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 혜 Dec 11. 2021

자타일시성불도

  지난 10월 마지막 날. 경주 남산 한 자락을 도반들과 숨 가쁘게 오르내렸다. 왕복 3km도 기껏 되지 않는 산길을 벌 벌 기면서 다녔다. 1993년 남편이 50사단에서 참모로 근무할 때는 가볍게 다녀왔던 것 같은데. 사단장 부인을 모시고, 관음회장인 나와 불자 몇 명이 스님과 함께 했다. 불교미술 한 분야를 공부할 있는 좋은 기회여서 스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근래는 무릎이 시원찮아서 산길을 걸어 볼까 말까를 고민하던 중 단체 카톡방에 내 이름이 올라와 있으니 집에서 더 엎드려 있을 수 없었다.  


  28년 만의 답사다. 3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잊히지 않는 희끄무레한 파편 하나가 팔짱을 낀 채 웅크리고 시절 인연을 기다렸다. 넓적한 바위에 일곱 부처가 새겨진 마애불(磨崖佛). 칠 여래 마애불 만나는 행운을 기대하였지만 인연이 닿지 않았다. 


  마애불(磨崖佛)바위에 새긴 불상이며, 벼랑에 부처를 새겼다고 일명 '벼랑 부처'라고도 한다. 벼랑 부처는 커다란 암벽에 부처나 보살을 새긴 것을 일컫는다. 단순히 선을 그어서 부처를 새겼으면 '선각(線刻)', 부분적으로 돋을새김 한 것도 있고, 안으로 파 들어가면서 새긴 부조(浮彫, 형상이나 무늬 따위를 도드라지게 새김)도 있다. 우리나라는 7세기 전반부터 백제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거대한 마애불은 그 옛날에 어떻게 조성했을까 볼 적마다 의문이 생긴다. 흙을 바위 끝까지 쌓아놓고, 위에서부터 서서히 흙을 아래로 흘려보내며 조각을 했을까. 아니면 나뭇단을 쌓거나,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걸쳐놓고 선각이나 부조를 하였을까. 그도 아니면 줄을 걸어 앉을 수 있도록 하고 점차 길게 늘이면서 내려왔을까. 깊은 산중 절해고도 같은 곳에서 어떻게 무엇을 먹고살았을까.


   외국의 경우는 흙을 쌓아놓고 위에서부터 조각을 하며 아래로 내려왔다고 들었다. 중국의 남북조 위진 시대에는 대승불교가 나라의 건국이념으로 활용되면서 막강한 세력들이 동굴이나 절벽에 석불을 많이 조성하였다. 그때  불상을 조각하거나 불화를 그리는 스님이나 장인은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홀로 굴 속에서 진정 부처님을 흠앙(欽仰)하여서 고생을 자초했을까. 그들은 자타의(自他意)로 고향을 등지고 천리만리 머나먼 땅에 당도하였다. 산도 물도 낯선 곳, 외로움에 사무쳐서, 두려움으로 몸부림치며 고독이 빚어낸 걸작품이라고 미루어 짐작한다.


 ~ 원공법계제중생  자타일시성불도(願共法界諸衆生 自他一時成佛道).

    

  대승불교도 시절에 즐겨 독송하던 예불문의 끝 구절이다. 1984년 대승불교에 귀의하여 환희에 가득 차서 신나게 읊조리던 부분이다. 그 뜻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면서 원하옵나니(願共), 법계<法界: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 인간, 천상, 육도(六途)>에 사는 모든 중생(諸衆生) 너도 나도(自他), 한 날 한 시(一時), 부처의 길(成佛道)로 가자. 얼마나 고무적이며 멋진 문장인가.


  너도 나도 일시에 부처가 되어서 험난한 이 세상을 벗어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던 때가 있었다. 참으로 야속하게도 自他一時成佛道 할 수 없는 실연의 아픔을 끌어안아야만 했다. 한 날 한 시에 도를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은 30여 년이 지나도록 풀 수 없었다. 미심쩍어서 의심이 들었던 붓다의 가르침이었다.



출발점: 삼능은 '신라 제8대 아달라왕, 제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 능이며, 모두 박 씨이다.'

<출처 : 한겨레:온> 의 글을 참고하였다.


