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즐겨 마시기 시작하면서 바뀐 게 있다. 수백 년 전에 만들어진 찻잔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진다는 점이다. 자신의 기량을 모두 쏟아부은 최고의 찻잔을 만들기 위해 연구하고 노력한 도공과 그 찻잔을 애지중지하며 감상하고 사용한 사람을 상상해 본다. 몇 천년 전 일이라면 너무나 아득해서 그냥 역사의 기록으로만 다가오지만, 4~5백 년 전 일이라면 조금 상상력을 발휘해 보면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여름에 본 전시 중 가장 가슴을 뛰게 만든 전시는 단연코 <일본미술, 네 가지 시선>이었다. 16세기 일본에서 최고의 다도 선생님이었던 센노 리큐가 도공 조지로와 만들었다는 찻잔이 전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전시는 꾸밈의 열정, 절제의 추구, 찰나의 감동, 삶의 유희의 네 섹션으로 구성하여, 일본의 도자기, 금박을 입힌 옻칠공예품, 옷, 서화 등 일본의 문화와 정신을 알려주는 다양한 미술품을 보여준다. 박물관에 전시된 옛 유물은 만든 방법이나 쓰임새 등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황양식에 관해 학습하려는 의도로 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전시는 그런 정보에 앞서 미술품 각각의 아름다움과 정서를 느껴보라고 권유한다.
16세기는 일본으로 유입된 조선의 막사발인 이도다완이 최고의 찻잔으로 칭송받으며 인기를 누린 시기로 일본의 무사는 교양으로 다도를 익히고 다도에 필요한 기물을 모으는 데 열을 올렸다. 소박한 와비사비의 정신을 강조해서 좁은 다실에 허리를 숙여야만 출입이 가능한 낮은 문을 만들어 다회에 초대된 사람들에게 겸손함을 느껴보도록 했던 리큐는 그 시대 최고의 심미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리큐가 도공과 같이 만든 찻잔은 어떻게 생겼을까? <일본 미술, 네 가지 시선>에는 검은색인 ‘구로라쿠 찻잔’이 있었다. 이도다완은 물레를 돌려 만들었는데, 라쿠 찻잔은 물레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형태를 잡았기 때문에 얇게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찻잔 위쪽이 아래쪽에 비해 넓게 퍼진 이도다완과 다르게, 라쿠 찻잔은 찻잔 위와 아래의 넓이가 같은 원통형이다. 대칭되지 않는 형태와 구불구불한 선에서 손맛이 느껴졌다.
차의 역사를 다루는 책이라면 센노 리큐는 빠지지 않고 꼭 소개되는 일본 다도의 달인이다. 중국에 육우가 있다면 일본에는 센노 리큐가 있다. 역사적인 인물인 리큐가 살아있는 사람으로 다가온 것은 <리큐에게 물어라>라는 역사 소설을 읽은 후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다도 선생으로 권력과 부를 거머쥐었던 그는 도요토미와 갈등을 빚어 할복하게 된다. 소설에는 리큐가 젊은 시절에 조선에서 납치당해 일본에 오게 된 양반집 규수를 보고 가슴앓이를 하고 그녀의 유품인 녹유합을 평생 소중히 간직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납치당한 그녀를 위해 닭백숙 등 조선의 음식을 해 주었다.
도자기 전시를 보면 역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일본미술, 네 가지 시선>을 보면서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엇갈려 버린 조선과 일본의 도자사를 자연히 떠올리게 된다. 이 전시에는 수출용으로 유명했던 17세기의 화려한 이마리 도자기와 조정이나 막부에 바치는 용도로 생산한 나베시마 자기도 있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의 도공들이 일본의 도자기 산업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일본미술품을 보며 아름다움과 정서만 느끼기에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역사의 그림자가 너무 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