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중입니다.

몰입의 세계가 주는 즐거움

by 둥이

부재중입니다."


"몸과 마음과 정신이 살아 있는 아이와 시인 성자와 운동선수들에게 시간이란 늘 지금을 뜻한다. 그들은 영원히 지금을 사랑한다. 격렬하게 헌신적으로 지금 이 순간 속으로 뛰어든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곳은 바로 여기이며 가장 중요한 시간은 바로 지금이며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앞에 있는 사람이다"


달리기와 존재하기 - (Running & Being)

조지쉬언 지음


엄마는 연속극을 좋아한다.

어느 요일에 좋아하는 연속극이 나오는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정작 오늘이 일요일인 것은 엄마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날 저녁 8시에 방영되는 첫사랑 주말드라마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래서일까 그날만큼은 저녁도 서둘러 먹고 설거지도 일찍 끝내고 안방 텔레비전 앞에 영혼이 분리되어 연속극을 보곤 했다.


엄마가 이런 집중력을 보여주는 건 흔치 않은 일이어서, 마늘밭을 매거나, 김치를 담글 때 멸치 액젓 몇 스푼에 고춧가루를 몇 바가지 넣느냐를 계량을 하지 않고도 손대중으로 넣을 때나, 설거지를 하면서 대야에 넘쳐나는 수돗물을 불 멍하듯이 바라볼 때나, 엄마의 이런 몰입은 이해할 수 없는 타이밍에 나온다는 게 문제라는 걸 빼면, 이상할리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엄마는 지금도 드라마를 볼 때마다, 정신이 나간 상태가 된다. 정확히는 그 자리에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 진 인 셈이 된다. 한마디로 엄마는 부재중인 상태가 된다.


엄마는 그 외에 모든 것들은 대체로 관대했거나 관심이 없었다. 연속극을 볼 때나 마늘밭에서는 절대 중요한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걸, 귀찮을 때면 귀먹은 척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번 경험을 통해 알게 된다.


아이들은 놀기를 좋아한다.

우리 아이들은 며칠 후면 열세 살이 된다. 열두 살 남자아이들은 특히나 좋아하는 게 확연하게 드러나는 나이다. 그땐 하루 종일 놀아도 부족하다. 시간의 흐름을 잃어버린다. 자주 그들만의 시간으로 빠져든다. 아내와 나는 (그런 줄 알면서도 아이들을 앞에 앉혀놓고) 아이들과 대화를 나눈다. 아주 잠깐 눈을 마주치지만, 이야기를 나누는 대부분의 시간에 아이는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아이들의 관심은 밖으로 나가버린 상태다. 아이들이 자리에 앉아있어도, 아이들이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아이들은 지금 여기에 없다.

부재중인 상태가 되어 버린다.


아내는 쇼핑을 좋아한다.

나는 아내가 좋아하는 쇼핑을 따라다니며 아내가 묻는 질문에 (타이밍이 늦지 않게 그러면서도 진지하게) 답변을 해준다.


한 손엔 핸드폰을 들고 회사 단톡방에 톡을 올리고 가끔 걸려오는 전화도 받아 가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 시간이 싫지 않은 건 딱히 그렇다고 다른 일을 한다거나 술친구를 불러내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더 재미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정확히는 쇼핑 내내 다른 생각을 좇는 경우가 많겠지만 말이다.


있어야 할 그 자리에 내가 있기는 하지만, 정작 그곳엔 내가 없다. 정확히는 몸과 영혼이 분리된 체, 구천을 떠도는 처녀귀신처럼,


내 영혼은 부재중이다. 아마 어제저녁 읽다 만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다음 부분이 궁금해서 리스본을 검색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며칠 전 진단받은 심장 관상동맥 1번 혈관 걱정을 하면서 오지도 않은 심장발작 걱정을 미리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쨌든 영혼은 자주 시키지도 않았는데 집을 비운다.


그렇게 부재중인 상태가 된다.



나는 책 읽기를 좋아한다.


특히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을 읽는다거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나 폴 오스터의 소설을 읽을 때) 누군가 추천해 준 시집을 읽을 때면, 나는 책 속으로 빠져든다. 아내가 묻는 질문에 대답은 하지만, 이미 영혼은 집을 나간 상태가 된다.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몰입의 세계가 있다. 누구에게는 책 읽기가 될 수도 있고, 등산이나 달리기가 될 수도 있고, 그림 그리기나 음악이 될 수도 있다.


내 이름은 빨강을 지은 오르한 파무크는 먼 산의 기억이라는 에세이집에서 책 읽기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가 책을 사랑하는 이유는 세상을 떠올리기 때문이 아니라 잊게 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이런 게 필요하다.

우리의 영혼은 가끔씩 혹은 자주

그렇게 부재중 이어야 한다.

그래야 살 수가 있다.




<행방불명의 시간>- 이 바라기 노리코 지음


인간에게는

행방불명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속삭이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삼십 분도 좋고 한 시간도 좋고

멍하니 혼자

외따로 떨어져


선잠을 자든

몽상에 빠지든

발칙한 짓을 하든


​전설 속 사무도 할머니*처럼

너무 긴 행방불명은 곤란하겠지만


​문득 자기 존재를 감쪽같이 지우는 시간은 필요합니다


​언제 어디서 무얼 하는지

그날그날 알리바이를 만들 필요도 없는데

길을 걸을 때나

버스나 전철 안에서도

전화벨이 울리면

곧장 휴대전화를 쥡니다


"빨리 와"나 "지금 어디야?"

응답하기 위해

조난당했을 때 구조될 확률은 높아지겠지만

배터리가 나가거나 통화권 밖이라면

절망은 더 깊어지겠지요


차라리 셔츠 한 장 휘두르는 게 낫지

저는 집에 있어도

종종 행방불명이 됩니다


초인종이 울려도 나가지 않습니다

전화벨이 울려도 받지 않습니다


지금은 여기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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