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단냄새가 불러온 것에 대해서
은단냄새와 선생님
김용훈 선생님
처방전을 들고 약국으로 들어갔다. 콧속을 휘젓던 긴 면봉이 B형 독감이라는 병명을 말해 주었다. 미각이 사라져 버린 듯 무얼 먹어도 맛이 없었다. 약사를 기다리며 약국 안에 전시된 상비약들을 이것저것 바라보던 중 고려은단이라고 적힌 은색 케이스를 보게 되었다. 뜯지도 않은 은단이었는데 순간 진한 은단 냄새가 후각이 아닌 또렷한 형상으로 걸어 들어왔다. 마치 순식간에 밀려오는 밀물처럼, 은단냄새는 김용훈선생님을 생각나게 해 주었다. 마치 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펑하고 순식간에 내 옆에 앉아 있었다.
선생님한테서 나는 냄새가 은단향 이었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선생님이 앉아 있는 교실 책상에서 은은한 향이 스며 나왔고 우리를 안아 주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도 선생님의 손끝에선 선생님의 향기가 배어 나왔다. 은단향 그건 언제나 선생님의 향기가 되었다. 지금도 은단 냄새를 맡으면 김용훈선생님이 생각이 난다.
은단향은 먼 시간 속에 놓여 있는 기억들을 소환해 온다. 툭툭 먼지털 듯 하얀 입자들이 분말이 되어 퍼져 나간다. 아련함과 애틋함이 알 수 없을 수많은 감정들이 휘몰아쳐 온다.
학교 어디를 가든 선생님의 흔적은 냄새로 존재해 있었고 아이들은 선생님의 부재를 그 냄새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은 키다리 아저씨처럼 키가 컸고 말랐다. 팔다리가 홀쭉하니 전체적으로 빈약해 보였지만 교육자로서의 위엄이 말과 행동에 묻어 나왔다. 양복 안쪽에 입은 검은 터틀넥은 항상 복부에 착 달라붙어 있었고 배라고 불려지는 신체 부위가 보이지 않는 듯했다.
선생님은 언제나 웃고 있었다. 수업을 하거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입과 눈이 먼저 웃고 간격을 두고 짧고 묵직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전까지 만났던 선생님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긴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나를 불러 세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사 학년 까까머리였던 열한 살 남자아이는 선생님이 쓰다듬어 주는 그 따뜻한 감촉이 좋았다. 손바닥에서 흩어 나오는 은단향과 머리를 쓰다듬을 때 느껴지는 까실한 감촉은 특별한 관심으로 보호받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만들어 주었다.
그것도 선생님 이라니,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러주다니, 공부를 잘한다며 칭찬까지 해주다니, 이런 엄청난 일은 아이를 흥분시켰다. 집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뒷산으로 달려갔다. 엄마는 긴 갈퀴로 소나무 밑에 쌓인 갈색 솔잎을 걷고 있었다. 엄마는 하얀 수건을 머리에 감고 있었다. 마치 아라비아나이트의 터번을 둘러쓴 지니처럼. 엄마에게 달려들어 학교에서 일어난 엄청난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엄마는 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관심을 두지 않은 채 갈퀴질을 해나갔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아이는 칭찬받는 게 좋아서, 선생님의 손길이 좋아서, 그렇게 산수문제를 풀기 시작했고
글을 쓰기 시작했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무엇가를 해야 된다는 착한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열한 살은 생각이 만들 이 지려는 시간이어서 자기의 존재와 상대방과의 거리감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되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아 가려는 나이가 열한 살쯤 이였다.
그 나이에는 시간은 시간이 아니어서 하나의 보이지 않은 형체 없는 것에 불과했다. 해가 지고 날이 저물 때까지 흙먼지를 뒤집어써가며 종일토록 뛰어놀아도 걱정이 없었다. 아이들의 마음은 모든 사물에 쉽게 빼앗겼다. 마음 가는 데로 물 흐르듯이 낮은 곳으로 흐르다 고인 물을 채우고 다시 흐르듯 아이들의 마음은 자연에 가까웠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건 그렇게 쉽게 빼앗겼던 마음이 어느새 어디에 힘을 써야만 되는지 알아가는 것이다. 쉽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을 명확히 구분 지어 가는 시간은 어른의 영역일 것이다.
우리들은 한 시간을 걸어 학교를 오갔지만 그 시간이 마냥 좋았던 건 온천지 마음을 빼앗는 것들이 놓여 있었다.
나는 숫기가 없는 아이였다. 등하굣길은 걸어서 한 시간 거리였는데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않을 만큼 마음을 빼앗는 것들이 많았다.
선생님은 학교 안 사택에서 식구들과 같이 머물렀다. 사택은 검은색 기와를 얻은 몇 칸짜리 작은 집이었다. 작은 마당 주위로 회색 콘크리트담이 빙 둘러 쳐져 있었다. 작은 마당 안에는 몇 고랑을 이어 만든 더 작은 텃밭이 있었고 텃밭 안에는 언제나 푸른 상추가 자라고 있었다. 고랑주위로 회색잿빛의 재가 흙속에 섞여 있었다. 그 작은 밭고랑 안에는 몇 그루의 가지와 고춧대 아욱 상추 오이 가 심겨 있었다. 서너 개의 상추만으로 네 식구는 마당 평상에서 푸짐하게 밥을 싸 먹었다. 평상을 가로질러 연줄처럼 기다랗게 빨랫줄이 쳐져 있었는데, 선생님의 터틀넥과 하얀 수건들이 널려 있었다. 콘크리트 담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당과 사택풍경은 교실 이층 복도에서 훤히 들여다볼 수가 있었다. 태극기 펄럭 이듯이 , 하얀 수건들이 빨랫줄에서 펄럭였다. 푸른 철재 대문 안에서 항상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은 학교 담장 안에서 출퇴근을 했었다. 선생님의 아이들도 학교를 다녔었는데 나보다는 아래 학년이었다. 선생님은 목이 살짝 가려지는 터틀넥을 주로 입었는데 긴 목을 감싸주어 제법 잘 어울렸다.
모든 아이들에게 잘해주었는지 모를 일이지만 생각이 많아져 가는 열한 살의 남자아이는 그 정도의 관심만으로도 충분했다. 여러 명 중의 한 명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그냥 선생님이 주시는 따뜻한 환대가 지금까지 받아본 것 중, 지금까지 들었던 것 중
자기를 성장시키고 자기를 뛰게 만든 거라는 걸 알아가게 되었다. 정확히 무엇이 마음을 동하게 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어느 순간 관심 안으로 쑥 들어온 선생님의 존재는 아이를 성장시켜 나갔다. 선생님의 칭찬은 아이를 조금씩 변화시켜 나갔다. 대부분의 교육방법이 그러했는지는 모르지만 만약 그러했더라도 대수로울 일도 아니지만, 여전히 그 시절의 남자아이는 그 순간이 사람을 만들어준 기적과 같은 시간이었다는 걸 알았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은단향기는 선생님의 것이었다. 지문처럼 지워지지 않은, 위치 추적기를 소장한 은단향기는 선생님의 영구 결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