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마시고 싶은 날의 이야기
술 당기는 날이 있다.
술 당기는 날이 있다.
술이 당기는 날은 신기 있는 점쟁이가 바로 이날이야 어서 먹어라고 점지해 준 날이 아니다. 그날은 무슨 기하학 법칙이나 밀려오는 장마전선처럼 무조건 일어나는 확률 높은 날도 아니어서, 어느 때 준비하고 있다가 아 그래 이날 먹자 하고 나타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아무 때나 문뜩 그런 날이 찾아오곤 했다. 그런 날은 취기가 올라 집으로 돌아오는 늦은 밤 일 때도 있었고, 하루 종일 침대에 뒹굴다 배가 고파오는 무료한 일요일 오후일 때도 있었다. 어느 금요일 저녁 회식도 없이 일찍 퇴근하고 집으로 들어온 날, 아내의 치맥 한마디에 코가 비틀어지도록 오버하며 먹은 날도 있었다. 술이 당기는 날은 여고생의 변덕처럼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다 사라지곤 했다. 그것도 나름의 전략이랄까 오랫동안 술이 인류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그냥 이유 없이 당기는 그런 날이 있어서 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런 날은 술의 힘을 빌려 자기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을, 술의 말로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 그런 때도 있었나 싶겠지만, 직장 동료들과 한 달에 한번 의무방어전처럼 회식을 하던 때가 있었다. 모 지금도 그런 직장들이 많이 있겠지만 이십 년 전 그 시절은 회식은 업무보다 더 중요한 자리가 되어서 쉽사리 빠질 수가 없었다. 그때는 젊어서 인지 취기가 올라와도 취한 줄을 모른고 술을 먹었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올라와도 돌아오는 발걸음이 왠지 헛헛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날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다시 술집으로 향했다. 그 당시 안양역 근처에는 육교가 많았다. 그 육교 주변으로 비닐을 길게 이어 붙여 긴 포장마차 행렬이 아홉 시가 넘어가면 생겨났다. 뽀얀 수증기가 포장마차 안에 가득 차있었고 우리는 두꺼운 빨간 갓판을 들어 올러 안으로 들어갔다. 그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운치 있어 보였다. 이미 안은 몇 자리 밖에 남지 않았다. 큰 사발그릇에 가득 담긴 가락국수 한 그릇이 파란 식탁 위에 놓였다. 가락국수 위에는 빨간 고춧가루와 큼직 막하게 썰은 대파와 계란이 올려 있었다. 그 옆으로 소주 한 병이 덩그러니 놓이면 다시 술자리가 이어졌다. 속 풀러 들어왔다가 걷기 힘들 정도가 돼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마시지 않는 날에는 왠지 다시 다른 술집으로 들어가야만 할 것 같았다. 아침이면 술기운에 머리가 아파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다가도 저녁 무렵이면 다시 생각나는 게 술이었다. 그렇다고 매일 술만 마셨다는 이야기도 아니고, 술을 그렇게 좋아한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냥 술 이란 게 참 묘해서, 그렇게 심하게 술병이 생겨 오바이트를 하고 속이 아프다가도, 눈먼 장님이 세상을 보듯 싹 씻겨 내려가 다시 술을 찾게 되는 그 묘한 중독성, 술이 가진 매력이 아닐까 하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
이런 기억은 굳이 그렇게 오래전에 있었던 기억을 소환하지 않아도 된다.
몇 주 전 큰처남 내외와 술자리를 했다. 친구처럼 지내는 우리는 자주 술자리를 가지곤 하는데 문제는 항상 누군가 발동이 걸리면, 그날 먹어야 할 편의점에서 사 온 술로 부족해 냉장고를 뒤지기 시작해서 베란다와 깊숙이 먼지를 뒤집어쓴 과실주까지 꺼내 먹는다는데 있었다. 어느 날 먹은 술맛이 좋아서 캬 오늘 술맛이 좋네 누군가 이 말을 했다면 분명 그날은 기분 좋게 취기가 오르도록 술자리를 가지게 되는 날이었다. 삼각형 내변의 합은 180도라는 피타고라스의 법칙처럼, 우리는 서로의 취기가 오르도록, 건배를 하며 상대방의 술잔에 술이 남았는지 면밀히 눈여겨보며, 우리의 정신이 180도가 될 때까지 술을 마셨다. 그건 무슨 자랑거리도 아니어서 항상 숙취가 몰려오는 새벽녘이면 아 이제 술을 끊어야지 다짐을 하며 단톡방에 새해다짐을 하듯 짧게 안부인사를 남긴다.
"술 끊겠습니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이란 걸 뻔히 알면서도 숙취가 빠져나가는 하루반나절 동안은 그 결기가 풀어지지 않는다. 건조대에 걸어놓은 젖은 빨래가 마른 북어처럼 빳빳하게 말라가듯이, 밤새 몸속으로 들어간 술은 어느새 분해되어 간다.
아마도 생체학자나 제약회사들은 이런 신체의 리듬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시장이 이렇게 번창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 더 젊은 날의 어느 날은 돈이 없어 술이 당겨도 술을 먹지 못했다. 그 당시 지하철 1호선 회기역 근처에는 파전집이 많았다. 허름한 파전집안에는 언제나 앉을자리가 없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비집고 들어가 합석을 하면서까지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고소한 파전 냄새와 바사삭 씹히는 식감은 막걸리와 맥주안주로 행복을 부르는 조합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회기역을 지나다가도 낚싯줄에 걸려든 생선처럼, 그 고소한 냄새에 그만 발이 묶여 아 그래 딱 한판만 먹고 가자 다짐하며 파전집 행랑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술이 당기는 날은 그냥 이유 없이 당기는 날도 있었지만, 술보다 안주가 더 생각이 나는 때도 있었다. 또 어떤 날은 봄햇볕이 너무 따뜻해서라든가, 여름 장마가 추적추적 내려 바짓단이 젖어든 오후라든가, 하루 운수가 좋치않아 친구와 다툰 날이거나, 동기보다 연봉이 작다는 걸 알았을 때였거나, 여자친구와 식당에 들어가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지기가 좋아하는 것만 주문하는 여자친구가 꼴배기 싫어질 때나, 마냥 청춘일 것 같았던 인생이 막막하게 다가올 때이거나, 아내가 아이들 숙제검사 제대로 안 한다고 화를 낼 때이거나, 아이들은 어린데 아직도 이십 년은 더 벌어야 되는 막막한 현실이 크게 느껴질 때 이거나, 사람 노릇하며 사는 게 참 쉽지 않구나라고 느끼는 날 이거나, 내가 아프지나 않을까 남은 시간이 두렵게 느껴질 때 이거나, 파란 가을하늘 아내손을 잡고 산책하다가 아 내가 이렇게 행복하구나 문뜩 내가 가진 게 많은 사람이구나 아 행복하다 느껴질 때,...
술이 당기는 날은 이것보다 많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