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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lehLee Oct 15. 2023

세 개의 매듭

사람들은 다 자기 목구멍에 굵은 밧줄을 걸고 살지. 이 밧줄은 중간 중간 매듭이 져 있어 뺄 수도 삼킬 수도 없어. 이것이 목에 딱 걸려가지고 넘어가지도, 빠지지도 않는 거야. 밥을 먹을 때나 숨을 쉴 때마다 이것이 걸려 죽을 맛인데, 어찌할 도리가 없어. 매듭이 하나도 아니야. 서너 개의 매듭이 줄줄이 엮인 것을 목구멍에 넣고 살아야 하는 게 우리 삶인 거지. 사람들은 삶이 무언가를 이루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 목구멍에 걸린 매듭을 하나씩 풀어가는 게 삶인 거야. 그래서 모든 매듭이 다 풀리고 목에 걸린 밧줄을 뽑아버리는 것, 그렇게 묶인 것을 풀어가는 여정이 삶인 거지. 어떤 사람은 다 풀어버리고 훌쩍 날아가기도 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을 목에 건 채 가쁜 숨 속으로 스러지기도 하지.   

나는 죽었어. 나는 겨우 세 살 넘기지 못했지. 나는 살고 싶었어. 나는 도마 위에서 아직도 꿈틀대고 있는 개구리의 살점을 날름 집어먹었을 만큼 살고 싶었어. 하지만 햇살이 고드름을 녹이던 그 이른 봄날 오후는 내게 너무 긴 시간이었어. 그렇게 나는 삼 년도 넘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지. 한국전쟁 중이었거든. 논밭은 폭격을 맞았고, 마을에는 집 담벼락에 총알 구멍 한 두 개 없는 집이 없었어. 먹을 것이라고는 내 가진 손가락 밖에 없는 때였지. 나는 날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울다가 지쳐 결국 눈을 감아야 했지. 나는 차라리 그게 나았어. 죽는 순간만큼은 배고프지 않았거든.   

그렇게 나는 죽었지만 내 흔적은 어디에도 없어. 그래서 나는 내가 언제 태어나서 어떻게 죽었는지 몰라. 나는 내 이름조차 몰라. 엄마와 아버지는 전쟁 중이라 내 이름을 호적에 올릴 여유가 없었지. 우리만 그랬던 건 아니야. 마을이 다 그랬고, 나라가 다 그랬지. 옆집 아무개가 죽었다는 건 크게 슬퍼할 일도 아니었어. 혀 한 번 끌끌 차면 끝나는 일이었지. 

나는 죽었어. 하지만 엄마에게는 밧줄의 매듭이 하나 풀린 거야. 아직도 엄마의 목구멍 깊숙이 굵은 매듭이 줄줄이 달려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하나의 매듭은 풀렸지. 풀린 매듭이 엄마의 목에서 가슴으로 내려갔는지 나는 모르겠어. 엄마는 살아 있는 동안 한 번도 내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 술 취한 아버지의 넋두리 속에 흘러나온 소리 속에 내가 형제 중 하나였었다는 사실을 알 뿐이야. 

한국전쟁이 끝나고 10년 즘 지난 뒤 막내가 태어났지. 그리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우리는 모두 뿔뿔이 헤어져야만 했어. 엄마에게는 먹을 것이 없는 시골에서는 살아갈 길이 보이지 않았던 거야. 그래서 엄마는 돈 벌러 서울로 떠나야만 했어. 하지만 엄마에게는 서울에 온 가족이 누울 방 한 컨 얻을 돈이 없었으니 잠시 떨어져 지내기로 했던 거지. 제일 어린 막내는 강원도로 시집 간 딸에게 당분간 맡겼어. 첫째는 군대로 가고 시골에는 아버지와 셋째가 남았지. 한국전쟁 중 공산당도 갈라놓지 못한 우리 가족을 가난은 그렇게 만들었지. 엄마는 공산당 총부리를 가슴으로 받아보지 않아 그 무서움을 모르지만 가난의 무서움만큼은 뼈저리게 느꼈던 거야. 또다시 자식을 잃지 않겠다는 엄마의 집념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가족은 그렇게 헤어져 살아야 했어. 

