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지지 않는 계급적 친밀감에 대하여
대장아파트와 임대아파트 - 숨겨지지 않은 계급적 친밀감에 대하여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신라라는 나라에는 성골과 진골이라는 골품제도가 있었다. 왕족 혈연주의와 고위 귀족들을 위한 골품 제도는, 이상하게도 내가 예전에 다니던 S기업에서는 임원이나 팀장 인사철이 되면 유독 혈연주의를 내세우며 그 사람이 성골이니 진골이니 구분을 짓곤 하였다.
마치 신라시대 골품제도처럼, 인사파일철 안에는 직원들의 신분이 이미 구분되어 있었다. 분명한 건 개인의 노력으로 쉽사리 허물어지지 않는 단단한 영역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출신대학과 학부, 공채사원인지 경력사원인지는 성골과 진골로 구분되는 중요한 잣대였다.
어느 시대건 사람들은 보이거나 혹은 보이지 않는 신분제도에 묶여 살아간다. 그건 그 사람이 원한다거나 원치 않는다는 거나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만들어진다. 드물게 그 단단한 영역이 허물어지기도 하지만, 소수에게 극한 될 뿐 다수가 누리는 보편적 영역으로 확대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소수를 위한 골품제도는 신라를 존속시켜 주는 신분제도가 되었다. 지금처럼 말이다.
이미 오래전에 존재했었던 신분제도까지 거론하며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아파트다. 대다수가 그런 건 아니지만 사람들은 그 사람이 어디에 사는지 궁금해하고, 그 사람이 사는 동네나 거주단지에 따라 그 사람의 어떤 사람인지를 섣부르게 판단한다.
한국 사람들은 유난히 아파트를 좋아한다. 그렇다 보니 여기저기 삐쭉삐쭉 신도시며 웬만한 읍만 가더라도 전국 어디서나 아파트를 볼 수가 있다. 근데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중요해진다. 아파트도 같은 아파트가 아니다. 같은 아파트로 도매급으로 묶이는 것도 싫어해서 건설사마다 브랜드아파트를 만들어 내다 보니, 전국에는 도시마다 대장아파트라는 게 생겨났다. 아파트계의 골품제도가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다. 이런 생태계는 누군가 조성했다기보다 자본주의 특성과 한국사람들의 편향된 아파트주거문화에서 유래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무엇이건 간에 도시마다 존재하는 대장아파트와 그를 따르는 그 외 다수의 아파트에는 묘한 신분제도 같은 위화감이 만들어진다.
내가 사는 동네 역시 대장아파트가 있고 그 외 다수의 아파트가 그 주변을 감싸고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사람 사는 데가 별 차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그 별차이가 대한 감각은 골품제도처럼 큰 차이로 벌어지게 된다. 싫든 좋든 기호에 상관없다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은 여전히 많은 분야에서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신분제도를 만들어 낸다. 그게 법이나 문화로 규제가 가능한 거였다면, 사람 사는 세상은 누구 말대로 살만한 세상이었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유구한 역사를 만들어낸 수많은 왕권과 문명만 보더라도 단 한 번이라도 신분제도가 존재하지 않았던 역사는 없다. 어찌 보면 그게 사람의 본성 인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신도시나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들어선 곳에는 한편에 임대아파트가 있다. 임대아파트에 붙어있는 상가나 편의점에는 언제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술 취한 사람들의 실랑이가 들여온다.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하며 집으로 귀가하는 성실한 아빠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행색을 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늘 자기가 왜 여기서 술을 먹는지에 대해서, 먹을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를 하며 술을 먹는다. 어느 날은 허공을 향해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어느 날은 자기와 비슷한 행색을 한 이들과 두세 명 둘러앉아 같은 사람으로 보지 말라고 소리를 지른다. 그때부터 술자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고성으로 채워진다. 모든 임대아파트가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삶에 끝자리로 밀려난 이들이 아웅다웅 모여사는 그곳에 웃음꽃은 피어나지 않는다. 그냥 늘 소음과 냄새만 자욱하게 퍼져있다.(물론 이건 보편적이지 않은 이야기다.)
몇 블록 떨어져 닿아있는 대장아파트 주변 상가에서는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몸에 베인 여유와 느긋함, 가까운 편의점을 가더라도 단정함이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들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거기엔 숨겨진 가식도 있겠지만, 그냥 경제적인 여유가 만들어주는 편안함이 있다. 그런 것들은 묘하게 사람 감정을 어긋나게 만든다. 꽈배기처럼 뒤틀린 감정들이 꿈틀거린다.
아마도 이런 생태계는 자연스레 흙수저와 금수저로 이어졌는지도 모른다. 흙수저 그 말은 부모의 경제적 능력을 지칭하는 말일 수 또 있다. 말 그대로 수저는 밥을 떠먹는 도구이다. 국이나 밥을 수저에 얹어 입으로 나르는 아주 유용한 도구여서 특히나 뜨거운 국물이나 수프를 떠먹을 때 없으면 안 된다.
사회적 구분으로만 본다면 나 역시 그 흙수저라는 구분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다. 아버지 세대는 우리 세대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더 지독한 흙수저였다. 흙수저라도 같은 흙수저로 묶일 수가 없다. 어찌 보면 끼니를 거르지 않고 먹을 수 있느냐를 기준으로 흙수저를 구분 짓기에는 현시대는 너무 풍족한 시대인지 모른다. 접시를 닦거나 택배회사 박스를 나르거나, 시간당 최저시급이 만원이 넘어가다 보니 몇 시간만 일을 해도 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고도 생활이 가능하다. 시대를 잘 타고 태어난 세대들이라 이런 행복이 행복인 줄 모른다. 그래서일까 세대별로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은 다를 수밖에 없다.
대장아파트가 행복의 필수 조건이 될 수는 없다. 적게는 영향을 미칠 수는 있겠지만 막상 살아보면 사는 곳은 어느 곳이든 별 차이가 없다. 굳이 잠자고 고작해야 아침밥 정도를 먹는 곳이 아방궁처럼 웅장하고 화려한 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실용적인 면에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성골이 되기 위해, 대장아파트에 살기 위해, 올인을 한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언제나 계급적 친밀감이 생겨난다. 자연스러운 운 위계와 질서가 조용히 그들 사이의 거리를 적절하게 배치해 준다.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그 적절함은 스스로 만들어낸 슬픔과 도달할 수 없는 거리감, 딱 그 정도의 감정임을 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