삼릉계곡의 선각육존불이다. 

*위의 사진에는 중앙의 부처를 향하여 두 보살이 무릎을 꿇고 꽃을 담은 쟁반을 공양 올리려 하고 있다.

*오른쪽 바위에는 <'두 보살이 부처를 향하여 몸을 돌린 채 서 있다.'


*탁본을 떠서 정확히 알아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했다.



상선암


  상선암의 아미타 삼존불.

*사진 왼쪽부터 대세지보살, 중앙 아미타불, 오른쪽 관세음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은 쓰고 있는 보관의 가운데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있는 것이 특징. 대세지보살은 정병이 돋을새김 된 보관을 많이 쓴다. 

*중앙의 부처의 손은 아미타불의 구품인이 아니고, 석가모니불의 항마촉지인 비슷하다. 이 불상만으로는 아미타불인지 석가모니불인지 정확하지 않다. 아미타불은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 또는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이 좌우 협시한다. 그러므로  상선암의 주불은 좌우 협시 보살이 아미타불임을 알려준다.

 

*불상 뒤 후불탱화에서도 오른쪽 관세음보살의 화관에는 아미타불이 있고, 대세지보살은 정병이 돋음 새김 되어있다. 대세지보살 녹색 두광 위의 파란 민머리 스님이 아난다 존자, 관세음보살 위 하얀 눈썹의 스님은 마하까싸빠 존자이다. 아난과 가섭 존자 좌우의 스님들은 부처님의 10대 제자이다.




*아미타 삼존불 오른쪽 탱화는 칠성 여래 삼존불이다. 

*중앙 주불(主佛)이 칠성 여래며 왼손에 법륜을 들었다. 녹색 두광의 우측 빨간 동그라미 보관 쓴 일광(日光;태양) 보살과 좌측 달을 상징하는 월광보살은 좌우 협시보살이다. 

*주불 좌측 반원에 세 부처와 우측의 네 부처는 일곱 별(七星)을 부처로 의인화하여 변신시켰다. 주불의 두광 좌우에는 선녀가 공양을 올리려고 공양구를 오른손에 들고 왼손으로 받치고 있으며, 다른 선녀는 악기를 연주하는 듯하다. 또 오른편 세 선녀 아래 민머리가 위로 우뚞 솟고, 수염이 하얀 남극의 수성노인이다.


*일, 월광 협시보살 좌우는 사모관대(비단 모자에 관복을 입고 허리띠에 목화를 신는다)를 하고 손에 홀을 들은 사람은 큰 별 28수(宿)를 의인화한 관속들이다. 북극성과 북두칠성과 주변의 별들을 의인화한 이 탱화는 도교와 유교가 혼재되었다.

 

**불교를 가르치는 그림에서 불교는 도교와 유교에게 옷을 빌려준 채 그저 껍데기만 있는 현장이다.



< "법보신문이 연재한 2004.3.9일 

<한국불교신앙의 뿌리를 찾아서 11- 칠성신앙>"

중국의 대표적 토착신이 칠성이다. 칠성은 북쪽 하늘에 밝게 빛나는 별 중에서 가장 강력한 빛을 발한다는 북두칠성을 말한다. 고대부터 별이 인간의 운명과 함께 한다는 사고가 불교의 신앙관에 흡수된 것이다.

  

  북두칠성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인도에서도 있었지만, 칠성신앙은 별이 인간의 길흉화복과 수명을 지배한다는 도교의 믿음에서 유래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부터 들어왔지만 성행하지 않다가 조선말에 유행했으며 유일하게 칠성각이라는 독립 전각이 생길 정도로 발전했다. 칠성은 주로 비를 내려 풍년을 이루게 하고, 수명을 연장해주며, 재물을 준다는 믿음의 대상이다. 현세 이익적 기복 신앙의 전형이다.


  칠성신앙은 중국 고유의 민간신앙이 불교에 흡수된 것이다. 중국에서 칠성은 수명장수 신이다. 이는 도교 신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도교는 북극성이나 북두칠성뿐만 아니라 뭇 별자리가 인간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믿음이 강했다. 도교에서는 북극성을 모든 별을 통솔하는 자미 대제(紫微大帝)라고 불렀다.