엄마의 첫 번째 매듭은 여기서 시작되었어. 셋째에게서 일이 일어난 거야. 아버지는 어딘가에서 술독에 빠져 있었을 거야.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며 지내던 셋째는 옆집 형과 작두를 가지고 놀았지. 옆집 형은 작두를 밟고 셋째는 짚단을 들이밀었는데, 짚단과 함께 손가락 하나가 싹둑 잘려나갔어. 셋째는 비명을 지르며 팔팔 뛰었지. 손가락이 잘린 곳에서는 피가 솟구쳤고, 떨어져 나간 손가락은 지푸라기 속에서 꿈틀거렸어. 멀리 밭에서 일하던 어른들이 달려와 보니 셋째는 얼굴과 머리에 온통 비범벅을 하고 울고 있더래. 마을 사람들이 셋째를 둘러업고 읍내 병원으로 달려갔지. 아이의 잘린 손을 본 의사가 빨리 가서 잘려나간 손가락을 찾아오라더래. 마을 사람들이 헐레벌떡 되돌아와 작두 근처를 찾아보아도 잘려나간 손가락을 없더래. 닭이 물어가 버렸다는 거야. 소식을 들은 엄마는 한걸음에 시골로 달려왔지. 하지만 이미 떨어져 나간 손가락은 돌아올 수 없었지. 엄마는 고놈의 닭새끼 모가지를 비틀고는 푹푹 삶아서 셋째에게 주었어. 퉁퉁 부어오른 손을 감싸고도 닭고기를 허겁지겁 먹어대는 셋째를 보고는 엄마는 부엌으로 가 울었어.  

몇 년 뒤 우리는 서울에 다시 모여 살게 되었지. 청량리 어디쯤 하천 옆이었어. 시궁창 옆이라 냄새가 심했는데, 그보다 더 심한 것은 아버지에게서 나는 똥냄새였어.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들 한쪽에 변소가 있었지. 하천 위에서 나무를 세워 올린 변소라 똥 오줌은 그대로 하천으로 떠내려 가게 되어있었지. 문제는 겨울인데, 똥이 얼고 흐르는 물이 없으니 이것들이 쌓여가는 거지. 봄이 올 즈음이 되면 이것들은 거의 똥구멍을 찌를 정도로 솟아올라 와 있지. 누군가 삽으로 똥을 하천 쪽으로 퍼내야만 하는 상황이 되는 거야.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은 돈을 모아 아버지에게 주었고, 아버지는 기꺼이 바지를 걷었지. 그날부터 일주일, 아니 열흘 정도는 방안에 똥 냄새가 진동을 하게 되지. 똥 냄새와 함께 아버지의 술주정도 시작되었지. 똥 냄새가 사라질 때가 되어서야 아버지는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며 방문을 나서곤 했어.  

그곳으로 군대 갔던 첫째가 돌아왔어. 첫째는 아직 입학하지 않은 어린 막내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어. 어린 막내는 영문을 몰랐지. 집에 돌아온 엄마는 문턱에 주저앉고 말았지. 첫째가 다리병신이 되어 돌아온 거야. 첫째는 군대에서 사고를 쳤는지 당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병신이 되어 돌아온 거야. 첫째는 걸을 수는 있지만 노동력의 절반 이상을 상실한 상태였지. 문제는 첫째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는 거야. 글을 몰랐던 첫째는 군 간부들이 건넨 몇 푼을 손에 쥐고는 아무 데나 도장을 찍어버린 거지. 그때부터 엄마는 육군병원과 군부대, 병무청을 쫓아다니며 국가유공자 신청을 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받아주질 않았어. 유공자가 되어야만 다달이 몇 푼이라도 받을 수 있고, 노동력을 상실한 큰아들의 미래를 극한의 가난으로부터 구해낼 수 있겠는데, 한 번 정해진 행정을 뒤집기에는 엄마의 힘은 너무나 약했지. 더구나 그 상대가 군이라니 말이야. 군인들이 총 들고 서 있는 군부대의 담을 엄마는 도저히 넘을 수가 없었지. 

엄마는 돈을 벌어야 했어. 밀주를 만들어 팔았지. 그때는 집에서 술을 담그는 일은 불법이었어. 당국의 허가 없이 술을 빚는 것은 불법이었지. 나라에 쌀이 모자랄 때였거든. 먹을 쌀도 부족한데, 술을 빚어 마신다고 죄가 되었던 시절이었지. 그래도 엄마는 밀주를 만들었지. 엄마는 먹고살아야 했으니까. 

