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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코마니 같은 친구와의 브로맨스

친한 친구 이야기

by 둥이


친한 친구에 대한 이야기다.


나에겐 친한 친구가 한 명 있다.

어느 정도로 친한지에 대해서 설명을 하자면, 우린 그냥 친하다는 말로 뭉퉁그려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아니다. 애매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가끔 친하다는 말이 딱 잘라 어디까지가 친하다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때도 있다. 자주 보는 동호회 사람들이나 주말마다 보게 되는 성당사람들을 친하다고 해야 되는 것인지, 아니면 회사 사람들이나 학교 동창들을 친하다고 말해야 되는 것인지, 아니면 자주 골프라운딩을 나가는 사람들을 친하다고 이야기해야 되는 것인지,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가끔 하다가, "그래 난 친한 친구가 한 명은 있어"하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 외 모든 사람은 그래 아무렴 어떻겠어 두루두루 친하면 좋은 거지라고 뭉퉁그려 삼인칭으로 그 외 다수들과 친하다 정도로 자연스럽게 구분된다. 친하다는 그 말의 클래스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준, 단연 돋보이는 그런 친한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우리는 고등학교 일한 년 때 처음 만났다. 나이로 치면 열일곱 살 때였다.

살아온 환경이 비슷해서인지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아마도 우린 둘 다 농사를 짓는 가난한 부모님을 둔 공통점을 먼저 알아봤는지도 모른다.


그 이후로 우린 사십 년이 넘도록 가깝게 연락하며 지내는 몇 안 되는 친구로 지내오고 있다.

항상 드는 생각이지만 그 친구는 이상하리 만치 나의 인생 궤도와 놀랍도록 닮은 점이 많았다. 누군가 일부러 그렇게 소설로 쓰인 인생을 우리가 다시 환생해서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가끔은 들었다. 그렇다고 한 친구가 다른 친구를 롤모델로 삼았다거나, 그 친구가 너무 좋아서 일부러 닮아가려 했다거나, 그 친구의 선택을 부러워해 같은 선택을 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는 어쩌면 전혀 다른 그리고 결이 닮지 않은 인생 궤도를 선택했다. 코페루니쿠스의 태양계 행성 궤도처럼, 우리는 같은 길을 걸을 수도 없었고 같은 궤도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우리는 서로가 선택한 궤도에서 서로의 길을 걸어갔다. 그것도 전혀 닮지 않은 결이 다른 분야에서 각자의 인생을 뚜벅뚜벅 살아갔다. 하지만 참 묘한 게 사람의 인생이었다. 아무리 다른 길을 걸어도 돌아보면 항상 우리는 곁에 있었다. 급기야 서로 다른 대륙, 비행기로도 10시간을 넘는 거리에서 살아도, 바로 이웃에 사는 옆집 친구처럼 느껴졌다.


그 친구의 인생은 마치 한 편의 잘 짜인 영화처럼, 그리고 잘 빚어진 질그릇처럼, 서툴고 투박했지만, 시간을 쓸수록 인생 매듭마다 영롱한 비취색을 발하였다. 스스로 빛을 뿜어내는 별이 되어갔다. 물론 그 친구에 대한 이런 느낌은 누구나 접하는 향기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한 사람의 대한 평가는 절대로 객관적일 수 없다. 밑도 끝도 없는 감성적인 평가는 철저한 주관적인 느낌이다. 뭐 이건 관계의 기본적 메커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늘 만나고 헤어져도 여전히 아쉬운 감정은 어쩌면 넘치는 충만함이라는 것을. 그 친구를 만날 때면 느끼곤 했다.


그 친구는 지구 반대편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살고 있다. 일 년에 두 번씩 매년 한국을 방문한다. 매년 삼월말에 가족 전체가 이주일정으로 들어오고, 시월말에는 혼자서 들어온다. 그러다 보니 어찌 되었든 한국에 있는 친구들보다 더 자주 보게 되었다. 그게 싫다거나 지겁 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봐왔지만 말이다. 지겨울 만도 했지만, 우린 이상하리만치 삶의 궤도는 달랐지만, 좋아하는 취미와 습관들 그리고 삶을 대하는 자세와 아주 작은 것들에 대한 태도는 놀랍도록 똑같았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어쩌면 닮아가거나 옮은 것일 수도 있다. 알면서도 짐짓 부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겐 기적과 같은 일이지만, 일부러 같은 시기에 아기를 가진 사람처럼 우리는 비슷한 년도에 아기를 가졌다. 그 친구도 그렇치만 우리 부부 역시 어렵게 아기를 가졌다. 남들한테 쉬워 보이는 일이 우리에겐 오랜 시간 마음 고생하며 아기를 가지게 되어서 인지, 우리는 이후 같이 아이들을 키워낼 수 있었다. 아이들이 같이 커나가다 보니, 더 자주 보게 되고 육아문제도 소통이 잘되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정말 이상한 일이어서 난 가끔 이런 우연은 또 없을 거야 생각하고는 한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도 있듯이, 선한 유전자자들이 서로에게 옮아 들어갔는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 우리는 산책을 좋아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책 읽기와 글쓰기에 가진 시간을 소비하고 있었다.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데칼코마니 같은 인생을 살아갈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우리는 가끔 적어도 지금 읽는 것에 반정도 만이라도 그때에 읽었더라면, 분명 우리는 스카이 정도는 우습게 입학하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법 과거시제로 대화를 나눈다.

