딸이 콩 튀 듯한 심정으로 전화할 여건이긴 했다. 절묘한 찰나에 문을 열려고 잡았던 문고리에서 손을 떼며 나를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았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르페우스는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가 뱀에 물려 죽자 저승까지 내려갔다. 리라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러서 저승의 신들을 감동시켰다. 그 덕에 다시 지상으로 데려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그러나 지상의 빛을 보기 전까지 절대로 뒤 돌아보지 말라는 경고를 잊는 바람에 결국 아내를 데려오지 못했다. 그 슬픔에 잠겨 지내다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문득 신화가 번개처럼 스쳤다. 


  딸의 전화가 나를 살렸다. 현관을 들어서서 신발을 벗기도 전에 

  "엄마, 정말 미안해. 애들 때문에 화가 잔뜩 나있는데 보이스 피싱 소리를 들으니 나도 모르게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았어. 많이 놀랐지?"

  후동이는 후동이 대로 가슴을 졸였다고 전화를 주었다. 두 딸에게 웃어가며 의심이 되긴 했어도 물 흐르듯 흘러갔다면서 통화를 마쳤다. 공무원인 딸이 주민증 분실신고를 하자고 하였다. 즉시 실행에 옮겼다. 국제적으로 나의 사진과 생년월일이 헤엄쳐 다닐 것이 굉장히 염려되었다.


  4시 25분에 딸과 통화를 하기 위해 비행기 모드를 풀었다. 카톡을 확인하니 '임시폰'이라는 생경한 것이 눈길을 끌었다. 

  내친김에 문자까지 열어보니 잠깐 잊었던 보이스 피싱, 숨이 막혔다. 무지한 것인가, 끈질겨서 그러나. 코 앞에서 먹이를 놓쳐버렸으니 쉽사리 낚싯대를 거둘 수 없었을까.  


  12월 2일 오전 8시 50분에 동사무소 문을 열었다. 9시도 되지 않았는데 직원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내 딸은 9시에 사무실 문을 열거나 지각을 밥 먹듯 했다. 동 사무소 직원은 주민증 갱신비 5000원, 우편으로 받을 경우 3600원, 등기는 3800원이면 집에서 받을 수 있다고. 3~4주 후에 직접 찾기로 하고, 지문을 찍었다. 양 손 모두 지문이 잘 나오지 않는다며 가족상황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었다. 


  사위가 컴퓨터를 켜고 작업이 시작됐다. 아마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사용하는 기능이 몇 가지 아니었으므로. 그러나 간단하지 않았다. 서너 시간이 걸렸다. 전화기를 받아서 열어보니 글씨는 깨알만 하고, 그동안 즐겨 쓰던 어플은 다 사라져 버렸으며, 사진을 저장하는 앨범은 순서가 뒤죽박죽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속담처럼 소는 잃지 않았지만 사후(事後)가 더 문제였다. 사위가 내 집으로 오더니 컴퓨터마저도 초기화하고 돌아가는 것이다. 어이구~


  이 글을 쓰려고 문자를 훑어보니 낚싯대가 허술하기 짝이 없다. 두 딸과는 카톡으로 연락을 주고받는다.

폰 수리는 사위가 맡기고 찾아다 준다. 여러 말할 여지가 없다. 의심하지 않고, 확인하지 않는 고약한 나의 습관이 문제다. 지옥문 앞까지 갔다 오면서 평범한 사실이 진리라는 것을 배웠다. 



사진:  정  혜.


  동백꽃이 피는 12월이다. 딸의 아파트 주변에는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12월 첫 토요일인 오늘 울주 붓다의 길따라 선원에 다녀왔다. 선원에는 토종 동백꽃이 딱 두 송이가 피었다. 즐거운 분위기의 글이 아니어서 붉은 동백꽃을 보면서 다 잊어버리려고 한다. 




https://blog.naver.com/jsp081454/222586927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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