밀주, 그러니까 막걸리인데, 싸라기를 사다가 시루에 찌는 거야. 찐 쌀에 물과 누룩을 섞어 따뜻한 아랫목에 모셔두지. 하루 정도 지나면서부터 항아리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해. 어느 정도 술이 익으면 광목천 주머니에 담고 주물럭거리면, 술은 빠지고 술지게미만 주머니에 남게 되지. 엄마는 이 술을 커다란 항아리에 담아 몰래 팔았지. 그래서 우리가 사는 방에는 술냄새가 끊이질 않았어. 아버지의 술냄새와 술항아리에서 냄새, 게다가 하천 시궁창 냄새까지 섞여 있었지. 그래도 우리는 나쁘지 않았어. 엄마가 밀주를 팔아서 밥은 먹을 수 있었거든. 

그런데 누가 밀고를 했는지 형사들이 문을 막차고 방안에 들이닥쳤지. 밀주의 증거를 아랫목에 고이 모시고 있었으니 엄마는 변명할 수 없었지. 재판에 넘겨져 8개월 징역형을 받았는데, 징역은 아버지가 살았어. 사법당국은 여자를 감옥에 보낼 수 없었던 거지. 그렇게 아버지는 감옥살이를 했어. 이것이 아버지가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해낸 유일한 일이었지.  

 그 때 즘 1차 오일쇼크가 일어났어. 중동의 산유국들은 이스라엘 편을 든 서방국가에 대한 석유 수출을 중단해 버린 거야. 물가가 껑충껑충 뛰어올랐지. 당연히 집세도 올랐지. 집세를 감당할 수 없었던 엄마는 산동네로 이사를 갔어. 건너편 언덕에서 보면 까만 참게 같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동네였어. 시커멓게 루핑된 천을 지붕으로 썼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지. 그런데 그 집들 모두 무허가 건물들이었어. 구청에서 철거반이 뜨는 날이면 온 동네가 혼비백산이었지. 사람들은 담벼락이 무너지기 전에 깨지는 물건들은 미리 집 밖으로 끄집어 내놔야 했어. 그들은 인정사정이 없었거든. 그들이 큰 망치를 한 번 휘두르기만 하면 브로크 벽은 맥없이 무너져 내렸지. 다리병신 첫째가 악을 쓰며 달려들어봤자 노란 완장찬 철거반의 팔짓 하나에 방앗개비처럼 나뒹굴 뿐이었지. 철거반이 돌아간 후 우리는 겨우 남은 벽 하나를 지지대 삼아 천막을 치고 거기서 잤지. 

철거반이 다녀간 다음날이면 동네 한쪽에 브로크들이 쌓이지. 막내 또래의 조무라기들은 신이 나서 그것들을 날라 번 푼돈으로 아이스깨끼 하나씩 빨고 다녔지. 어른들은 다시 벽을 세우고 루핑 지붕을 올렸어. 동네 사람들은 그 일을 제대로 할 필요도 없었지. 동네 사람들은 몇 달, 아니 몇 주 뒤면 철거반이 와 부숴버릴 것을 아니까 대충 가리고 다시 들어가 살았던 거야. 

1970년대 중반이 넘어가던 때, 강남 땅값이 어마하게 오르고 있다는 소리가 우리 산동네까지 들려왔지. 엄마는 그때 집에서 팥죽을 쑤어 시장에 팔고 있었는데, 밭죽단지 솥단지 할 것 없이 모두 팔아 강남땅을 사야 했어. 엄마가 강남 변두리 참외밭이라도 사 거기다가 천막을 치고 잤더라면 우리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지 몰라. 하지만 같은 서울 아래 살았어도 강남은 우리에게 너무 먼 곳이었어. 우리 가족 중, 아니 그 동네 어느 누구도 강남으로 달려가 땅을 살 생각을 못했지. 1970년대, 청량리 산동네 사람들에게 강남은 미국만큼이나 먼 거리였던 거지. 세들어 사는 사람들 대부분 방 하나를 썼어. 여름이면 가족 모두가 한 방에서 자기 어려웠지. 그래서 언덕 한 켠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별을 보며 잠이 들었지. 움직이는 별을 찾는다고 눈이 빠져라 밤 하늘을 올려다 보곤 했어. 움직이는 별을 찾지는 못했지만 긴 꼬리를 물고 떨어져 내리는 별동별을 볼 수 있었지. 별똥별은 밤 하늘에 재가 되어 스러질 수도 있고, 작은 돌맹이가 되어 낯선 곳에 떨어질 수도 있지. 그 돌맹이가 떨어진 곳이 그 별동별의 삶이야. 별동별은 자신이 떨어질 장소를 고르지 않아. 중력과 지구의 자전에 의해 정해지는 어느 곳에 던져질 뿐이지. 그곳이 불구덩이일 수도 있고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일 수도 있고 아니면 똥구덩이 속일 수도 있어. 그곳이 어디이든 별똥별은 사는 거야. 하늘에 재가 되어 스러진 별똥별보다야 천 배 만 배 고마운 일 아니겠어.  

