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살이 만들어 준 마법 이야기
열네 살이 만들어 준 마법 이야기
이상한 일이지만 어떤 시간들은 살아가며 더 선명해지는 시간들이 있다. 그런 시간들은 마치 나이테처럼 자신들의 흔적을 지워지지 않은 언어로 만들어 인생 곳곳에 녹아들고 스며들어 무의식 속에 체취를 남긴다. 먼 훗날 그런 체취들은 대나무의 매듭처럼 무료하기만 한 나의 시간을 풍요롭고 유연하게 만들어준다. 그런 시간들은 삶의 굽이굽이 온전히 베어 들어 부러지지 않은 아름다운 기억들을 선물해 준다. 마치 시간 속에 익어가는 포도주처럼,
누구에게나 그런 시간들이 있듯이, 나에게도 그런 삶의 시간들이 있다.
나의 삶의 매듭을 만들어 주었던 시간들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1985년은 내가 열네 살이 되는 해였다.
그해에 난 중학생이 되었다.
정확히 열네 살 때 난 부모님 곁을 떠나
혼자 생활하기 시작했다. 거창하진 않지만 독립의 시작이었다. 미국에서는 열여덟 살이 되면 아이들을 독립시킨다고 했으니까 정확히 사 년 더 빨리 난 부모님 곁을 떠난 셈이다. 그렇다고 가정교육의 방향이 처음부터 어떤 목표를 가지고 부모님과 떨어져 지낸 것은 아니었다. 거기엔 어느 날 아버지의 결정이 있었다. 아버지는 교회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자식들을 종교재단이 운영하는 학교로 보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렇게 어느 날 난 고향땅을 떠나 낯선 이국땅, 버스와 사람들로 붐비는 서울에서 중학교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해 2월의 겨울 오후 1시 무렵에 난 기숙사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나의 짐들을 노란색 택시 뒷트렁크에서 꺼냈다. 짐들이 많아서 시내버스를 타지 못했다. 몇 주 전에 사 온 빨간색 담요가 보자기 사이로 삐져나왔다.
삐져나온 빨간색 담요가 창피하게 느껴졌다. 덮고 잘 담요와 이불들만 한 보따리였다. 난 마치 피난민처럼 보였다. 좀 더 정확히는 이불 보따리와 옷과 책들이 들어있는 가방이었다. 나는 왜 이 먼 곳까지 중학교를 와야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중학교가 서울이어서 실력이 좋다고 했다. 나에게 서울은 낯설고 힘든 곳이었다.
그곳에서 난 철저히 아웃사이더였고, 이방인이었다. 어찌 되었든 처음 시작은 그랬다. "이방인" 그렇다고 까뮈의 이방인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곳이 편해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상하리 만치 서글펐던 슬픔들이 어느 순간 새벽안개 걷히듯 사라져 갔다.
어느 날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큰 것이었다. 팔다리가 길어지고 목소리도 굵어졌다. 보이지 않던 곳에 까만 털들이 솟아났다. 친구들은 모일 때마다 서로의 털을 자랑삼아 이야기했다.
겨등랑이와 가슴에 난 털은 그 아이가 어떤 아이란 걸 결정해 주는 표징이었다. 피해 갈 수 없는 신분제도처럼, 그런 표징들은 친구들을 어른과 아이로 구분 짓게 만들었다. 친구에게 있는 것이 나에게 없는 걸 확인할 때면, 마치 그것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친구를 부러워했다. 자기의 삶이 거기에 달려 있기라도 하듯, 하루하루 친구에게 자랑할 날을 기다리곤 했다.
아마도 열네 살은 그런 나이였을 것이다. 그리고 열네 살은 알아갔을 것이다. 열네 살에게 더 필요했던 것들이 무엇인지를, 서로의 성장을 보고 자라는 친구라는 것을,
열네 살은 친구의의 결핍을 보며 자기의 결핍을 채워나갔다.
아마도 궁극엔 있어야 될 곳을 알아가게 되었다. 아마도 난 그렇게 중학생이 되어 갔는지 모른다.
