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에 관한 이야기
편지 1.
새벽 5시 20분, 창밖은 검은빛이 발하고 있었다. 멀리서 푸른 새벽이 어둠을 쫓아내고 있었다.
하루를 시작하려는 새벽은 푸른 가운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그날은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난 무의식적으로 혈압약을 입에 털어놓고 물 한 목음을 삼켰다. 내가 생각하고 먹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마치 회중시계의 뻐꾸기처럼,
입력된 매뉴얼대로 몸이 움직였다. 인덕션 위에 놓여있는 김치찌개와 밥 한 공기를 들고 식탁에 앉았다. 그때 난 식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편지를 보았다. 편지라고 하기엔 좀 그렇치만, 어제저녁 늦게까지 혼난 주완이의 편지일 거라 생각했다. 몰려드는 새벽잠은 주완이의 편지를 읽는 동안 안개 걷히듯 사라져 갔다. 주완이의 편지에는 동그란 마음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주완이는 수영대회에 참가하고 싶다고 했다. 좀처럼 무엇을 먼저 하고 싶다고 말하는 법이 없었는데, 주완이는 늦은 밤까지 그날 해야 될 숙제들을 다 해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수저를 내려놓고 편지를 여러 번 읽었다. 존재만으로 넘치는 행복을 주는 아이들이란 걸, 나는 계속 잊어버린다. 그래서 결국 잃어버리게 될까 두려웠다. 식탁 위에 놓여 있던 편지 한 통이 하루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 같았다.
편지 2.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편지를 썼다. 그렇게라도 해야 한없이 느리기만 한 그 시간이 흘러갈 것 같았다. 어쩌면 나에게 특별한 의미도 없었던 친구들에게 편지를 쓸 수 있었던 건 군대라는 특별한 시간 때문 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난 그 아이를 생각하며 편지를 썼다.
특별히 할 말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무 말이나 갔다 붙일 수는 없었다. 적어도 그 아이에 관한 것과 그리고 친구들은 잘 있는지 정도의 공통된 화제를 찾아 편지지 한 장을 꽉 채웠다. 그건 하나 마나 한 이야기들 이였지만, 같은 과 동기라는 것만 빼면 거의 얼굴만 아는 사이였음에도, 별 시답잖은 내용이 담긴 편지에도, 같은 과 여자 동기들은 꼬박꼬박 답장을 보내주었다. 일 학년만 다니고 군대를 간 친구가, 그것도 거의 학교 수업에 빠져서 존재감도 없었던, 나에게 편지는 유일한 세상과의 통로였다. 그때는 몰랐었다. 내가 평생 쓸 편지를 그때 다 썼다는 걸, 난 삼 년 동안 많은 편지를 썼고, 또 많은 편지를 받았다. 그 자리에 정지해 있었던 시간들이, 그나마 느리게라도 흘러갔던 건, 누군가를 생각하며 편지를 쓰고, 쓰인 그 편지가 답장으로 돌아오는, 그 회귀의 시간을 난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마치 은빛 연어가 다시 강으로 돌아오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타듯이,
편지 3.
동네 어귀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오면, 그날은 빨간 헬맷을 눌러쓰고 동네를 훑고 다니는 우체부 아저씨를 볼 수 있는 날이었다. 난 부랴부랴 대문을 열고, 동네 한가운데를 관통하며 흐르는 시냇가까지 달려 나갔다. 우체부 아저씨가 들고 온 지난 학기의 성적표와 나에게 올 편지를 낚아채기 위해서, 난 서둘렀다. 빨간 모자를 눌러쓴 우체부 아저씨는 멀리서 뛰어오는 나를 바라보았다. 부르릉 요란한 오토바이 엔진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기분 좋은 휘발유 냄새가 바람에 실려왔다. 우체부 아저씨 손에는 몇 주 전 내가 보낸 연애 편지에 답장이 들려 있었다. 정사각형 모양의 분홍색 편지봉투였다. 나는 뜯어보지도 않고 그 편지가 내 꺼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일반적인 직사각형의 하얀 편지봉투가 아니었다. 편지는 받는 것 만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편지지안에 질서 정연하게 누워 있는 글자들이 비록, 내가 기대했던 내용이 아닐지라도, 그 아이에게서 온 답장은, 다른 어떤 것 보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지금도 가끔 난 그때 받았던 그 편지를 생각하곤 한다. 참 행복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