우리는 무너져내리다 만 벽을 기둥 삼아 천막을 치고 살았어. 우리는 개미처럼 열심히 살았어. 엄마는 셋째의 책장 넘기는 소리에 잠이 들고, 그 소리에 잠이 깼어. 이른 아침 밭 죽을 쑤기 위해 일어나는 시간까지 셋째의 책장은 넘어가고 있었지. 사각사각... 엄마의 밭죽 끓는 냄새가 방 안으로 스며들 때쯤 셋째는 책가방을 들고 학교로 갔지. 

어려운 집안에 도움이 되겠다고 공고에 간 셋째는 자기 손에 가락이 하나 없다는 걸 깨달았어. 이것은 셋째가 기술을 배우는데 큰 장애였지. 손가락이 없는 셋째에게 줄을 잡고 쇠를 깎는 세밀한 작업은 어려웠던 거야. 낙담한 셋째는 공부를 포기했어. 셋째는 한동안 방황했지. 하지만 엄마는 여전히 밭 죽을 팔아 셋째의 학비를 대주었어. 고등학교를 졸업한 셋째는 일 년 더 공부하고 이듬해 대학에 입학했지. 셋째는 대학을 졸업할 즈음 사법고시에 합격했어. 팥죽장사가 죽 팔아서 아들 판사 만들었다는 소문이 온 동네 퍼졌어. 하지만 아들이 판사가 되었어도 엄마의 삶은 바뀌지 않았어. 이른 아침 밭 죽을 쑤어야 했고, 무거운 항아리를 이고 시장에 가야만 했지. 그래도 엄마의 삶이 이미 바뀌어 있었어. 왜냐고? 목에 걸린 매듭이 하나 풀어졌거든. 

그 셋째가 중학교에 다닐 때, 막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어. 팥죽을 팔아 겨우 셋째 학비를 대던 엄마는 그해 겨울 방학 내내 밖에서 놀던 막내를 불러 앉히고 물었지. '막내야, 중학교 갈래 말래?' 막내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지. 

'안 가!'  

며칠 뒤 셋째는 밖에서 놀고 있는 막내를 불렀어.

'엄마가 집에 오래.'

막내가 집으로 돌아가보니 방 안에는 엄마와 아주머니 한 분이 있었지. 막내는 다음날 그 아주머니를 따라갔어. 미아리에 있는 허름한 한옥집이었어. 세월의 때가 묻어 반들거리는 마루 위에 미싱 두 대가 놓여있었지. 사장 부부는 겨울용 조끼를 만들어 시장 상인들에게 팔았어. 막내의 일은 쪽가위로 실밥을 따거나 미싱 하기 좋게 재단된 원단을 맞춰놓는 시다였지. 두어 달 일을 했는데, 막내는 미싱사 누나의 뀜에 넘어가 청계천으로 갔지. 그곳은 매우 열악한 작업 환경이었어. 사람들이 도무지 허리를 펼 수 없는 곳이었지. 한 층의 중간에 칸을 만들어 두개의 층이 된 곳이라 허리를 펴면 머리가 윗 작업대에 닿았지. 사방에서 미싱 돌아가는 소리가 귀를 때리는 작업장이었어. 수출 날짜에 납품을 맞추기 위해 야간과 철야 작업 지시가 느닷없이 떨어지기도 했고. 막내는 밤을 꼬박 새우고 쓰린 배를 잡고 먼지구덩이인 미싱대 밑에 들어가 잠을 자곤 했어. 그런데 막내에게 일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월급을 떼이는 일이었어. 일을 시킨 사람은 그 공장 주인이 아니었던 거지. 일감을 가져와 장소만 빌리고 일을 시켰던 거야. 분노에 찬 누나와 형들 사이에서 막내는 오들오들 떨기만 했지. 