칠성신앙은 불교가 중국에 유입되면서 곧바로 유행했다. 당나라의 승려 일행(一行)은 불교가 도교와 마찰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약사칠 불경〉에 칠성 호마 법을 만들어 칠성을 수용하였다.>


**이 글을 더 정확하게 쓰려고 검색하다 위의 내용을 보며 평소 나의 생각이 옳았음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상선암 아미타 삼존불의 왼편 탱화:

*왼, 산신도(山神圖)에는 수염이 하얀 산신 옆에 꼭 호랑이가 엎드려 있다. 호랑이가 곧 산신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산이 많아서 산신기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산신 뒤 배경은 십장생 <민간신앙 및 도교에서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열 가지의 사물[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그려져 있어서 불로장생을 기원한다.


*오른쪽은 신중탱<神衆幀:부처의 정법을 수호하며 후에 경을 설하는 법사가 있다면, 그 법사와 경까지도 보호하겠다고 서원한 제선신(諸善伸>을 한 화면에 모아 그린 그림}. <국립중앙박물관> 



*오른쪽 그림은 지장탱.

*중앙 녹색 두광의 지장보살은 지옥중생을 남김없이 구제할 때까지 부처가 되기를 연기하고 있는 보살이다. 지장보살이 육환장(六環杖)을 왼손에 잡고, 오른손에는 여의주를 들고 있다. 우측의 파란 민머리에 합장한 스님은 도명존자, 좌측 무독귀왕이 지장보살의 좌우 협시보살이다. 손에 홀을 들고 있는 <명부시왕((冥府十王) 또는 시왕(十王)은 대승불교에서, 지옥에서 죽은 자를 심판한다는 열 명의 왕을 일컫는다. 이는 중국의 도교와 한국의 민속 신앙에도 영향을 미쳤다. 다섯 번째인 염라대왕은 시왕 중의 우두머리로 여겨지기도 한다.> (위키백과)


*홍녹(紅綠)의 비단옷은(후불탱화나 다양한 탱화는 고려불화 기법으로 그리는 것이 특색이다.) 조복(朝服)이며, 손에 홀을 들고 관모를 쓰고 있다. 이는 유교의 영향이다. 그림은 고려불화 식으로 그리고, 도교와 유교가 혼재된 후불탱화가 우리나라에는 어느 절에나 불교인 것처럼 걸려있고 우러러 받든다. 



삼릉계곡(냉골).

<삼릉계곡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항마촉지인을 맺고 연화좌(蓮華坐)에 결가부좌 화강암으로 만든 좌상이다. 부처의 머리 부분과 몸을 따로 만들어서 결합하였다. 

얼굴의 파손이 심해서 2007~8년 국립경주 문화재 연수에서 보수·정비하여 뺨과 코, 입 등 대부분 복원하였다고. 부처님의 몸이 당당하면서 안정감 있다. 가사는 왼쪽 어깨만 두르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서 '편단 우견'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왼손은 항마촉지인의 변형이다. 상선암 아미타 삼존불 역시 그러하다. 


<"석조여래좌상 뒤쪽 30여 미터 바위 절벽에 얼굴 부분만 선각한 마애불상이다. 부드러운 선으로 새겨져 원만한 상이다. 바위 면에 비하여 불상이 많이 커서 본래부터 완전한 모습은 아니었던 듯하다. ">



선방곡으로 넘어가면서 발견한 철 모르고 피어난 철쭉.




<7세기 초기 작품으로 추정하니 거의 1400여 년 된 부처님들이시다. 그냥 비바람을 맞으며 서 계시다가 1988년 보호각을 설치하였다.>


*중앙 시무외 여원인을 한 아미타불, 사진 오른쪽은 관세음보살, 왼쪽은 대세지보살이다.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을 한 아미타 불상: 시무외인은 오른손바닥이 보이도록 위로 들었으며 두려워하지 말라, 여원인은 왼손바닥을 보이며 아래로 향하게 하여서 모든 소원을 받아들인다는 의미.

중생의 뜻하는 바가 이루어지도록 도와줄 터이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의 수인(手印)이라고 생각한다.


