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닌 엄마
나는 새벽에 집을 나가 저녁에 돌아와 아이를 안아주기만 하면 되는 엄마였다.
실질적인 육아는 모두 어머니가 하셨다.
기저귀 갈아주기, 분유 타주기, 목욕시키기, 재우기. 내가 집에 없는 동안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어머니가 처리하셨다.
퇴근해서 돌아오면 아이는 이미 저녁을 먹고 깨끗하게 씻은 상태였다.
나는 그냥 안아주고 놀아주기만 하면 되었다. 아이에게는 재미있는 것만 해주는 사람, 힘들고 번거로운 일은 할머니가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엄마 같지 않은 엄마, 그러나 엄마인 사람으로 살기 시작했다.
내 역할이 무엇인지 모호했다. 진짜 엄마는 어머니 같았고, 나는 그저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 같았다.
아이에게 나는 어떤 존재일까? 필요한 존재일까?
하지만 그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전부를 다 해주지 못해도,
내가 아이를 사랑한다는 마음만큼은 진짜였다.
짧은 시간이지만 온전히 아이에게 집중하는 시간들이 쌓여가면서, 우리만의 유대감이 형성되었다.
신기한 시간의 힘
시간은 신기한 것이어서, 어느 날 누워만 있던 아이가 기어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뒤로 기었다. 앞으로 가려는데 뒤로 가는 모습이 귀여웠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앞으로 기기 시작했고, 집 안 곳곳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기어다니기 시작하면서 집 안은 전쟁터가 되었다.
위험한 것들을 모두 치워야 했고, 아이가 닿을 수 있는 곳은 모두 점검해야 했다.
콘센트 덮개를 붙이고, 모서리에 보호대를 댔다. 아이의 안전이 최우선이었다.
또 어느 날은 걸었고, 말을 했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첫 걸음마를 떼던 날이 기억난다.
어머니 품에서 내 품으로 걸어온 그 짧은 거리가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비틀거리면서도 용감하게 걸어오는 모습에 눈물이 났다.
첫 말도 잊을 수 없다. "엄마"도 "아빠"도 아닌 "할매"였다.
어머니가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나는 살짝 서운했지만, 어머니가 그만큼 많은 시간을 아이와 보내셨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아이는 가장 가까운 사람을 먼저 부르는 거니까.
열일곱 살이 된 딸
그리고 지금, 돌아보니 열일곱 살이 된 아이가 스마트폰을 들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어제까지도 안아서 재우던 것 같은데, 어느새 나보다 키가 커져 있다.
목소리도 조금 깊어졌고, 생각은 더 깊어졌다.
아이와의 대화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오늘 뭐 했어?" "재미있었어?" 같은 단순한 질문과 대답이었는데,
이제는 진지한 고민을 털어놓는다.
진로에 대한 걱정, 친구 관계의 어려움,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까지.
때로는 내가 답해주기 어려운 질문들도 던진다.
그런 딸을 보면서 놀란다. 내가 뭘 가르쳐준 게 있었나? 내가 뭘 해준 게 있었나?
대부분을 시어머니가 해주셨는데, 어떻게 이렇게 잘 자랐을까?
아이는 정말로 스스로 자란 것 같다.
그냥 큰 아이
아이가 그냥 컸다. 어른들은 "지들이 크냥 큰 줄 안다"고 하시지만,
우리 딸에게는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어머니께는 죄송하지만, 내게는 정말 '그냥 큰' 아이다.
물론 어머니의 헌신적인 돌봄이 있었지만,
그래도 아이 스스로의 생명력이 더 컸던 것 같다.
다른 엄마들을 보면 아이의 모든 것을 세세하게 관리한다.
시간표를 짜주고, 학습 계획을 세워주고, 건강 관리를 해주고.
나는 그런 것들을 제대로 해주지 못했다. 대신 아이가 알아서 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선택했다.
때로는 그것이 미안하기도 했다. 다른 아이들처럼 세심하게 챙겨주지 못해서.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아이의 자립성을 키워준 것 같다.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능력,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태도를 기를 수 있었던 것 같다.
목격하는 기적
매 순간 나는 기적을 목격하고 있다. 내가 무엇을 했다고 이 작은 생명이 이토록 훌쩍 자라버렸을까.
시간은 가차 없이 빠르고, 아이들은 신비롭게 성장한다.
어제의 아이와 오늘의 아이는 분명히 다르다.
매일 조금씩, 때로는 갑자기 변화한다.
그 변화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이다.
새로운 단어를 배우고, 새로운 표정을 짓고, 새로운 관심사를 가지는 모습들.
아이의 성장은 예측 불가능하고, 그래서 더욱 놀랍다.
내가 계획하거나 의도한 대로가 아니라, 아이만의 속도와 방향으로 자란다.
나는 그저 곁에서 지켜봤을 뿐인데,
어느새 나를 내려다보는 키가 되어버린 딸을 보며 깨닫는다.
부모의 역할은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자랄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라는 걸.
그리고 그 과정을 지켜보며 함께 성장하는 것이라는 걸.
이것이 바로 기적이다. 알아서 크는 기적. 생명이 가진 놀라운 힘,
시간이 만들어내는 변화의 마법.
그 기적 속에서 나는 엄마가 되었고, 딸은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들이 내게는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