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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망증 치료법

건망증과 책 읽기

by 둥이

건망증 치료법


이상한 일이지만 요즘 들어 기억나지 않는 것들이 많아졌다. 거기엔 자주 연락하는 지인분의 이름과 한 달에 한 번씩 가는 헤어숍 이름과 재미있게 읽은 박경리작가의 토지 주인공 이름이라든가 아주 심할 때는 내 이름도 생각 안나는 경우가 있다.


어쩌다 연락할 일이 있어 그 사람을 생각한다. 그 사람의 생김새는 또룟이 기억난다. 이상한 건 이따금 그 사람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아무리 집중을 해서 생각을 해봐도 소용이 없다. 그러다가 연락을 해야 된다는 것도 잊은 채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름이 생각난다. 또 그때쯤 되면 이름은 생각나지만 용무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분명히 물어볼 말이 있었는데"




어느 날은 누군가 갑자기 내 이름이 뭐냐고 물어볼 때가 있다. 어느 순간 사람은 이름이 사라진다. 그 사람이 직함으로 불려지고 직업으로 불려진다. 어제는 집 앞 병원을 들렸다. 간호사 앞에는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는 노트가 있었다. 모나미 까만색 볼펜이 노트에 긴 줄에 매달려 있었다. 난 볼펜을 잡고 노트 위에 오른손을 올려 둔 채로 내 이름을 생각했다. 간호사는 노트북 자판을 두두리며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어색함이 느껴졌던 걸까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 그냥 말없이 서있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하다. 당연한 일이지만 벌써 이름을 적고 저 앞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할 시간이다. 나는 그 짧은 시간, 이름을 쓰고 자리에 앉아 내 이름이 불리길 기다려야 할 충분한 시간에 난 그대로 서있었다. 삼십 초 아니 일분정도, 어색함이 정점으로 치달으려는 순간 아 내 이름이 생각이 났다.




"***님 진료실로 들어가세요"


그건 누군가 내 이름을 갑자기 부를 때도 해당된다. 잠깐 사라졌던 기억이 떠오르는 것과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는데 모르는 것 둘 다 썩 좋은 기억은 아니다. 그럴 때면 노안으로 희미하게 글씨가 보일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 그냥 우울해진다.


난 은행을 자주 가진 않지만, 이따금 예금만기가 됐다던가 새 예금을 예치하러 가게 되는 경우가 있다. 지금도 난 은행에 갈 때마다 드는 생각은 AI가 이렇게 발달한 시대에도 은행들은 왜 그렇게 많은 서류를 필요로 하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다. 같은 서류에 사인과 도장과 인적사항과 전화번호를 계속해서 적는다.


지난주 은행 업무를 볼 때였다. 10명의 대기 인원은 한 시간을 기다려서야 사라졌다. 내 번호를 부른 건 서두르는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 아주 느긋한 말투에 여직원이었다. 심플한 하얀색 면블라우를 입은 여직원은 나를 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여기 여기 전화번호와 이름 그리고 사인해 주세요"


순간 내 전화번호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난 아내의 번호와 내 번호를 섞어 전혀 다른 번호를 적고 있었다. 아내의 앞번호와 내 뒷번호를 적고난 후, 아 이게 아닌데 하며 다시 나의 앞번호와 아내의 뒷번호를 적었다. 그렇게 두 번, 난 내 전화번호를 수정했다. 기억이 퇴화된 것이다. 뭐든 버튼 하나로 다 되다 보니, 누군가 갑자기 나의 신원에 대한 것을 물어보면, 마치 포밍된 컴퓨터나 초기화된 핸드폰처럼, 기억이 없어진다. 아마도 일초마다 생긴다는 2500만 개의 새로운 세포들이 다 어디로 사라진 듯하다. 세포분열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노화는 슬픈 일이다. 눈이 침침해지고, 단순한 기억이 사라지고, 이상한 건 입맛만은 줄 곧 유지가 된다. 그렇다고 입맛도 없어지면 더 슬퍼지겠지만,


흔한 일이지만 예전엔 왼손에 핸드폰을 들고 있거나 뒷주머니에 넣어두고 핸드폰을 찾을 때가 많았다. 그리고 분명 가방을 들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집에 와보니 가방이 있어야 되는 방한구석에 다소곳이 있다거나 지금도 많이 겪는 일중엔 지하 주차장에 주차해 둔 차를 찾기 위해 이층과 삼층을 돌아다니는 경우가 많다. 갈수록 아내와 나는 주차장에 숨겨둔 차를 찾는 횟수가 많아진다.




요즘 들어 이런 일이 조금씩 쌓여간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간다. 아주 작은 데서부터 조금씩 퇴화되어 간다.

단추를 조여 맨다거나, 화장으로 가려 본다거나, 눈에 보이는 주름은 그래도 숨길수가 있었는데, 머릿속에 주름은 숨길 수가 없다.



기억 전체를 다 잡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지워지는 기억을 위해 아무것도 안 할 수도 없다. 이게 방법일지는 모르지만, 난 책을 읽는다. 읽다 보면 그냥 마음이 편해진다. 마음이 스스로 사는 방법을 찾아 나선다. 적어도 건망증 정도는 후루루 떨쳐 버릴 수 있게 해 준다. 참 고마운 일이다. 책 읽기는 마음에 버려야 할 것과 집중해야 할 것을 알려준다. 세상 어디에도 그런 능력을 가진 것은 없다. 그런 이유로 난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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