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의 수도사와 감각의 방랑자
헤르만 헤세가 54세에 출간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서로 다른 두 인간 유형을 통해
삶을 사유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나르치스라는 이름은 그리스 신화의
나르키소스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자기 성찰을 통해 자신을 단련하는
이성적인 수도사이자 학자다.
사유와 분석, 금욕과 절제를 삶의 중심에 두며
이상과 질서를 향해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인물이다.
반면 골드문트라는 이름은
‘황금의 입’을 가진 성자 크리소스토무스에서 연상된다. 말로 사람의 영혼을 움직였던 웅변가처럼, 골드문트는 감각과 예술, 사랑과 쾌락을 통해 세계를 몸으로 경험하려는 인물이다.
요약
마리아브론 수도원에서 나르치스는
희랍어에 능통한 수도원생으로,
깡마른 체구와 어두운 성격을 지닌 사변가이자 분석가로 살아간다.
어느 날,
눈부시게 화사한 존재—
금발머리에 어린아이 같은 영혼을 지닌 몽상가 골드문트가 수도원에 들어온다.
골드문트는 자신보다 뛰어난 지성을 지닌 나르치스에게 경탄을 느끼면서도,
그가 자신에게 위험한 인물이라는 예감을 품는다.
사람들의 성격과 운명을 꿰뚫어 보는 감각을 지닌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에게 잊혔던 ‘어머니’의 존재를 일깨운다.
그리고 부성의 피를 타고난 자신과
모성의 피를 타고난 골드문트의 차이를 말하며,
수도원을 떠나 자신의 천성과 기질에 맞는 삶을
살 것을 권한다.
골드문트는 리제라는 여인을 만나며
자연과 같은 어머니를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한다.
그는 수많은 여성과의 관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험을 통해
점차 성장해 간다.
그러나 금기의 여인 아그네스를 만나
함정에 빠지고 감옥에 갇힌다.
사형을 선고받은 채 고해신부를 기다리던 순간,
나르치스가 나타나 골드문트를 구해낸다.
두 사람은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온다.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에게 조각을 의뢰하고,
골드문트는 서가로 이어지는 층계와 서가를 조각한 뒤 뤼디아를 모델로 마리아상을 완성한다.
잠시 여행을 떠났다가
병든 몸으로 돌아온 골드문트는
끝내 나르치스의 곁에서 숨을 거둔다.
감상
헤세는 이성과 감성, 학문과 예술이라는
대립되는 개념을 단순한 대비가 아닌
깊이 있는 대화로 풀어낸다.
상징을 풍부하게 사용하면서도
과도한 난해함에 빠지지 않고,
설명과 정리를 통해
독서의 몰입 흐름을 끊지 않는다.
섬세한 은유와 세밀한 감정 묘사는
인물들의 정서적 궤적을 더욱 깊게 만든다.
자신을 알지 못한 채 떠도는 골드문트,
그리고 그를 깨어나게 하려는 나르치스.
마치 눈먼 사람과 멀쩡한 사람이 함께 걷는 것처럼
그들은 나란히 걸어간다.
장님이 자신이 장님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그것은 그에게 편안한 일이었다.
요한이라는 이름
나르치스는 서품을 받은 뒤
자신의 이름을 ‘요한’으로 바꾼다.
이전에 골드문트는 조각가가 되어
나르치스를 사도 요한의 모습으로 조각한 적이 있다.
나는 이 장면이 우연이 아니라고 느꼈다.
나르치스는 금욕과 예언으로 진리를 외치던
세례 요한이 되고자 했고,
그 삶을 끝내 완성했기에
요한이라는 이름을 택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골드문트가 그를 사랑과 진리를 전하는
사도 요한으로 조각한 이유 역시,
그가 자신에게 사랑과 인식의 문을 열어준 존재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 아주 개인적인 해석이지만.
“자네는 나를 비웃을 테지만
나는 사람과 쉽게 헤어지지 못하거든.
이런 집착이 싫다네.
그건 마치 병과 같은 것이지.
젊고 건강한 사람들은 이런 집착을 모르거든.”
골드문트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그가 평생 건너온 ‘공간들’의 마지막 통과처럼 느껴졌다.
죽어가던 그 순간,
그가 헤세의 「단계」를 쓰지 않았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명랑하게
공간에서 공간으로 지나가야 한다.
그 어떤 공간도 고향인 양 집착해서는 안 된다.
…
어쩌면 죽음의 순간조차도
우리는 새로운 공간으로 젊게 넘어가는지도 모른다.
삶의 부름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러니, 내 마음이여,
이별을 받아들이고 건강하라.]
— 「단계」
극과 극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그리워하며,
진심으로 아끼고 존중했던 두 사람.
존재만으로도 서로의 의지가 되었던 관계.
그들은 나에게도
충분히 멋지고 매력적인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골드문트를 통해
나에게 낯설기만 했던 예술과 예술가의 세계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각 장에 제목을 붙여보고,
이미지를 만들어보고,
분석하며 챗지피티와 의견을 나누는 동안
오랜 시간, 이 작품과 함께 즐겁게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