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훈육에 대한 이야기
좋은 아빠가 되는 방법
- 아이들 훈육에 대한 이야기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루카 6: 45>
나는 꽤 다정한 아빠다.
정확히는 이 정도면 디정한 아빠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래 난 다정한 아빠야"
그건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나에 대한 생각에 불과하지만, 나를 지켜본 지인분들은 대체로 내 말이 맞다고 말들을 해준다. 아이들 입장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아이들과 친구처럼 지낸다. 아이들 역시 아빠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가끔 너무 말을 안 들어 화를 낼 때도 많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런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난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도 싫지 않았다. 그 시간이 전부 좋다고는 할 순 없지만,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너 왜 그거 좋아해" "그거 안 좋은 거야"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게 대단한 거는 아니지만, 나름 아이들의 선택을 존중한다. 그렇다고 모든 좋다고 하는 것을 들어주지는 않지만, 그게 옷이라든가, 책이라든가, 학용품이라든가, 문방구에서 파는 필통이나 장난감 정도라면 정해진 가격선에서 아이들의 의견을 최대한 수용해 준다.
아이들은 아직까지 핸드폰이 없다. 또래 친구나 학교에서 핸드폰이 없는 아이는 우리 아이들 뿐이다. 그게 자랑할 만한 거는 아니지만, 왜 핸드폰을 안 사주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 편이다. 다들 걱정들을 하지만 분명 얻는 게 더 많다고 확신하기에 최대한 늦게 사주려고 한다. 아이들도 이 부분에 대해서 크게 다투거나 조르진 않는다.
강직한 아내의 교육관이 아이들을 길들인 것이다.
대신 아이들은 아빠의 핸드폰을 허용 수준 안에서 시간을 약속하고 본다. 물론 내가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고 할 순 없어서 십분 혹은 이십 분 안에서 자기들이 좋아하는 유튜브나 아이돌의 음악을 듣는 것인데, 나는 이런 것들은 최대한 허용해주고 있다. 물론 아내의 눈치를 봐가면서, 그것도 자기 할 일들을 끝낸 후에 가능하다. 난 아이들과 도서관을 자주 간다. 도서관에서 혹은 서점에서 서성 거리는 것을 좋아한다. 아이들도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서성거리며 책을 보거나 문구를 고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아무 생각 없이 서성거리는 것을 좋아한다. 좋게 말하면 아빠를 닮아가고 있는 것이고, 성의 없이 말하자면 그냥 옮은 것이다.
이상하게 이런 거는 아주 쉽게 부모가 하는 데로 따라 한다. 습관은 자기도 모르게 정말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난 아이들과 수리산 산책길을 걷고 아파트 단지에서 자전거를 탄다. 아이들의 자전거를 바꿔줄 때가 되었다. 친구들은 모두 까만색 자동기어변속이 되는 멋진 자전거를 탄다. 자전거계의 BMW를 친구들이 타고 다닌다면, 우리 아이들은 오 학년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안장이 낮은 자전거를 탄다. 그냥 저학년아이들 전용으로 나온 하늘색 자전거라 아이들이 타고 다니면, 거의 한두 번은 친구들이 야 아직도 이런 자전거를 타는 거야 물어본다. 몇 번은 자전거를 바꿔달라고 했지만 이 역시 아직 탈만 하다는 것과 까만 자전거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아내는 언제 사준다는 약속도 없이 기다리라고 했다. 아이들은 그 마저도 보채지 않고 있는 자전거를 꽤나 열심히 몰고 다닌다. 마치 독일 명품 자동차라도 되는 것처럼, 우아하게 아파트 단지를 누비고 다닌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나에게 이상한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다.
