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 아시안 아트 뮤지엄은 쇼핑센터 한 층을 미술관으로 쓰고 있다. 후쿠오카의 교통과 쇼핑의 중심지는 텐진과 하카타이다. 두 지역 중간에 위치한 나카스가와바타역에는 리버레인이라는 쇼핑센터가 있는데, 바로 이 건물의 7층에 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다.
리버레인은 디자이너 가구와 조명, 생활소품 위주의 매장이라 의류와 잡화, 식료품 중심의 쇼핑센터에 비해서는 붐비지 않는다. 주말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평일 오후에는 한산했다.
미술관이 있는 층은 더 한산하다. 조금 촌스러워서 오히려 아늑해 보이는 카페와 미술서적 이외에는 딱히 눈에 띄는 제품이 없는 기념품샵이 조그마하게 있다. 그 외 넓은 공간의 대부분은 세련된 디자인의 테이블과 의자가 널찍널찍하게 놓여있어서 누구나 미술 관련 책을 볼 수 있다. 유리벽을 통해서는 높은 건물이 별로 없는 도시의 경관이 넓은 하늘 아래 시원하게 펼쳐진다.
<Breaking the Conventional: New Self-Portraits>는 후쿠오카 아시안 아트 뮤지엄의 소장품을 보여주는 전시이다. 1999년에 개관한 이 미술관은 아시아의 근현대미술품을 5천7백여 점 소장하고 있다. 전시는 작가별로 공간을 할당해 작가를 설명하고 작품 몇 점을 보여주는 구성으로, 관람객의 교육에 충실한 전시 기획이었다.
전시에 참여한 열한 명의 작가들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떠오른 작가들이다. 이 시기에 일본은 급속한 경기성장에 이어 버블 경제의 붕괴를 경험한 반면,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은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성장을 이뤄가고 있었다. 따라서 급변하는 사회를 반영한 작품들이 대거 등장했다. 전시 제목인 ‘새로운 초상화(New Self-Portraits)’는 서구 중심의 가치에서 벗어나서 각 나라 고유의 문화와 역사와 변화하는 현실을 반영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시도를 나타낸다.
나에게는 참여작가의 반은 익숙한 이름이었고, 나머지는 처음 접하는 작가들이었다. 여성주의 미술로 이름을 떨친 우리나라의 윤석남, 중국의 정치적 팝으로 유명한 팡리준(Fang Lijin), 중국의 문명을 재해석하는 쉬빙(Xu Bing), 비디오아트로 유명한 중국의 장페이리(Zhang Peili), 인도네시아의 급변하는 사회를 익살스럽게 포착하는 헤리 도노(Heri Dono)는 여러 전시에서 본 적이 있었다.
전시 포스터의 주인공인 한티팜(Hanh Thi Pham)은 베트남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사진작가인데, 이민자이자 동성애자인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작업이 인상적이었다. 이외에도 필리핀의 로베르토 펠레오(Roberto Feleo), 말레이시아의 웡호이청(Wong Hoy Cheong), 싱가포르의 탕다우(Tang Da Wu), 태국의 타완 두차니(Thawan Duchanee), 인도의 나브조트(Navjot), 라지쿠마르(Rajkumar), 샨티바이(Shantibai), 가슬람(Gaslam)은 제국주의 열강에게 침략당한 역사, 전통과 종교에 대한 새로운 해석, 급변하는 가치와 현실을 반영한 회화, 설치, 비디오 작품을 통해 전혀 알지 못했던 각 나라의 역사와 문화의 단면을 얘기해 준다.
아시아 출신 작가들의 작품만 보여주는 이 전시를 통해 역설적으로 내가 여전히 서구 중심의 미술에만 익숙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000년대 중후반에 반짝 일어났던 아시아 미술의 인기와 미술시장에서의 약진은 재생되지 않고, 이제는 각자도생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서구 대형 갤러리의 진출과 미술관 프랜차이즈가 늘어나는 아시아에서 정작 아시아 각 국가의 미술은 성장의 기회를 포착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착잡한 생각 속에서 쉬빙의 관객참여형 작업으로 기분전환을 해본다. 일본인 성을 영어로 넣으면 전체 구조는 한자처럼 보이는 특이한 문양의 영어 캘리그래피가 나온다. 2000개의 일본인 성이 입력되어 있는데, 입력되어 있지 않은 성이라면 "You are special" 이 나온다고 한다. 일본 가수이자 배우인 후쿠야마 마사하루가 떠올라서 후쿠야마(Fukuyama)를 넣어보았다. 인감도장을 만들어도 될 것 같은 독특한 문양이 튀어나온다.
입력되지 않은 성을 넣으면 어떻게 될까 호기심이 생겨서, 우리나라의 가장 흔한 성인 김, 이, 박을 넣어보니 한자처럼 생겼지만 진짜 한자는 아닌, 특이한 문양이 나온다. 자세히 살펴보니 글자가 보인다.
"You are special."
* 참고자료: 후쿠오카 아시안 아트 뮤지엄 웹사이트
https://faam.city.fukuoka.lg.jp/en/
* 후쿠오카 아시안 아트 뮤지엄은 25.12.1~26.3.31까지 전시장 공사로 문을 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