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동행
"역시 포기 못하고 왔군."
검은 정장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실험실에 울려퍼졌다.
최민호는 본능적으로 미쓰리를 자신의 뒤로 밀어냈다.
"이번에는 경고로 끝나지 않을 거다."
두 명의 경비원이 최민호에게 다가왔다.
갈비뼈 부상 때문에 제대로 저항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살려줘요. 저 사람이 나를 끌고왔어요!"
미쓰리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나섰다.
"아이고 저 사람은 누구야? 경호원 총각 나 좀 살려줘!"
순간 미쓰리의 목소리와 몸짓이 완전히 바뀌었다.
좀전의 차분한 사람이 아니라, 피해자가 된 50대 아줌마 그 자체였다.
"어디 있다가 이제와? 아이고, 나 좀 살려줘요!"
미쓰리는 울음을 터뜨리며 경비원들에게 매달렸다.
"아줌마, 비켜요!"
"안 비켜요! 나부터 살려줘! 아이고, 살려줘요!"
경비원들은 당황했다.
갑자기 나타난 아줌마의 호들갑에 완전히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이, 이 여자 뭐야?"
"모르겠는데, 일단 제압해야..."
바로 그 순간, 최민호는 미쓰리의 의도를 깨달았다.
'이 여자, 정말 대단하다.'
최민호는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조용히 뒤로 빠져나왔다.
미쓰리는 여전히 울면서 경비원들을 붙잡고 있었다.
"아줌마, 진정하세요!"
"진정이 되나요! 내가 지금 인질이 되어서 끌려다녔는데!“
최민호는 복도에서 미쓰리에게 손짓했다.
미쓰리가 눈짓으로 알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아이고, 어지러워... 어지러워..."
미쓰리가 갑자기 쓰러지는 척했다.
경비원들이 모두 그녀에게 몰린 사이, 최민호는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5분 후, 미쓰리가 뛰어왔다.
"빨리요!"
두 사람은 필사적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뒤에서 경비원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3층 비상구로!"
다행히 3층 비상문은 아직 열려있었다. 두 사람은 건물 밖으로 뛰어나왔다.
건물에서 충분히 멀어진 후, 두 사람은 근처 공원에서 숨을 돌렸다.
"김철수씨를... 구하지 못했어요."
미쓰리의 목소리에 자책감이 가득했다.
"어쩔 수 없었어요. 우리도 위험한 상황이었잖아요."
"하지만 그 사람이 살아있다는 걸 확인했는데..."
최민호는 미쓰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미쓰리, 지금까지 정말 대단했어요. 하지만 이제 그만해야 해요. 너무 위험해."
"네?"
"이제 빠지세요. 이 일은 내가 혼자 처리할게요."
미쓰리가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리예요! 저도 이제 공범이에요!"
"공범이 아니라..."
"공범 맞아요! 불법침입, 절도, 증거인멸 방해... 저도 충분히 범죄자라고요!"
최민호는 미쓰리의 결연한 표정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정말 고집이 쎄네요."
"네, 어렸을 때부터 그런 소리 많이 들었어요."
어쩔 수 없는 여자였다.
"그럼 내 집으로 가서 대책을 세워봅시다."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최민호의 아파트로 향했다.
하지만 아파트 단지 입구 근처에서 최민호는 이상함을 느꼈다.
"기사님, 여기서 내려주세요."
"아직 안 도착했는데요?"
"괜찮아요."
택시에서 내린 최민호는 미쓰리에게 속삭였다.
"저기 검은 차 보여요? 우리 아파트 입구에 있는."
미쓰리가 고개를 돌려보았다. 정말로 수상한 차량이 아파트 단지를 감시하고 있었다.
"벌써 찾아왔네요."
"미쓰리씨 집으로 가야겠어요."
"네? 제 집요?"
"다른 선택이 없어요."
미쓰리는 잠깐 망설였다.
"음... 집이 좀 지저분할 수도 있어요."
"지금 그런 게 중요해요?"
미쓰리의 원룸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최민호는 예상과 달리 깔끔하게 정리된 실내에 놀랐다.
"생각보다 깔끔하네요."
"CSI 보면서 정리하는 게 취미거든요. 증거를 놓치지 않으려면
주변 환경이 정돈되어야 한다고 해서요."
미쓰리는 자연스럽게 배달음식 앱을 열었다.