난 가끔 미친 사람처럼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른다.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그냥 큰 소리가 아닌, 있는 힘을 다해, 감정을 실어 싫은 소리를 한다. 아이들은 내가 소리를 지를 때면 순간 조용해지지만 얼마 못 가 또 장난을 친다. 그렇다고 화를 내는 이유가 크게 대수로운 것도 아니다. 숙제를 안 했다던가, 하루 끝내야 할 자기들의 일들, 세부적으로 말하자면 책 읽기, 수학숙제, 영어숙제, 논술 등등 이런 것들을 안 했을 때 난 아이들한테 조용히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엄마 오시기 전에 언론 해라"
어쩌면 눈 질끈 감고 다른 생각을 쫒다 보면 페이지 넘어가듯 화는 누구러진다. 오전에 박 과장에게 지시해 둔 회의내용을 생각한다거나, 이번 달 영업 매출의 숫자를 떠올려 본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라면 잠깐 하느님께 기도라도 드린다면 치솟았던 화는 가라앉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 화가 고스란히 나를 향해 반사되어 온다는데 있다. 아이들이 받을 마음의 상처는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그런 판단이 정확히 맞다고 할 순 없지만, 대체적으로 아이들의 표정과 말투에서 배어 나오는 감정들의 변화는 크지 않는 반면에 나의 감정의 기류는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절망감이 엄습해 온다. 한마디로 그냥 내 속에 숨어있는 또 다른 내가 너무 혐오스러웠다. 말로만 아이들을 사랑하는 나쁜 아빠가 돼버리고 말았다. 체 몇 분도 안돼서 난 아이들을 불러 사과를 한다. 아이들은 그 순간 크게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 아빠 나도 미안해"라고 말해준다.
이보다 더한 경우는 얼굴에 핏줄이 올라올 정도로 소리를 지르는데도 아이들이 말을 안 듣는 때가 있다. 그 순간 난 달리 손에 잡히는 게 없다 보니 주방으로 달려가 널찍한 나무 주걱을 들고 나온다. 아이들은 순식간에 소리를 지르며 방으로 숨기 바쁘다. 아빠가 장난이라도 치는 줄 착각을 한다. 난 기필코 아이들의 손목을 잡아 체 현관문과 가장 멀리 떨어진 옷방으로 아이들을 끌고 간다. 그래야만 현관밖에서 들리지가 않는다. 아이들은 나무주걱 앞에서 잠깐이지만 무서운 표정을 짓는다. 난 아이들한테 나무주걱으로 맞기 싫으면 어서 할 것들을 하라고 약속을 받는다. 그것도 말하다가 감정이 더 올라가게 되면 살이 많은 팔뚝이나 허벅지를 툭하고 때린다. 손목의 힘을 조절해, 때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 때린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그렇치만 나무주걱의 스냅이 좋았던지 선명한 자국은 벌겋게 그려진다.
훈육 그 어려움에 대해서 예수님은 루카복음에서 나를 깨우치는 명언을 해주셨다.
아이들한테 소리를 지를 때마다 난
미사에서 들은 성경구절이 생각났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이 구절을 미사 강론 때 듣고 머리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열매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선한 사람은 마음이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예수님은 루카복음 6장에서 훈육에 대한 명언으로 나를 깨우쳐 주었다.
아이들은 분명 좋은 나무라는 걸 잊어버리면 안 된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 넘쳐 밖으로 흐르고 있는 말들을, 정확히는 아이들의 숙제검사와 공부를 시키려는 너무 많은 걱정을, 그래서 그 걱정을 입으로 말하게 되는
모순된 사랑을 없애 달라고 기도드린다.
근데 이게 정말 쉽지가 않다. 아직도 나는 신심이 턱없이 부족하다. 더 기도드려야 되는 이유다. 이걸 수양부족이라고 하면 좋은 말이고, 거칠게 이야기하면 사람이 덜 된 거고, 나쁘게 말하면 그냥 화만 내는 나쁜 아빠다.
그런데도 참 다행인 건 아이들은 아빠를 좋아한다. 아마도 지금까지 열심히 성당 다녔다고 하느님이 선물을 주신 것 같다. 감사합니다. 하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