버스와 소음과 사람들에 부딪껴 생활력이 단단해져 갔다. 이제 혼자서도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약속장소로 찾아갈 수가 있었다. 이제 혼자서도 목욕탕을 가서 쭈뼛거리지 않고 속옷을 벗을 수 있었다. 이제 한밤중에 일어나 화장실을 혼자서도 갈 수 있었다.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갔다. 그럴수록 열네 살 아이는 단단해져 갔고, 보이지 않는 곳에 쌓여가는 시간의 매듭이 아이를 성장시켜 갔다.
식물학적으로 말하자면 토양에 적응해 나갔다고 할까 엄마가 보고 싶어 한 달을 울던 아이는 서서히 엄마를 잊어갔다. 그 자리에 친구들이 들어왔다. 그 자리에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아이를 보고 두근거렸던 첫사랑이 들어왔다. 나는 그렇게 성장하고 있었다. 마치 소설 속 서희처럼, 어느 날 쑤욱 자라 버린 열네 살이 나타났다.
이불보따리를 내려둔 곳에 겨울 햇볕이 따스하게 쏟아져 내렸다. 코끝으로 찬바람이 스쳐갔다.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았다. 부푼 흙속에서 씨앗들은 움을 틔우고 있었다. 봄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힘든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다. 열네 살, 몸도 마음도 몹시 추웠던 겨울 끝자락, 남루했던 기숙사에서의 시간들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기 시작했다.
디귿자 형태로 생긴 기숙사는 흙색 기와로 덮여 있었고, 토벽은 헐거워져 흙가루가 바람에 날렸다. 불암산 밑자락에 위치한 기숙사에 내 또래의 학생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부모님들은 기숙사방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두고 가도 되는 건지 안심하지 못한 채 서성거리고 있었다.
기숙사는 스무 개의 작은방들이 디귿자 모형으로 붙어 있었다. 방안 구석에는 스프링 와이어 철재 침대가 있었고 한쪽벽은 옷장과 이불장으로 보이는 나무 미닫이 문들이 붙어 있었다. 그 작은방들에는 앞뒤로 커다란 창문이 나있었다. 방앞으론 베란다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 베란다를 통해 이동하고 아홉 시 반에는 베란다 앞에 줄지어 서서 점오를 받았다. 베란다 앞을 지나가다 다른 방 창문 앞에 서서 방안 사람들을 쳐다보곤 하였다. 마치 박물관이나 동물원에 온 사람처럼, 사감선생님이나 도방장형도 발소리를 내지 않고 베란다 앞에서 우리들을 쳐다보곤 하였다.
베란다 밑으로 연탄아궁이가 있었다. 연단 아궁이는 불이 꺼지지 않게 시간에 맞춰 연탄불을 갈아 주어야 했다. 한방에는 중학교 일 학년부터 중삼까지 네다섯 명씩 사용을 했다.
방청소와 연탄불 관리는 중학교 일 학년 몫이었다. 우리에게 연탄불은 공부만큼 중요했다. 산밑의 찬냉기는 사월까지 가시지 않았다.
제일 힘들었던 건 빨래였다. 겉옷이야 한 달에 한번 집으로 가져갔지만, 속옷과 양말은 거의 매일 빨아 널어야 했다. 좁은 방에서 여러 명이 살다 보니 게으름을 피우다 보면 금방 쉰내와 꼬랑내가 나서 들통이 난다. 된통 혼나고 나서 삼사일 신은 양말을 벗고 세면장으로 달려갔다. 뜨거운 물은 정해진 시간대만 나왔고, 그 시간대면 세면장은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북적였다. 빨래만큼 힘들었던 건 선배들의 훈육이었다. 선배들의 훈육은 젊은 혈기를 제어하지 못해 단체로 뺑뺑이를 돌거나 맞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난 군대에 가서도 크게 힘들지 않았다. 육체적인 고단함이야 비교가 안 되겠지만 적어도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찌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열네 살의 기억은 인생의 면역력을 한방에 키워 준 예방주사였는지 모른다. 열네 살 이후 난 더 이상 엄마가 그립지 않았다. 그렇다고 엄마가 싫어졌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부모님이 힘들게 농사짓는 게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래서였을까 부모님 곁을 떠나서 생활한 열네 살의 그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진다.
아마도 열네 살은 나에게 매듭이 만들어진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어렸을 때 맞은, 오른쪽 어깨에 남아있는 선명한 주사자국처럼, 열네 살의 기억은 힘들 때마다 나를 지탱해 준 예방주사였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