"배고프지 않아요? 치킨 시킬게요."
"지금 그런 걸 시키고 있을 때가..."
"배가 고프면 머리도 안 돌아가요. 생각해보세요,
우리 앞으로 밤새도록 작업해야 할 수도 있어요."
최민호는 이 여자가 상황의 심각성을 제대로 모르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치킨 주문 완료! 30분 후에 도착해요."
미쓰리가 환한 표정으로 최민호를 바라봤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까요?"
미쓰리는 방 한쪽에 있던 책상으로 걸어가서 노트북을 꺼냈다.
"어?"
최민호의 눈이 커졌다. 노트북 화면이 하나가 아니라 세 개였다.
트리플 모니터 설정이 되어 있었다.
"완전 전문가네요..."
책상 주변을 보니 각종 전자기기들과 케이블들이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이건 일반인의 책상이 아니었다.
"아... 이 캐릭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미쓰리는 뿔테 안경을 고쳐 쓰며 최민호의 표정을 읽었는지 빙긋 웃었다.
"저 지금 페넬로페 닮았죠?"
"그게 누군데요?"
"하아... 형사들은 드라마 안 봐요? 크리미널 마인드에 나오는 천재 해커, 페넬로페 가르시아요."
미쓰리는 의자에 앉으며 재미있어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자기, 뭘 알고 싶어?' 이 유명한 대사 몰라요?"
"네, 몰라요."
"에휴, 재미없는 인간."
최민호는 점점 미쓰리가 단순한 CSI 덕후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미쓰리는 키보드에 손을 올리고 마치 피아니스트처럼 우아하게 타이핑을 시작했다.
"엔드스톤사부터 파헤쳐보죠."
화면에는 순식간에 여러 창들이 떴다.
공식 홈페이지, 기업 정보, 주주 현황, 최근 뉴스까지.
"일반적인 검색으로는 한계가 있어요. 좀 더 깊이 들어가볼게요."
"설마 불법적인 방법은 아니죠?"
미쓰리가 뒤돌아보며 윙크했다.
"이미 불법침입한 우리가 무슨 소리예요?"
키보드 소리가 더욱 빨라졌다.
최민호는 화면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미쓰리가 뭔가 고급 기술을 쓰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어? 이거 이상한데요."
"뭐가요?"
"엔드스톤사 주주 구성이 이상해요. 대부분이 페이퍼 컴퍼니거든요."
"페이퍼 컴퍼니?"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서류상의 회사들이요.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실체를 숨기고 있어요."
화면에는 복잡한 기업 구조도가 나타났다.
"그리고 더 이상한 건... 엔드스톤사가 3년 전부터 정부 연구용역을 받고 있어요."
"어떤 연구용역을?"
"'특수 인지과학 연구' '뇌과학 응용 기술 개발' 이런 거예요."
최민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뇌과학... 아까 실험실에서 본 것과 연결되는군요."
"그런데 더 무서운 게 있어요."
미쓰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 연구에 투입된 예산이 200억원이에요. 단순한 IT 회사에서 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죠."
화면에는 정부 지원금 내역이 상세하게 나타났다.
"미쓰리씨, 이런 정보를 어떻게..."
"기업공시시스템이랑 정부 입찰 사이트에서 크로스체크한 거예요. 합법이에요... 아마?"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치킨 왔네요!"
미쓰리는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서 문으로 향했다.
"잠깐, 혹시 모르니까 내가 확인할게요."
최민호가 먼저 나섰다. 다행히 진짜 치킨 배달이었다.
"생각해보니 정말 배고프네요."
최민호는 치킨을 뜯으며 미쓰리의 모니터를 바라봤다.
"그런데 정말 궁금한 게 있어요."
"네?"
"미쓰리씨는 정체가 뭐예요? 경리업무 하면서 어떻게 이런 기술을..."
미쓰리가 치킨을 한 입 베어물며 웃었다.
"그것도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일단은 이 사건부터 해결해봐요."
"정말 비밀이 많은 여자네요."
"형사님도 마찬가지잖아요. 혼자서 이런 위험한 사건을 파고들다니."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좋아요. 그럼 정말로 끝까지 같이 가볼까요?"
"저야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어요."
미쓰리는 다시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이제 진짜 재미있는 것들을 찾아볼게요. 김철수씨와 나머지 14명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깊은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본격적인 수사도 이제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