전태일이 열악한 노동환경을 고발하고자 몸에 불태운 게 겨우 6년 전의 일이었어. 막내가 일하던 곳이 바로 그 청계천이었던 거지. 그런데 세상은 변하지 않았어. 한번 정착된 시스템은 너무나 견고해서 노동자 한 명의 분신 정도로는 쉽게 바뀔 수가 없었지. 그것은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물리의 문제였어. 덩치가 너무 커서 바꾸는데 시간이 걸리는 거지. 6년이란 시간은 이 거대한 사회가 변하기에는 너무 짧았던 거지. 그런데 말이야, 남쪽에서 불어 온 작은 온기가 결국은 북쪽 산등성에 꽃을 피우더라고. 아니, 꽃이 필 때가 되니 바람이 불어왔던 것일지도 모르지. 

첫째는 군대에 가 다리병신이 되어 돌아왔다고 했지. 그 첫째는 날마다 신경질 부렸어. 그 만만한 대상은 엄마였어. 나는 첫째가 이해가 되기는 해. 첫째는 젊은 날 병신이 되었고 학벌도 없으니 세상 어느 구석에서도 사람대접을 받기 어려웠지. 첫째는 세상을 향해 솟아오르는 분노를 주체하기 어려웠던 거야. 첫째는 툭하면 밥상을 들어엎었지. 뜨거운 국물과 밥알이 방바닥으로 튀었고, 엄마는 '저놈의 성질머리...'라며 그것들을 훔쳐냈지. 분이 풀리지 않었던 첫째는 '이놈의 세상..'으로 시작되는 삶의 넋두리 쏟아냈고, 엄마는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낼 수밖에 없었어. 그런 중에도 둘째는 책을 읽었고, 막내는 실밥을 땄고, 술 취한 아버지는 종주먹을 들이댔지. 엄마는... 밭죽이 담긴 솥단지를 이고 시장으로 갔다가 목이 쏙 들어간 긴 그림자 끌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어. 

그럼에도 엄마는 첫째를 보훈대상자로 만들기를 포기하지 않았어. 먼 친척 중 한 분이 보훈처에 다닌다는 소식을 들었지. 엄마는 철마다 때마다 그 친척을 찾아갔어. 갈 때마다 손에는 보자기가 들려 있었지. 그 안에는 대단한 무엇이 들어있지 않았어. 엄마가 만든 김치나 떡, 아니면 시장에서 산 과일이 담겨 있었지. 그것들을 팔이 빠지게 들고 다녔지만 좋은 소식은 돌아오지 않았지. 그럴 때마다 첫째의 밥상은 더 높이 올라갔고 엄마의 주름은 더 깊어졌지. 

엄마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낸 적은 없었지만, 그 말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 같아. 그 먼 친척이 정년퇴직 할 즈음에 큰형은 드디어 보훈대상자가 되었지. 그 뒤로도 첫째의 밥상 엎기는 멈추지 않았지만 엎어진 밥상이 문턱을 넘지는 않았어. 밥상 위에 뜨거운 국물이 있을 때는 첫째의 손짓이 멈추기도 했지. 그러던 첫째가 결혼을 하고 나서야 엄마는 밥상 위에 따뜻한 국그릇을 올릴 수 있었지.  

막내는 봉제공장 일을 그만두고 구둣방에 갔지. 구두 만드는 기술 하나만 배워도 먹고는 살 수 있다는 말에 막내는 어느 아저씨를 따라갔어. 그런데 구둣일이라는 게 구두 한 켤레 당 보수를 받는 도급제라 일하는 시간에 시작과 끝이 없었어. 막내는 이른 아침 출근해서 막차가 거의 끊어질 시간까지 일을 해야만 했어. 사람들은 한 켤레라도 더 만들어 조금이라도 더 돈을 벌려고 했지. 그곳 사람들은 시계불알을 잡아 늘리면서라도 일을 더 많이 하려고 했지. 좁은 골방의 침침한 전등아래서 끝없이 일을 해야 하는 것에 막내는 질려버렸어. 

막내는 서울역 근처 철공소로 자리를 옮겼어. 그곳은 염천교 다리 옆에 있는 좁은 골목이었어. 2미터 남짓한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한쪽은 철공소들이 늘어서 있고 맞은편은 홍등이 달린 작은 문들이 있었지. 낮에는 철공소 망치소리가 골목을 점령했고, 해가 지면 붉그레한 홍등이 골목에 깔렸지. 그래서 철공소 들은 가급적 야근을 하지 않는 게 불문의 원칙이었지. 그곳은 고된 노동의 골목이었어. 낮에는 막내들의 노동이, 밤에는 누나들의 노동이 시작되는 곳이었지.   

