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영미

여자친구

by 둥이

영미가 들려준 이야기만으로 글을 써보려던 생각은 욕심이었나 보다 볼 때마다 영미가 이야기했던 사는 이야기는 드라마 몇 편 불량의 아니 시리즈물로 엮어 놓아도 될 성싶은 굴곡 많은 이야기들 이였다 다음엔 꼭 육성을 녹음하리라 다짐을 했는데도 어제 집에 도착하고서야 아차 생각이 났다

내 친구 영미는 영미라는 이름을 가진 보석 같은 정이 많은 아이다


짧은 단발머리

두 갈래로 따기도 하고 그냥 단발로 있기도 했다

후드티와 청바지 하얀 운동화 ᆢ

그리고 작은 얼굴에 모여 있는 눈코입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섞여 있어도 영미는 귀엽고 예뻤다 그렇게 예쁜 영미는 인기가 많았다 많은 아이들이 좋아라 쫓아다녔고 감정을 어쩌지 못하는 선우는 며칠을 앓아눕기까지 했다


우리는 같은 반이 된 적이 없는데도 친한 친구가 되었다 영미를 좋아하는 선우나 은석이의 친구였던 탓도 있으리라 어디로 튈지 모를 감정들로 서로들 아파하고 노래하고 지저귀던 그 시절 ᆢ



"굵은 소나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학교 정문으로 달려 나가던 마치 클래식의 한 장먼처럼 겉옷을 우산 삼아 젖어 들어오는 빗줄기를 피부로 느꼈던 비내음을 그토록 진하게 들이마신 기억은 그 이후엔 없었던 듯하다 폐부 깊숙이 들여 박힌 비 비린내와 속옷까지 젖어 들어간 빗물의 감촉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학교 정문에서 자취방 까지는 걸어서 이십여분 거리였는데 쏟아지는 빗물을 정수리로 맞으며 기찻길로 돌아 돌아 집으로 갔었다 지금도 후드득 떨어지는 빗물을 보고 있노라면 그 시절 빗속을 강아지처럼 뛰어다녔던 우리의 젊음이 해맑게 손짓하는 것 같다 한번 더 뛰어보라고 속싹 이는 듯하다 "


추운 겨울로 향하던 11월 말쯤 이였을까 정확히는 기억이 나진 않지만 그 당시 석계역에 줄비하게 늘어선 포장마차집 ᆢ영미와 나는 지금도 잘 먹지 못하는 닭똥집을 시켜놓고 야식이었던가 저녁 이었던가 시원한 어묵국물에 국수 한 그릇을 시킨 영미와 땅똥집을 시켜 꾸역꾸역 먹었던 나는 사는 얘기 살 얘기 친구 얘기 날씨 얘기등으로 속을 달랬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닭똥집을 즐겨 먹지 못하는 이유는 심하게 토하고 난 후 며칠을 앓았었다 닭똥집의 애매한 식감과 매퀘한 냄새는 지금도 나를 불안케 하지만 그 시절 석계역의 풍경을 불러오게 한다


십 대의 기억은 그렇게 우리의 기저 속에 세포처럼 살아있었고 이후 이삼십 대 중년이 된 지금까지도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늙어가고 있었다


첫 번째 면회를 찾아와 준 친구들 ᆢ그 당시 친구들 중에서도 군대를 빨리 갔었던 내게 주어진 특혜 아니었을까 영미와 태경이 형로 선우 두일이 몰려다녔던 친구들은 강원도 어느 여관방에서 밤새 이야기하며 웃으며 노래방과 당구장으로 그 당시 즐길 수 있었던 일탈을 누리게 해 주었다


" 나 상수랑 사귄다 "


내가 상병쯤 되었을까! 남자 친구가 생겼다며 들뜬 목소리로 연락을 나누었고 군제대 후 복학 하던 해에 둘은 고등학교 동창들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다 야외 어디쯤에서 에선가 찍었던 웨딩사진 속 우리들을 볼 때면 마냥 좋았었던 시절의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 병원 다녀왔어 , 나 나쁜 병에 걸린 것 같아 "


운전 중에 받았던 영미의 전화 한 통은 그렇게 불현듯 찾아왔었고 가깝게 지내던 부성이의 폐암 투병을 옆에서 지켜봐 왔던 영미 자신에게도 피하고 싶은 고통 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겪어 보지 않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암이라는 진단 앞에 먼저 무너지는 것은 육체보다는 정신이라고 한다 부정하고 싶을 것이고 피하고 싶을 것이고 내가 믿는 신이란 분께 화풀이도 했을 것이다 항암은 평범한 일상을 특별함으로 만들어 놓는다 항암은 당연한 일상을, 누구나의 보편을, 쟁취해야만 하는 특별함으로 만든다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영미 스스로도 투병생활은 참기 힘든 고통 이었을 것이다

