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가 진짜 나빠서 그랬다고 생각해요?

생존경쟁에서 승리가 남긴 것

by yeon natu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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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의 오랜만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가 작년 개봉했다. 영화 제목이 많은 커뮤니티에서 밈으로 소비되며 내용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감독의 오랜 숙원사업이 세상에 나왔다는 점과 이병헌 배우의 연기 변신을 볼 수 있다는 점이 바이럴 포인트로 내세워졌으나 기대가 컸던 만큼 대중들의 혹평도 컸다. 그 찝찝한 공감과 불쾌함 일색인 반응들을 나름대로 짚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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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의 범행 동기


만수는 제지맨으로서의 삶이 꽤 행복했다. 제지맨은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커다란 기반이자 동력이었다. 종이를 만질때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감각과 새로운 제품으로 탄생해 제 역할을 해내는 종이를 보는 것이 그렇게 뿌듯할 수 없었다. 이 때까지의 만수는 업으로서 자아실현을 이루며 과정과 결과도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라진 그 일자리로부터 모든 일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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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1차적 욕구, 인간성의 붕괴


생존이라는 결과만 남고 동기나 과정의 정당성, 윤리성은 다 사라져버렸다. 가장 기본적으로 충족되어야 할, 바꿔말하면 충족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는 이 생존의 욕구가 무너지면서 만수의 삶은 생존만이 유일한 목적으로 남아버렸다. 이제, 생존 뿐이다. 살아만 있다면 뭐든 중요하지 않아졌다. 그러나 생존만 한다면 그가 인간으로서, 이만수로서 존재하는 이유는 모두 잃어버려도 정말 괜찮은 걸까?

그런데, 이것이 모두 만수 개인의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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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윤리=생존전략 으로 만드는 사회 시스템


회사도 생존경쟁. 비용효율화를 위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물건하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래 일해온 인곤비 비싼 직원 여럿을 해고해야 살아남는다. 사양산업에 들어선 제지산업이라는 설정은 변화하는 산업 환경의 불안정성을 극대화해 보여준다. 원작 더 액스의 출간 년도는 1997년으로 지금으로부터 약 20여년 전이지만 그때부터 도래하기 시작하던 전자화, 자동화로 인한 일자리 부족과 노동 소외를 주인공의 직업으로서 드러낸다.


2026년 현재 그 불안은 현실화되었다. 영화에서만큼 극단적일지는 모르겠으나 비대면 배송서비스를 위한 박스, 위생용지만 안정적인 수요를 보이고 있으며 일반 인쇄용지는 소수를 위한 아날로그, 럭셔리가 되었다. 일자리는 당연히 그만큼 줄었기에 만수가 맡게된 로봇 감시직이 씁쓸한 사실이라 볼 수 있겠다. 그런 상황에서 만수는 해고대상자중 하나였을 뿐이다. 회사는 의도하지 않았으나 범죄 동기를 마련했고, 손대지 않고 생존자를 가려낼 수 있었다. 필요한 사람을 채용할 뿐, 생존권 경쟁은 구직자들의 몫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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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의 면접장을 웃으며 지키고 있던 사람들도 언젠가는 생존 전쟁에 뛰어들어야 할 것이다. 당장이 아닐 뿐, 내가 아닐 뿐이라는 생각으로 면접장에 앉아 신랄한 비교와 거절의 역할을 행하지만 잔혹한 의자 뺏기 게임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웃지 못할 서늘함


만수의 상황은 꽤 현실적이다. 힘들게 내집마련의 꿈을 이루고 소중한 아내와 자식이 있는 가장에게 갑작스러운 해고라니. 인간성을 저버리고 행한 경쟁자 살인극에 냉소적인 웃음보다 찝찝함과 불쾌감이 더 짙게 남는다.


원하던 것을 모두 지켜낸 것은 맞을까? 피해자의 시신이 묻힌 마당, 살인행각을 어느정도 눈치챈 가족들의 표정, 게다가 전문성도 크게 필요치 않을 로봇 감시직이라는 결과에 무력감이 든다. 그게 영화를 보는 내가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면 좋을 텐데.





[Epi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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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는 회상한다. 자신이 이 집을 어떻게 지켜냈던가. 제지맨으로서의 업은 또 어땠나.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을 먹여살릴 월급으로 꾸려가는 이 생활. 다시금 궤도에 안착해 이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큰 안도를 느낀다. 그때 그 일을 후회한들 무슨 의미가 있지? 눈앞에 보이는 사랑스러운 아내와 아이들이 어쩐지 예전과는 다른 눈빛으로 나를 보는 것 같지만, 회사에서 그놈의 업무 효율 보고서를 써내는건 머리가 아프지만 지금 이렇게 살아있지 않나?

어쩐지 한참전에 뽑아버린, 빈 어금니 자리가 조금 아파오는 것도 같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마시는 이 커피만 실체 없는 치통을 달래준다.

아, 따뜻하다. 오늘 저녁은 뭘 먹으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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