*단단하기 그지없는 화강암을 떡 주무르듯 단순하게 다듬었는 것이 놀랍고, 매우 인상적이다. 옷 주름이 물 흐르는 것처럼 유려하여 몸매가 원만해 보인다. 표정은 어린아이 같이 천진난만하여서 친숙한 느낌이 든다.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이 밭아서 불상의 뒷면을 정확하게 살펴보지 못한 것이 무척 아쉬운 점이다. 

*대부분의 아미타불은 통견, 한쪽 어깨를 드러내지 않는다.



*삼존불을 정면으로 쳐다보면 왼쪽은 대세지보살이다. 관세음보살상이나 아미타불상에는 좌대(臺)가 없으나 대세지보살은 연잎이 아래로 된 밑돌을 복련석(覆蓮, 꽃부리가 아래로 향한 것처럼 그린 연꽃 모양. 또는 그런 무늬), 위로 향한 앙련석(仰蓮石, 연잎이 위로 향함.)에 서 있다.

*목에서부터 발목까지 구슬과 꽃송이로 엮은 목걸이를 드리워서 화려한 치장을 하였다. 또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의 조각보다 가장 섬세하며, 고개를 약간 기울여 단아하면서도 여성스럽다. 뭉툭하고 투박해 보이는 얼굴은 자애롭게 느껴진다.

*왼손에는 불경을 쥔 채 어깨 가까이 올렸고, 오른손은 목걸이 살며시 쥔 듯하다.

*보살의 두광에는 오방불(五方佛)이 돋을새김 되어 있고,  오방불 모두 두광이 선으로 새겨져 있다.






*아래 사진은 관세음보살상이다.

*처음에는 어떤 보살상인지 알 수 없었다. 자세히 보니 왼손에 정병을 들었고, 오른손은 버들가지나 연꽃 가지를 들은 것은 것으로 짐작한다.(관세음보살은 정병과 버들가지나 연꽃이 핀 줄기를 지물로 든다.)

*가사의 주름선만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얼굴의 눈은 왕방울처럼 튀어나왔고, 볼 살은 통통하여서 투박스러우나 정겨운 느낌이 든다. 

*세 불보살의 코가 떨어져 나간 것은 아들을 낳기 위한 비방으로 생긴 생채기가 아닐까 짐작해보았다.

                         사진: 정 혜.



  신라인들은 부처 불(佛)자도 모르면서 '왕생극락' 하기를 염원하였다. 일념으로 '나무아미타불'을 한 번만이라도 지성으로 염불 하면 극락정토에 태어난다고 원효 스님은 무애박을 두드리며 알렸다. 스님은 자타 일시 성불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셨던 것 같다. 그 당시에도 대승불교 서적을 두루 섭렵한 학승으로 배부르고 등 따뜻한 귀족과 왕족층을 외면하고 하층민 교화에 힘썼다. 


  아미타불의 시무외여원인, 중생의 뜻하는 바가 이루어지도록 도와줄 터이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의 수인(手印)처럼 다 이루어졌다면 이런 불상이 조성되었을까. 그랬다면 스님이 하층민에게 일심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염불 하라고 권했을까. 평민들이나 귀족층의 소원 또한 다 만사형통하였을까. 뜻대로 모두 해결되었다면 마애불상이나 석불이 있을 필요가 있었을까. 


  염원이 가득 담긴 마애불상을 보면서 자타일시성불도는 이루어질 수 없는 나만의 사랑이었다. 사람은 각양각색이다. 그 삶 또한 천차만별이다. 어떤 사람은 생각만 해도 뜻한 바가 거짓말처럼 성사된다고 하였다

. 또 죽어라 노력하여도 지지부진이 있는가 하면, 노력한 만큼 성과를 거두는 사람도 보았다. 반면 일한 만큼 대가를 얻지 못하여 입에 풀칠도 어려웠다. 이러한데도 자타일시성불도가 어울리는 말일까. 이상향이었다. 


  이상향은 이상향으로 알아야 한다. 석가모니 붓다는 오로지 고(苦)와 고멸(苦滅)을 말씀하셨을 뿐이다. 



 


대문 사진: 거북바위 곁에서 바라본 배리 평야. 



https://blog.naver.com/jsp081454/222593086433

작가의 이전글 보이스 피싱의 전형적인 수법이네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