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색 기억

푸름에 대하여

by 둥이

파란색 기억

- 푸름에 대하여


"예전부터 나는 눈에 보이는 것의 가장 먼 가장자리에 있는 푸름에 마음이 움직였다. 지평선의 색 먼 산맥의 색 무엇이 되었든 멀이 있는 것의 색인 푸름에 그렇게 먼 곳의 그 색은 감정의 색이고 고독의 색이자 욕망의 색이고 이곳에서 바라본 저곳의 색이고 내가 있지 않은 장소의 색이다."

<길 잃기 안내서 - 2장 먼 곳의 푸름 >

레베카 솔닛 지음


기억에도 색깔이 있다면 그건 분명 파란색일 거라 생각이 들었다.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 있는 모든 것들은 파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파란 하늘과 푸른 먼 산과 하늘과 맞닿아 있는 파란 바다 수평선처럼. 까마득히 먼 곳에 떨어져 있는 기억들은 늘 푸른 입자로 색 입혀져 우리에게 찾아온다. 기억에도 색깔이 있다면 그건 푸른색일 것이다. 만약 파란색이 아니라면 무채색 그래, 파란색이 아닐 바에야 무채색이 더 어울린다. 기억은 스스로 풍화되어 색을 지우고 또 어떤 기억은 색을 덧입혀 채색되어 간다.


기억은 언제나 파란색 옷을 입고 우리에게 찾아온다. 먼 산에 기억처럼. 지워지지 않는 모든 입자들은 파란 염료 가루를 뒤집어쓴 채 낯선 어딘가를 유빙 한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소설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파란색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어떤 단어는 지나간 어느 시간을 통째로 나에게 데려온다. 마치 순간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파란 기억들은 생생히 살아 움직인다. 거기에는 파란색 지붕과 파란색 대문, 그것들이 만들어 내는 독특한 화음, 아름다운 멜로디가 거기에 있었다. 난 순식간에 그 음악에 도취되어 마치 파란색 지붕 아래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파란색 지붕 아래에서는 늘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외부의 소리가 안으로 차단되지 않는 방음시설이라고는 전혀 갖추어지지 않는 아버지의 집,


그곳에 파란 대문과 파란 지붕이 있었다; 기억은 색으로 채색되어 풍화되지 않는다. 선사의 추녀 소리만 귓가에 남듯이. 파란색 기억은 알 수 없는, 그러니까 중요하지도 않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단편의 기억들을 오랫동안 붙들고 있다. 그런 기억들은 고작해야 지붕의 색깔과 대문의 색깔 그리고 옆집 담벼락에 적혀 있던 낙서들. 그 시절 정말 중요했다고 생각되던 기억들은 모두 지워진 체, 누구를 만났는지, 만났던 그 아이의 이름이 무엇인지 생각나지 않는다. 기억은 쓸모없고 사소한 작은 것들을 색을 입혀 기억 주머니에 저장한다.


마치 봄이 오면 단단한 흙을 뚫고 새싹이 돋아 날 거란 걸 알았다는 듯이,


파란 기억들은 돋아날 씨앗을 품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기다렸다는 듯이 바람 불고 햇볕 좋은 어느 날 파란 기억은 반가운 손님처럼 찾아올 것이다. 원래부터 거기에 없었다는 듯이,


어느 가을 도토리를 주워 모으는 다람쥐처럼, 여러 곳에 파묻어 놓은 도토리가 어느새 우람한 나무로 자라듯이, 나도 모르던 나의 기억들은 어느 날 파란 기억으로 다시 찾아온다.


왜 기억은 중요하지도 않은 파란색을 기억하고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하는 일은 알 수가 없다. 그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많이 이상한 일이지만 내가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영역이어서, 번개처럼 찾아오는 파란 기억을 반갑게 맞이하는 수밖에 없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건 파란색 대문이었다. 파란색 대문은 군데군데 빨갛게 녹이 슬어 페인트가 벗겨져 있었다. 대문을 열 때마다 파란색 대문은 쇳소리를 내며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오른쪽 대문 위에는 우편함이 붙어 있었다. 우편함에는 거미줄이 붙어있는 오래된 고지서가 들어 있었다. 아무도 꺼내보지 않은 편지봉투가 일 년이 넘도록 꽂혀 있었다. 파란색 대문은 더 이상 대문으로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낡았지만 아버지는 고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저녁이 되면 빗자루와 막대기를 대문에 걸쳐 두기만 했다. 아버지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파란색 대문을 열고 마당 안으로 들어서면 파란색 스렛트 지붕이 보였다. 지붕의 반은 스렛트였고 반은 양은 지붕이었다. 군데군데 색칠을 안 한 스렛트도 있었다. 왜 지붕 덮개를 두 종류로 했는지 모르지만, 그런대로 더위와 추위를 잘 막아주었다. 아버지는 산에서 베어 온 나무와 하얀 벽돌로 집을 지었다. 집을 짓는데 필요한 자재가 많이 부족했다는 건, 완성된 집의 형태가 말해 주고 있었다.


나뭇결대로 휘어진 가래와 고물상에서 얻어온 스렛트와 벽돌들


그런데도 아버지가 지은 집은 꽤 쓸만해서 동네 사람들은 아버지의 손재주를 칭찬했다.


가을이면 집 뒤쪽으로 심어진 밤나무에서 새벽이슬을 맞고 떨어진 밤알들이 지붕 위로 떨어졌다. 스레트지붕과 양은 지붕은 속이 빈 커다란 북처럼 들으면 중독성 있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소나기라도 오는 날에는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가 듣기 좋았다. 두 종류의 지붕은 서로 다른 음색을 만들어 냈다. 지붕의 특성대로 양은 지붕은 날카롭고 높은 소프라노 음색으로, 스렛트 지붕은 저음의 부드러운 알토 음색으로, 방안에 누워 있으면 아름다운 화음이 들려오곤 했다. 마치 오래 기간 함께 연습한 합창단처럼, 귀에 와닿는 소리는 부드럽고 달콤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기분이 좋아졌고, 그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곤 했다.


방안과 지붕은 고작 얇은 베니어판 몇 장으로 막혀있어서(가난은 때론 이런 호사를 누리게도 해주었다) 지붕 위에 떨어지는 모든 소리가 그대로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마치 물속으로 퍼져나가는 파장처럼, 낙엽 떨어지는 소리와 풀벌레 소리와 밤알 구르는 소리가 순서대로 질서 없이 들려왔다. 모든 소리가 원형 그대로 살아 움직였다.


밤을 줍거나 지붕을 수리하러 파란색 지붕 위로 올라가는 날에는 못이 박혀있는 곳을 찾아서 조심히 걸어 다녔다.


파란색 지붕 위에는 가을 햇볕에 펼쳐놓은 빨간 고추와 무말랭이가 널려 있었다.


지금도 정비되지 않은 골목 안 주택들은 파란색 지붕을 가끔 볼 수가 있다.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동네 길을 산책하다가 우연히 보게 된 파란색 대문 앞에서 사진을 찍는 날도 있었다.


지금도 난 파란 하늘을 보면 감동을 받는다. 눈부신 푸른 하늘이 품고 있는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 늘 신비로웠다.


그곳은 마법으로 물든 공간 같았다.


닿을 수 없는 그 어딘가에는 늘 파란색이 있었다. 가끔 찾아오는 파란색 기억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난 그 시간이 더없이 좋다.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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