신의 보살핌 이었을까

간절함 이였을까

한 움큼씩 빠져나가는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엉엉 울었을까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심한 구토와 어지러으로 견디기 힘든 나날을 보내면서

삶의 질은 떨어질 대로 떨어졌을 거라

그 당시 영미네는 필리핀으로 기반을 옮겨 생활해오고 있던 터라 여간 힘들지 않았으리라 생각해 본다 그런 영미를 부여잡은 힘은 무엇일까 영미는 그 당시 간절하게 기도했다고 한다 상우 뒷바라지 할 정도까지만이라도 허락해달라고 ᆢ

본인이 겪어야 할 고통보다도 그 당시 한꺼번에 찾아온 아버지의 부음과 어머니의 치매 ᆢ

환자의 몸으로 부모의 부모 역할을 해가며 병마와 싸워가며 한가정의 엄마로 아내로 부모의 부모로 본인이 지켜야 되는 자리를 비우지 않고 최선을 다한 영미는 지나간 시간을 가끔 웃으며 이야기한다 마치 내일이 아닌 것처럼ᆢᆢ 들어보라고 이런 사람도 있었더라면서 그렇게 3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이야기한다

영미는 버텨낸 것이다

버텨야 마음아 소리 질렀을 것이다


소설가이자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성인으로 뽑히는 파스칼 브뤼크네르는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기다리며란 책에서 죽음과 영원, 질병과 부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

질병은 우리를 후려치고 각성시키고 자신의 정체성을 갖게 하고 어떤 질서에 편입시킨다 신으로의 귀가를 서두르는 사람도 있고 ᆢ죄가 구원의 첫 번째 조건임을 인정하게 된다 "


"아내는 남편 안에 남편은 아내 안에 있다 부부는 나뿌뿌리처럼 얽히고설켜 두 개의 얼굴 두 개의 이름을 지닌 한 사람이 된다 그래서 이사라믜 고통이 저 사람의 고통이 된다 ᆢ아내에 다리에 통증이 생기면 내가 아프다"


" 모든 사람은 두 번 죽는다 영혼이 육신을 떠날 때 처음으로 죽고 그를 기억하는 마지막 사람이 죽을 때 다시 죽는다 모두가 소중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같은 속도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어떤 이는 당신의 장례식에서 제일 서럽게 울었지만 가장 먼저 당신을 기억해서 지울 것이고 또 어떤 이는 두고두고 당신을 그리워할 것이다"


시가댁 이야기야 모든 며느리들이 풀어놓고 이야기하자면 끝이 없는 이야기라 각설하지 않기로 한다 영미가 들려주는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우선은 넑나간 사람처럼 귀 기울이게 되고 다음은 아픔의 공감이며 다음은 사람뒤에 사람이 있다고 말한 토지 소설책의 용이의 대사이다



박경리작가는 토지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산다는 것은 아름답다 그리고 애잔하다 바람에 들어 눕는 풀잎이며 눈 실린 나뭇가지에 홀로 앉아 우짖는 작은 새 억조창생 생명 있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과 애잔함이 충만된 이 엄청난 공간에 대한 인식과 그것에 일사불란한 법칙 앞에서 나는 비로소 털고 일어섰다 찰나 같은 내 시간이 소중함을 느꼈던 것이다" (1973년 6월 3일 밤)


영미는 들꽃향이 난다

영미는 꺾여지지 않는 바람에 휘 휘 몸을 맡기는, 그럴수록 더 진한 향으로 주변을 모으는 들꽃이었으리라 나에겐 없는 그런 아름다운 향기를 가진 영미가 좋다 오랫동안 내 곁에 있어 주었고 앞으로도 우리들과 더불어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영미네 부부와 점심식사를 한다

좋은 이들과 함께 나누는 한 끼 식사는 우리에게 죽어가는 세포를 새롭게 살아나게 해주는 효험력 좋은 만병통치약 아닐까

나에겐 네가

너에겐 내가

그렇게 죽어가는 세포를 살아나게 해주는

단짝 친구이리라 ᆢ

관뚜껑에 못 박히는 날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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