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리뷰] 리움미술관, 이불 전시

by 봄봄

이불: 1998년 이후

리움미술관, 2025.9.4~2026.1.4




이불 작가하면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낙태>라는 영상이다. 벌거벗은 몸으로 거꾸로 공중에 매달린 작가는 낙태라는, 끔찍하고 잔인하지만 낙태를 경험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마지막 선택지였을 행위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강렬하게 전달한다. 나는 영상으로 이 작품을 만났는데. 이 영상은 사실 작가가 1989년 동숭아트센터에서 진행했던 퍼포먼스를 찍은 것이다. 그 시대에 이런 강렬하고 파격적인 예술작품을 발표한 현대미술가와 이를 수용하는 관람객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리움의 보도자료에는 1964년생 이불 작가에 대한 짧고 함축적인 설명이 나온다.


이불은 1980년대 후반 한국의 사회정치적 맥락과 맞물린 급진적 작업을 선보이며 등장한 이래 지금까지, 신체와 사회, 인간과 기술, 자연과 문명의 관계와 이를 둘러싼 권력의 문제를 폭넓게 탐구하며 동시대 미술의 주요 작가로 자리매김해 왔다. 1990년대 후반 주요 미술관 전시와 비엔날레를 통해 〈사이보그〉, 〈아나그램〉, 노래방 연작 등을 발표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고, 2005년부터는 근대의 유산과 유토피아적 비전을 탐구하는 건축적 설치 연작 〈몽그랑레시(Mon grand récit)〉를 전개하며 작품 세계를 확장했다. 2010년대부터는 평면 작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며 새로운 형식적, 재료적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이불:1998년 이후> 전시전경



리움의 전시는 <낙태> 퍼포먼스로부터 10년이 지난 1998년부터 지금까지의 작업을 보여준다. 조각과 설치와 회화와 드로잉으로 이루어진 전시에서는 크리스털과 아크릴 구슬과 자개가 화려하게 반짝이고, 다양한 각도로 설치된 거울은 현기증이 날 만큼 복잡하고 요란한 이미지를 생성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튀어나온 듯한 사이보그가 천장에 매달려 있다. 반짝이는 거울로 된 바닥은 첫눈에는 예쁘지만, 자세히 보면 밟으면 바로 깨질 것 같이 약하고 조악한 느낌이 난다. 게다가 거울로 만든 바닥을 받치고 있는 것은 일회용 플라스틱 컵이다. 리움 블랙박스에 들어가면 만나는 <태양의 도시 II>이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한눈에 소화하기 어려운 작품들이 한 공간에 모여 위험하지만 매혹적인 에너지를 뿜어댄다. 이불의 작품은 분단된 한반도와 민주화 운동의 계기가 된 어두운 한국사를 반영하고, 기술의 진보와 유토피아의 추구에 이어 기술의 실패로 인한 사고와 디스토피아를 넘나 든다. 한마디로 우리 삶과 관련된 모든 면을 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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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1998년 이후> 전시전경



그런데 화려함과 들뜬 기운이 음울함과 어두움을 확실하게 제압한다. 거울로 만들어진 구조물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선채 몇십 분을 기다리면서 전시장을 둘러보면, 색색으로 반짝이는 전구와 불빛에 반사되는 구슬과 층고가 높은 한쪽 벽면을 꽉 채운 드로잉과 가로로 넓은 다른 한쪽 벽면에 가득한 화려한 색의 회화가 파티가 한창이라고 외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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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1998년 이후> 전시전경



기다리는 동안 고조된 기대를 품고 구조물 안으로 들어가면, 거울과 조명이 촘촘히 붙어있는 벽과 한 명이 겨우 걸을 수 있는 좁은 미로를 따라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며 반사적으로 사진 찍기에 몰두하게 된다. 수많은 내가 있다. 조각난 내 이미지가 옆에도 위에도 끝없이 펼쳐진다. 초록색 전구가 끊임없이 증식하는 환상적인 공간에서는 현기증이 나서 갑자기 도망치고 싶어진다. 하지만 복잡한 미로에서 출구를 찾기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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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1998년 이후> 전시전경



그렇게 한바탕 정신없이 거울과 놀다가 나오면 여전히 파티는 진행 중이다. 그런데 살짝 불안하다.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게 지금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약함과 강함, 고급스러움과 조악함, 현기증이 날 만큼 밝은 빛과 심연 같은 어둠이 마구 뒤섞여 있어 흥분되는 세상. 그 무질서함에 어느새 익숙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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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1998년 이후> 전시전경



전시장에서 가장 안정감 있는 작품은 <티탄(Titan)>이라는 스테인리스 조각이었다. 요란하게 존재감을 과시하지만 불안해 보이는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티탄은 지하에서 1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의 한쪽 구석에 단단하게 자리 잡고 서 있었다. 사슴뿔과 발굽을 가진 티탄은 작지만 야무져 보인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거대한 티탄이 아니다. 정말 작은 사슴 발굽 위에 보철장치로 길게 늘인 얇은 다리와 작은 엉덩이를 지나 몸통과 머리가 이어진다. 몸통과 머리에는 비쭉 비쭉 나온 철골이 덮여 있어서 아무도 티탄을 만질 수 없을 것 같다. 티탄은 이렇게 자신을 방어한다. 어떤 미래가 올지 상상하기도 힘든 세상에서, 우리는 이 작은 티탄 정도의 존재감으로 살아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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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탄>,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