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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 한바구니 Jul 04. 2023

친구, 그 녀석 이야기

기억함의 기쁨


"띠링!" 


회사 사무실에서 정신없이 일하고 있던 나의 휴대폰에 문자 알림이 왔다. 아무 생각 없이 문자 알림 창을 본 나는 너무 놀랐다. 정말 오랜 세월이 지나 잊고 지내던 그 녀석으로부터 문자가 온 것이다.


군 단위의 시골에서 자란 나는 고등학교 시절 대전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당시 한 소심했던 나는 고등학교 친구들이 많지 않았고 소수의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다. 1학년 때 한 친구의 인도로 조그만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이후 고등학교 신앙 모임에 참석하게 되면서 창우를 알게 되었다. 


그 녀석은 키가 컸고 유달리 다리 근육이 발달해 있었다. 알고 보니 시골에서 중학교까지 육상부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고등학교에서도 단거리와 중거리 달리기를 하면 이 녀석을 추월하는 친구들이 없었고, 이내 고등학교 육상부 선생님의 눈에 띄게 되어 육상부원이 되었다. 이후 이 녀석은 선생님의 특별한 관리하에 중거리 선수로 잘 키워지고 있었다. 


2학년이 되자 한 학생이 전학을 왔다. 누구일까 하고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같은 시골 학교 친구였다. 재룡이는 초등학교 시절에도 키가 컸는데 고등학교에서 만나 보니 키가 훤칠하게 더 커졌다. 아버지가 백작소를 운영하셨는데 그 인근에서 돈이 많은 분으로 알려져 있던 기억이 있다. 이 녀석도 초등학교 시절 달리기를 잘해서 육상 선수를 잠깐 했던 것 같다. 이 녀석을 보고 오는 순간 나는 창우 녀석을 떠 올리게 되었다. 현재 우리 학교에서 달리기로 따졌을 때 창우를 능가할 녀석이 없었다. 그런데 내 기억에는 재룡이도 달리기에 있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인재였다. 물론 시골에서 말이다. 키는 재룡이가 창우보다 좀 더 컸다. 


시간이 흘러 2학년 운동회 날이 되었다. 다양한 경기 종목 속에서 선생님과 학생들이 어우러져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잠시 후 운동회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단거리 100미터 달리기 순서가 되었다. 예상대로 재룡이와 창우는 단거리 육상경기에 출전을 하였고 A 팀에서는 재룡이가, B 팀에서는 창우가 각각 예선 1등을 차지하며 본선에서 만나게 되었다. 창우 녀석이야 워낙 학교에서 유명했기에 당연히 본선에 진출할 것이라 예상이 되었지만, 재룡이가 다른 조에서 1등으로 본선에 진출하게 되자 학교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육상 선생님은 고무적인 표정을 지으면서도 은근히 재룡이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두 친구 모두를 알고 있는 나로서도 예측하기 힘들었기에 본선의 결과가 정말 기다려졌다.  


윽고 6명의 선수들이 출발선 앞으로 다가왔다. 반 친구들은 열렬히 자기네 반 출신 친구들을 응원하기 바빴지만 한 편으로는 두 사람의 대결을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선수들이 잠시 준비 운동을 하며 긴장을 풀고 있었다. 심판이 신호를 하자 곧바로 앉아서 두 팔을 땅에 댄 채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이어서 심판이 신호용 총을 올리고 휘슬을 불자 장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레뒤!..."


친구들이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탕!"


스프링이 튀어 오르듯, 선수들은 순식간에 땅을 박차고 일어서더니 반대편 결승선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출발은 창우가 빨랐다. 우람한 허벅지로 모래를 튕겨내며 초반 선두그룹을 리드하기 시작했다. 관객들은 환호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창우를 연호하는 목소리가 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어? 재룡이가... 재룡이가...!"


그 순간 창우 옆을 바짝 뒤쫓던 재룡이가 피치를 올리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창우를 지나쳐 선두로 나섰다. 긴 다리를 이용해 넓은 보폭을 유지하며 칼 루이스처럼 쭉쭉 치고 나갔다.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사건에 사람들은 할 말을 잃은 듯 숨을 죽이기 시작했다. 약 30미터 정도를 앞두고 창우는 막판 스퍼트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앞서 달리던 재룡이는 슬쩍 뒤를 돌아보더니 창우가 따라오는 모습을 보고는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고, 창우가 가까이 오자 다시 앞서나갔다. 이런 행동을 두어 번 더 하더니 결승전에 다다르자 순간적으로 속도를 내어 1등을 차지했다. 


"와!!!!!"


사람들은 미친 듯이 환호성을 질렀다.  재룡이네 반은 말할 것도 없고 선생님들도 놀란 듯 입을 다물지 못하고 계셨다. 육상부 선생님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웃고 계셨다.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일 정도였다. 