" 그렇지 당연하지 인생이 참 반전이 있어 "

시간은 우리가 가진 모난 것들을 조약돌처럼 둥글게 만들어 주었다.

수습생처럼 투박하고 거칠던 그 친구는 시간이 지날수록 하느님의 사랑으로 참 행복을 알아갔다.


우리는 처음부터, 그러니까 고등학교 일 학년 때 처음 친구로 만났을 때, 그때는 산책이 좋았다든가 책 읽기가 좋았다는가 글쓰기가 좋았다든가, 지금 우리가 좋아하는 대부분을 그때는 좋아하지 않았었다. 그렇다 보니 재수 씨는 왜 그때 안 하고 다 늙어서 이 난리냐며 틈만 나면 책을 사들이는 우리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구박했다. 모 그래도 그런 구박쯤은 충분히 웃어넘길 줄 아는 내공이 쌓여 있어서, 좀 심하다 싶을 땐 집안청소를 구석구석 열심히 한다거나, 처가댁 대소사를 알뜰히 챙기게 된다.


열일곱 살, 그때 우리에겐 공부보다 더 재미있는 것들이 많았었다. 그 시절 우리의 시간은 너무 느리게 흘러갔고 어떤 때는 마치 정지돼 있는 느낌마저 들 때도 있었다. 그 친구는 넘쳐흐르는 혈기를 가누지 못해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이상했던 건 나에게 그 친구가 고등학교 졸업을 못했다는 것이, 그리고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을 했다는 것이, 그리고 한때 좌표를 잃어 심하게 방황했던 여러 일들이, 친한 친구가 되어가는데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우리는 1991년도에 대학을 입학했다. 학번으로 치면 91학번이었다. 그 친구는 간호전문대를 들어갔다. 그 시절 남자가 간호전문대를 선택했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역시나 사람의 인생은 반전과 서사가 깃들여 있는 법, 그 친구는 대학졸업 후 여러 나라를 김삿갓처럼 떠돌아다니다 홀연히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것도 모자라 가뿐히 미국간호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여기서 끝났다면 그리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겠지만, 그 친구는 화려한 백조가 되려는 것이었는지, 전생에 나라를 구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찌 되었든 소아과 의사를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그 친구와 비교하자면 나의 생활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재미없는 인생축에 속했지만 어찌 되었든 IMF시절 대학을 졸업한 신분으로는 그럭저럭 환경에 잘 적응해 갔다. 중견기업에 취직해 연구소 동기로 만난 아내와 결혼을 했다. 몇 번의 이직으로 대기업에서 근무를 하다 지금은 작은 사업을 하고 있다. 그나마 가진 재능이 많친 않았지만 남들보다 책임감과 근면성은 좋았던 지라, 뒤처지지 않고 지금까지 밥벌이를 하고 있다. 인생 한방은 없었지만 차곡차곡 쌓아 올린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었다.


이렇듯 우리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왔다. 그건 마치 인생극장처럼 쫄깃하고 아찔한 순간들이었다. 한 발자국만 더 앞으로 내딛었다면 전혀 다른 막장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만난 작은 우연들과 우리의 선택이 만들어 가는 순간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이란 걸, 인생은 아주 단순한 그런 순간들이라고, 폴 오스터는 그의 소설 공중곡예사에서 이야기해 준다.


봄볕 드는 곳에 꽃이 피지 않은 데가 없듯이, 우린 서로에게 봄볕이 되어 주었는지도 모른다. 바라는 게 있다면오래도록 아프지 않고 그 친구와 더없는 시간을 나누고 싶다.


그런 친구가 있어 참 행복하다.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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