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세계무용축제 2025
호흡의 오르내림, 관계의 확장
케이팝의 인기가 커다랗게 피어오르고, 더이상 매니악한 장르가 아닌 대중문화의 주요한 줄기로 자리잡게 된 요즘이 여전히 낯설지만 반갑다. 케이팝이 하나의 장르로 인정받고 해외 셀럽들이 아이돌 그룹의 모든 멤버 이름과 노래가사, 안무를 외워 콘텐츠를 만들고 자연스럽게 양산으로 이어지는 흐름. 문화의 출발점이라는 그런 생각 때문인지, 괜스레 마주하는 공연마다 한국성을 찾아 언급하고 싶은 마음이 들곤 한다. <Romance, Mirror>공연은 그런 시선을 좇아보기에 적합했던 것이, 헝가리의 전통성이 묻어난 공연과 한국 무용단에서 안무를 맡은 공연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용과의 익숙한 연결고리는 유년기부터 시작되었다. 근처의 국악원으로 매주, 몇년 간 공연을 보러다니면서 한국무용의 웬만한 레퍼토리를 알게 되었다. 평화를 기원하는 태평무, 무예를 아름답게 표현한 검무, 혼을 달래는 살풀이 등. 어떤 가락에는 어떤 동작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정도로 춤사위들을 많이 보았던 것 같다. 장르마다 물론 다르겠으나, 음악과 심상에 따라 몸이 흘러간다는 것을 그렇게 매끄럽게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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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시댄스)는 1998년 제13차 유네스코 국제무용협회(CID-UNESCO) 세계총회 서울 유치를 계기로 탄생했다. 지난 27년간 아시아와 유럽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와 중남미 등을 포함한 외국 452개, 국내 611개 단체 및 무용예술가들의 다양한 공연을 선보였다. 외국의 최정상급 단체와 라이징 스타를 한국 관객에게 소개하고 한국의 무용가를 해외에 진출시키는 가교 역할을 하며 국내 최대 규모, 최고 수준의 국제무용 페스티벌로 그 위상을 공고히 하고 있다. 시댄스의 네트워크를 통해 한국무용을 해외에 진출시킨 횟수는 그간 약 90회에 이른다.
시댄스는 매년 가을 서울 시내 주요 공연장 등 곳곳에서 전 세계 최정상급 무용단 및 국내 무용단의 초청공연, 국가 간 합작 프로젝트 및 다양한 부대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관객 호응도 및 축제 컬렉션, 운영 노하우 면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대형 국제 문화예술행사로 평가 받고 있다.
또한, 올해는 새로운 시도들을 통해 무용을 전공자만이 아닌 많은 시민들이 접할 수 있도록 워크숍, 야외공연, 키즈 프로그램 등 다채로운 부대행사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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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nce는 헝가리의 특징이 잘 녹아든 공연이었다. 나를 넘어선 타인과의 연결로 일어나는 모든 감응을 환희와 쾌락의 이미지들로 화려하게 펼쳐냈다. 사랑이 그렇듯 일관적으로만 흘러가지 않는 감정을 콜라주한 느낌이었다.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움직임들은 서로를 얽어매는 동작으로, 또 한껏 멀어져 존재하는 동작으로 이어졌다. 춤곡의 템포가 다양해서 내용을 전개한다는 시선으로 보았을때는 다소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알고보니 느리고 빠름의 대비 또한 헝가리 무용의 특징이라고.
템포, 무드, 동작이 각각의 연결고리는 있으나 전체적인 구성을 보고 이해하기에는 조금 어려웠다. 그 또한 하나의 특성으로 이해한다면 헝가리의 전통적인 무용은 구성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감정의 흐름을 무엇에도 재지 않고 안무의 재량과 영역, 개성으로 풀어갈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큰 임팩트를 남긴 것은 무트발레단과 죄르발레단의 합작 Mirror였다. 거울과 함께 연상되는 반복, 반사 등의 이미지는 있었지만 공연 소개글 어디에도 그 이상의 내용은 없었다. 추상적인 표현이 많겠구나, 싶어 서사가 없다면 오히려 자유롭게 즐길 수 있겠다는 생각에 편안한 마음으로 시작을 맞았던 것 같다.
어두운 심연에서 빛이 한줄기 피어나며 후광과 함께 등장하는 주역. 이내 어둠이 걷히고 삼각의 탄탄한 구도로 자리잡은 무용단이 드러났다. 하나의 신, 또는 하나의 자아를 중심으로 프랙탈처럼 펼쳐진 장면이 압도적이었다. 깊은 곳의 자아를 꺼내볼 시간이라 말하는 듯, 힘을 덜어내고 섬세하게 움직이는 여러 몸들은 너무나 극적이었다.
하나의 진이 허물어지며 분열된 자아로, 페어로, 군상으로 분산되고 결합되는 구성은 장면마다 강한 설득력이 있었다. 치밀한 구성 속에 필요한 장면들로 적절히 짜넣은 완성도, 그에서 비롯한 완벽함, 안정감에 공연을 보는 내내 소름이 돋았다. 자아가 관계로 확장되거나 그와 맞닥뜨리며 일어나는 파동을 이렇게 아름답게 풀어낼 수 있다니, 정말 감탄하며 감상했다.
음악은 자신의 역할을 잘 알았다. 복잡하지 않은 선율에 적당한 박자감으로 무드와 장면이 바뀔 때 트랜지션을 명확하게 해냈다. 조명은 색온도만 조정한 베이직한 셋팅으로 포커스와 명도로 안무의 구성을 돋보이게 했다. 수직의 금속 환봉들이 오르내리며 반짝이고 자연스럽게 장면의 분절과 연결을 만들어낸 점도 매우 영리한 무대 장치였다.
순수무용을 이렇게 몰입하며 감상한 건 처음인 것 같다. 어떠한 한국성을 발견하겠단 다짐은 사실 잊은지 오래였다. 공감할 수 있는 주제, 걸맞는 완성도와 표현력, 퍼포머의 역량이라는 삼박자가 잘 맞는다면 그 누구와도 잘 공명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찼다. 그런 점에서 무용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장르임을, 상당한 감동을 주는 장르임을 깊이 느꼈다. 큰 수확이자 발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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