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와 사랑을 분리하여 인식하기
냉장고 안에는
엄마가 싸준 음식들로 가득하다.
열무김치, 육개장, 장조림, 호박볶음,
제육볶음, 콩나물무침, 올갱이국,
옥수수, 감자, 양파, 방울토마토까지.
반찬들을 정리하며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다.
어린 시절의 상처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아,
이따금씩 고통스럽게 떠오른다.
하지만 더 이상 과거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다.
음식들을 냉장고에 넣으며,
엄마의 사랑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려 할 뿐이다.
음식들을 단순한 반찬이 아니라,
엄마가 전하는 감정의 표현이라 여긴다.
엄마는 자신의 삶에서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 방식이 서툴러 나에게 상처를 주었을지라도
그것은 의도된 악의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이성적인 판단을 통해
엄마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려 한다.
과거의 상처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현재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
과거의 상처에 얽매여
현재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나를 위한 게 아니니까.
상처와 사랑을 분리하여 인식하고,
그 속에서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나이가 들어 좋은 점은(부모를 포함해 그 누구라도)
그 사람이 나에게 해준 좋은 것 과 나쁜 것을
분리해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기대와 실망이
뱅글뱅글 돌며 함께 추는 왈츠와 닮았다.
기대가 한 발 앞으로 나오면
실망이 한 발 뒤로 물러나고
실망이 오른쪽으로 돌면 기대도 함께 돈다.
기대의 동작이 크면 실망의 동작도 커지고
기대의 스텝이 작으면 실망의 스텝도 작다.
큰 실망을 피하기 위해
조금만 기대하는 것이 안전하겠지만
과연 그 춤이 보기에도 좋을까?
김영하 <단 한 번의 삶>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