© morzaszum, 출처 Pixabay


경기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재룡이는 압도적으로 창우를 이겨 버렸다. 창우는 고개를 숙인 채 힘겹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고, 재룡이는 여유롭게 웃으며 친구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를 포함해 창우와 친한 친구들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그저 박수만 치면서 창우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창우는 그저 눈의 초점을 잃은 채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학내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우리들의 가을 운동회는 그렇게 끝이 났다. 


그날 저녁 창우와 나, 덕화는 다시 운동장으로 모였다. 창우는 그날 낮에 겪었던 패배의 충격을 잊지 못하는 듯했다. 우리 셋은 한동안 말을 섞지 못한 채 잠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덕화는 은근슬쩍 창우를 쳐다보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창우가 옷을 벗기 시작했다. 우리 둘은 너무 놀라 어안이 벙벙했지만 감히 덩치 큰 친구의 돌발행동을 막을 생각을 못 한 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위아래 겉옷을 벗자 창우는 육상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앉아서 옆에 있던 육상용 신발로 갈아 신었다. 


"나는 뛸 거야!" 창우가 말했다.


"나도 뛸 거야!" 덕화가 말했다. 


"네가 왜?"


"아니, 그냥 뛰고 싶어서."


"못 따라올 텐데."


"상관없어, 그냥 뛰고 싶어서 뛰는 거니까."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창우는 뛰기 시작했고, 놀란 덕화도 얼떨결에 뛰기 시작했다. 나는 뒤로 물러나 둘이 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창우가 전력으로 뛰자 덕화와의 거리를 순식간에 벌리기 시작했고 이내 반 바퀴 이상 차이가 났다. 


"으아!!!!!!!!!!!!!"


창우는 울부짖듯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고 그렇게 한 바퀴를 더 돌고 나더니 그 자리에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천천히 울던 그 녀석은 이내 소리를 높이기 시작했고 곧이어 엉엉 우는소리가 운동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창우 곁으로 간 덕화와 나는 말없이 그저 창우 곁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다음 날, 창우는 육상 선생님을 찾아갔고 곧바로 육상부를 탈퇴하였다. 선생님도 억지로 창우를 말리려 들지 않으셨다. 그 녀석은 책가방에 운동복과 운동화 대신 책을 가득 채우고 학교생활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1년간을 그렇게 책과의 싸움을 끝낸 뒤 녀석은 지방 국립대에 합격을 했다. 


체육 특기생으로 미래를 준비하던 친구는 그날 운동회에서의 패배 후 체육학 대신 회계학을 전공하는 학생이 되었고, 이후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뒤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전도사가 되더니 나중에 목회자로의 삶을 살게 되었다.


직장생활을 한 지 몇 년이 지나 나는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이사를 왔고, 서서히 그 친구의 소식을 잊고 살고 있었다.




"띠링!" 


부산 회사 사무실에서 정신없이 일하고 있던 나의 휴대폰에 문자 알림이 왔다. 아무 생각 없이 문자 알림 창을 본 나는 너무 놀랐다. 정말 오랜 세월이 지나 잊고 지내던 그 녀석으로부터 문자가 온 것이다. 세월이 지났건만 나를 잊지 않고 안부를 물으려고 문자를 주다니. 참 기특한 녀석이었다.

순간 반갑기도 하고 소식이 궁금하기도 하여 얼른 문자 창을 열었다.


'책을 하나 번역했습니다. 클라우드 펀딩에 참여해 주세요.'


"... " 


이십여 년 만에 이 녀석은 본인의 휴대폰 연락처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클라우드 펀딩 모집을 시작한 듯하다. 수신 대상자에 대한 호명 없이 존칭으로 문자를 보낸 것을 보니 안 봐도 비디오다.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오랜만에 친구에게 연락한 문자가 클라우드 펀딩 참여 요청 문자라니.

나는 한 번 웃고 휴대폰을 치워버렸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커피와 함께 창밖의 하늘을 쳐다본다. 

문득 소리를 지르면서 운동장을 전력 질주하던 그 녀석의 얼굴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대학시절 내가 자취하던 집에 잠시 신세를 지러 들어온 후, 쭈욱 눌러앉아버린 그 녀석. 

잘 때 씻지도 않고 신던 양말을 방구석에 처박아 놓은 체 제집처럼 코를 골며 퍼질러 자던 그 녀석. 

얹혀사는 동안 단 한 번도 생활비를 보태준 적도 없던 그 녀석. 


5백 리 위쪽, 그쪽 동네에서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이젠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성실하게 잘 살고 있길 바란다. 

딴 건 바라지도 않는다. 

제발 좀 씻고 살자, 친구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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