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리뷰] 창덕궁의 근사謹寫한 벽화

by 봄봄



창덕궁의 근사謹寫한 벽화

국립고궁박물관, 25.08.14~10.12




한국미술사 책에 실린 수묵화나 수묵채색화 도판은 칙칙하고 밋밋한 색으로 안해 이미지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무리 최고라고 칭송받는 화가라도 실제로 작품을 보기 전까지는 감동을 느낄 수가 없다. 국립고궁박물관의 <창덕궁의 근사한 벽화>를 꼭 봐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바로 김규진의 <총석정절경도> 때문이다. 미술사 책에서 본 이 그림의 도판 역시 칙칙했지만, 장대하고 위엄이 느껴졌고 현대적이고 세련된 구도가 돋보였다.



김규진(1868~1933)은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에 활동한 서화가이자 사진가로, 대나무 그림으로 이름을 날렸다. 몇 년 전에 이건희컬렉션 전시에서 김규진의 대나무를 처음 보았다. 자연의 생명력이 느껴지는 아주 건강한 샛초록의 잎이 달려 있었다. 그때까지 내가 실제로 본 대나무는 다 병든 대나무였던가 싶을 정도로, 생기 넘치고 튼튼한 대나무였다.



이 전시에서는 1920년에 창덕궁에 그려진 여섯 점의 벽화를 보여준다. 창덕궁은 조선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과 순정효황후가 생활하던 곳이었다. 그런데 1917년에 난 화재로 소실되었고 3년간 공사를 해서 재건한 후, 1920년에는 그 당시 최고의 회가 여섯 명이 그린 여섯 점의 대형 벽화로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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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전시실에는 왕의 집무실인 희정당의 벽화 두 점이 있다. 모두 김규진의 작품이다. 바로 여기에 <총석정절경도>가 있었다. 가로가 9미터에 가까운 대형 그림으로 김규진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서 스케치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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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석정 그림은 대나무 그림과 너무 달랐다. 초록 잎이 만발한 대나무는 화려하고 장식적인 느낌이 강하다면, <총석정절경도>는 망망대해에서 주상절리를 바라보며 느끼는 인생의 무상함과 장엄한 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인간이 떠오른다. 그림은 시종일관 바다에서 바라본 시점을 유지하고 있고 원근법을 사용해서, 우리에게 익숙한 다시점의 동양화가 아니라 하나의 시점으로 통일된 서양화를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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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석정절경도>는 마치 사진기로 포착한 것처럼 그림 왼쪽에는 갈매기가 날고 돛단배가 떠다니는 망망대해를 펼쳐놓고 오른쪽의 주상절리는 중간에서 잘라버려서 구도가 멋스럽고 현대적이다. 김규진은 그 당시 최신 기술이었던 사진 기술을 배워 약 10년간 천연당사진관을 운영했었는데, 사진을 찍으면서 그림에 활용가능한 다양한 구도를 연구한 것은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희정당에는 김규진의 또 다른 금강산 그림인 <금강산만물초승경도>가 있었다. 신선이 나올 듯 구름이 낀 가을 외금강의 일만 이천 봉을 그린, 가로 9미터에 가까운 대형 작품이다. <총석정절경도>와 비교해 보면 이 그림은 전통적인 동양화의 분위기가 난다.



두 번째 전시실에서는 순종과 순정효황후의 거처인 대조전을 장식했던 벽화 두 점을 보여준다. <봉황도>오일영(1890~1960)과 이용우(1902~1952)의 합작품으로 가문의 번영과 자손의 번창을 나타낸다. 김은호(1892~1979)의 <백학도>는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그림으로 학 열여섯 마리가 등장한다. 미술사 책에 실린 이 작품의 도판도 조악했는데, 실물을 보니 색감이 하나하나 살아있고 보름달이 떠오른 밤에 바다를 배경으로 학이 우아하게 날아가는 이미지는 기품이 있고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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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전시실에는 부부의 서재 겸 휴식처였던 경훈각의 벽화 두 점이 있다. 아침해가 떠오른 신선 세계를 표현한 노수현(1899~1978)의 <조일선관도>와 누가 더 오래 살았는지 과장과 허풍을 섞어 대화하는 세 명의 신선을 표현한 이상범(1897~1972)의 <삼선관파도>로, 두 점 모두 장식성이 강한 산수화이다.



여섯 점의 벽화를 다 본 후, 다시 한번 첫 번째 전시실로 돌아가 <총석정절경도>를 오랜 시간동안 자세히 보았다. 고루하게 느껴지던 수묵채색화가 내 마음을 흔든다. 그리고 금강산이 궁금해진다. 완만한 내금강과 험악한 외금강과 바다를 접한 해금강. 조선시대 서화가들이 감탄했고 김환기도 스케치 여행을 갔었던 금강산을 내 버킷리스트에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