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나이 지긋한 미술가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관람객에게 감동을 주는 미술품이 좋은 작품이라고 말이다. 이 말을 듣고 머리가 멍 해졌다. 아주 당연한 말인데, 한동안 잊고 있었다. 작품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이 전시를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작가가 누구이고 작업은 어떤지 우선 찾아본 후에 전시를 볼지 결정했기 때문이다. 전시장에서 작품을 보는 것은 마치 사전 정보를 재확인하는 절차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가슴으로 느끼기보다는 머리로 작품을 이해하고 기억하려고 애썼다.
한 번쯤은 사전 정보 없이 낯선 작품을 보자마자 감동이 밀려오고 전율이 돋는 그런 순간을 경험해 보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한 며칠 후, 약속시간까지 애매하게 시간이 남아서 별 기대 없이 들어간 국제갤러리에서 바로 그런 경험을 했다. 루이즈 부르주아의 개인전이 진행 중이었다. 물론 루이즈 부르주아는 널리 알려진 유명한 작가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거미 조각 이외에는 작품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루이즈 부르주아(1911~2010)의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가 생애 후반 20여 년간 작업한 조각과 드로잉을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파리에서 미국의 미술사가를 만나 결혼하고 뉴욕으로 왔다. 평생 작업을 했지만 처음에는 미술계에서 진지하게 작품을 봐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에 걸쳐 일어난 페미니즘 운동과 맞물려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국제갤러리의 K3 전시장에 들어선 순간 전시장 안쪽 천장에 매달린 알루미늄 조각에 정신을 빼앗겼다. 2007년에서 2009년에 걸쳐 제작한 <The Couple>이라는 작품이다. 입구에 가까운 자리에 멈추어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가까이 다가가서 작품을 따라 360도를 돌면서 천천히 살펴보았다.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은 어떤 각도에서 봐도 틈이 없다. 뱀 같이 굵고 긴 끈은 둘의 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두 사람을 겹겹으로 칭칭 감싸고 마침내 두 사람의 발 사이로 사라진다. 어떤 충격과 힘도 둘을 떼어 놓지 못할 것 같다.
사람의 손이, 살아있는 사람의 손도 아니고 대리석으로 만든 손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기도 한다. <Untitled (No.5)>는 1998년에 만들어진 분홍색 대리석 조각이다. 루이즈 부르주아의 두 손과 조수였던 제리 고로보이의 두 손이 서로의 팔목을 잡은 채 연결되어 있다. <The Couple>이 리비도를 진하게 풍긴다면 이 대리석 조각에서는 두 사람의 연대와 서로에 대한 강한 믿음이 느껴진다. 한참 보고 있으니 눈물도 조금 나온다. 전시장 벽면 맨 위의 빨간색 손 드로잉 연작을 보면 두 손이 가까워지거나 멀어지거나 하는데 이 또한 두 사람의 관계를 형상화한 것이다.
루이즈 부르주아는 엄마로서의 삶과 모성애가 느껴지는 거미 조각으로 유명하다. 이번 전시에도 벽면 밑부분의 빨간색 드로잉은 아이와 엄마, 가정 등 엄마의 삶을 나타내는 그림이 많다. 강렬한 빨간 드로잉을 보고 있으면 소름이 돋는다. 자신의 모든 것을 가족에게 다 내어 주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엄마들의 삶이 겹쳐진다.
한옥 전시장에서는 커피 필터에 그린 드로잉을 전시 중이다. K3 전시장의 강렬한 작품을 먼저 보고 나면, 이곳에 전시된 드로잉은 밋밋하게만 보일 뿐이다.
이번 전시에서 루이즈 부르주아의 조각을 보는 순간, 훅 불어오는 바람 같기도 하고 무거운 돌덩이 같기도 한 무언가가 내 마음속으로 쓱 들어왔다. 이것이 내가 한동안 잊고 있었던 ‘감동’의 실체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