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우주 앞에서
그때가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모른다.
그 사람들도 '나'가 되어 수많은 '나'로 살아간다는 것을 알아던게,
그걸 알게 되었던 그 순간부터 '나'라는 둘레는 마치 궤도를 도는 행성처럼 나에게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소설 속 화자처럼 시간은 '나'로 인해 흐르고 있다는 걸, 그게 마치 변하지 않은 진실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때는 궁금해했다. 어디선가 이런 '나'를 주인공으로 드라마를 틀어 놓은 것 만 같았다. 한 편의 트르먼쇼를 보는 것 같았다. 이상했다. 왜 '나'만 느껴지는 건지, 왜 '나'만 존재하는 건지, 오십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난 그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게 외로움이라든지, 고독이라든지 하는 홀로 감당하고 치유해야 되는 것들은 아니어서, 아직도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난 단백질 덩어리 '뇌'를 떠올리게 된다. 그건 마치 제삼자처럼, 나의 '뇌'를 삼인칭 화자로 만들어 버린다.
왜 너는 그런 생각을 하냐고, 두부처럼 말랑말랑한 단백질덩어리한테 물어본다. 나의 '뇌'와 '나'를 동일선상에 놓지 못한다.
분명 이런 '나'는 전원 스위치를 올리듯이 셀 수 없는 수많은 '나'가 순식간에 '0N'모드로 바뀌어 서로 다른 '나'를 마주하고 있는 것, 그게 현재라는 시간 일 것이다.
'나'라는 내가 '나'라는 다른 이와 스치고 스며가며 젖어들어간다.
지금도 '나'라는 아내는 '나'라는 성당 자매님들과 식사를 하고 있다. 같은 시간 같은 자전주기와 공전주기를 살아가는 이 수많은 '나'
라는 관계는 소우주를 만들어 낸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다. 철학적이기도 하고, 학문적 이기도 하고, 문학적 이기도 한 '나'는 누구 인지, 그냥 단백질 덩어리 '뇌'가 나인지, 막대그래프 그리듯 생각을 잇고 또 이어 본다.
결국 머리만 아프다. 종래 답이 없는 질문들은 다 그렇다.
결국 '나'를 알아간다는 건,
각자의 '나'가 느끼는 정도의 차이는 다르겠지만,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죽음'이 결국 '나'에게도 온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것,
'메멘토 모리'여기에 길이 있다.
이 세상에 내것은 하나도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
이 세상의 모든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나는 오늘, 이 삶을 지나가는 사람으로서
작은 고백 하나 남기고자 합니다.
매일 세수하고, 단장하고,
거울 앞에 서며 살아왔습니다.
그 모습이 '나'라고 믿었지만,
돌아보니 그것은 잠시 머무는 옷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는 이 몸을 위해
시간과 돈, 애정과 열정을 쏟아붓습니다.
아름다워지기를,
늙지 않기를,
병들지 않기를,
그리고… 죽지 않기를 바라며 말이죠.
하지만 결국,
몸은 내 바람과 상관없이
살이 찌고, 병들고, 늙고,
기억도 스르르 빠져나가며
조용히 나에게서 멀어집니다.
이 세상에,
진정으로 ‘내 것’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도,
자식도, 친구도,
심지어 이 몸뚱이조차
잠시 머물렀다 가는
인연일 뿐입니다.
모든 것은
구름처럼 머물다 스치는 인연입니다.
미운 인연도, 고운 인연도
나에게 주어진 삶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니,
피할 수 없다면 품어주십시오.
누가 해야 할 일이라면
‘내가 먼저’ 하겠다는 마음으로 나서십시오.
억지로가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요.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미루지 말고 오늘, 지금 하십시오.
당신 앞에 있는 사람에게
당신의 온 마음을 쏟아주십시오.
울면 해결될까요?
짜증내면 나아질까요?
싸우면, 이길까요?
이 세상의 일들은
저마다의 순리로 흐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흐름 안에서
조금의 여백을 내어주는 일입니다.
조금의 양보,
조금의 배려,
조금의 덜 가짐이
누군가에겐 따뜻한 숨구멍이 됩니다.
그리고 그 따뜻함은
세상을 다시 품게 하는 온기가 됩니다.
이제 나는 떠날 준비를 하며,
이 말 한마디를 남기고 싶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내 삶에 스쳐간 모든 사람들,
모든 인연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세상에.
"나와 인연을 맺었던 모든 사람들이
정말 눈물겹도록 고맙습니다"
가만히 돌아보면,
이 삶은 감사함으로
가득 찬
기적 같은 여정이었습니다.
언제나 당신의 삶에도
그런 조용한 기적이 머물기를 바라며
이 편지를 마칩니다.
프란치스코
(1936~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