염천교 골목도 1980년을 피해 갈 수 없었어. 서울역 광장에서 터진 최루탄 가스가 골목까지 날아왔지.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젊은 무리와 검은 갑옷을 입은 경찰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도로 위에 흘렀지. 막내는 그 모습을 두려움으로 바라보았지. 그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폭력이 무섭기도 했지만 막내에게 다가온 더 큰 두려움은 그들을 알 수 없다는 것이었어. 공장의 누군가는 빨갱이들이라 했고, 또 누군가는 투사라고 했어. 막내의 두려움은 그들이 누구인가가 아니라 왜 그러는지를 모르기 때문이었어. 막내는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거야. 그것은 무서움이었지만 분노이기도 했고 슬픔이기도 했어. 화염병 던지던 젊은 무리와 최루탄 쏘아대던 검은 무리와는 다른 두려움이었고 분노였던 거지.   

막내가 일하던 염천교는 구시대의 발동기와 신시대의 모타가 교차하는 때였어. '한일자동펌프'가 히트를 치던 시기였지만 아직도 방앗간과 건설 현장에서 힘 좋은 발동기가 제 역할을 해내고 있었지. 그런데 발동기는 엄청나게 무거웠어. 고장 난 발동기를 내리는 일이나, 고친 발동기를 싣는 일이 허리가 척척 휠 정도의 노동을 필요로 했는데, 아직 10대였던 막내의 허리로는 감당하기 어려웠지. 하지만 기술이 없었던 막내에게는 피할 방법이 없었어. 막내는 허리가 부러지도록 일을 해야만 한 달 월급을 받을 수 있었어. 

그 철공소 안에서는 망가진 모타를 수리하는 일도 했어. 그런데 막내가 보기에 모타 수리하는 일은 너무나 편하고 쉬운 일처럼 보였어. 의자에 앉아 코일을 감아 모타 안에 잘 끼워넣기만 하는 일로 보였거든. 그래서 막내는 모타 수리하는 일을 배우려고 했어. 그런데 모타 기술자는 막내에게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았어. 화가 난 막내는 자기가 공부해서 배우겠다 생각하고는 서점을 달려갔어. <모터의 원리>라는 책을 샀던 것 같아. 하지만 막내는 첫 장을 넘기자마자 절망에 빠졌지. 거기에는 싸인, 코싸인 따위의 용어들이 있었는데, 막내는 그 뜻을 알 수 없었어. 막내는 집으로 가 공부하고 있던 셋째에게 그걸 내밀며 물었지. '이게 뭐야?' 셋째는 대답은 안 하고 구석에서 한참을 찾더니 책 한 권을 막내에게 내밀었지. '이것부터 봐.' <수학의 첫걸음>이란 책이었어. 막내는 이 책만 다 읽으면 싸인과 코싸인의 뜻을 알 수 있을 줄 알았지. 

막내는 결국 <모타의 원리>라는 책을 다 읽지 못했어. 왜냐하면 흥미를 잃어버렸거든. <수학의 첫걸음>은 막내에게 늦은 공부의 첫걸음이 되었어. 사칙연산과 방정식을 공부해 본 막내는 공부가 별것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지. 막내는 청계천으로 가 검정고시 시험에 필요한 책들을 잔뜩 사들고 왔지. 염천교 철공소를 그만두고 새벽에 신문을 돌렸어. 막내에게는 공부할 시간이 필요했거든. 

막내는 열심히 공부했어. 가족들이 늦은 밤 불을 끄면 막내는 밖으로 나가로등 아래서 책을 읽었지. 더운 여름에도 추운 겨울에도 막내는 그렇게 공부했어.

어느날 셋째가 물었지.

'뭐 하러 공부하니?'

막내는 오히려 물었지.

'뭐 하러 공부해야 해?'

막내는 다음 해 검정고시에 합격했어. 그리고 엄마에게 달렸갔지. 

"엄마! 합격했어!"

엄마는 말했지. 

"고맙다..."

그렇게 엄마의 세 번째 매듭이 풀렸어.  

나는 너무 일찍 죽었어. 겨우 3살이라니, 나는 삶이 무언인지 알기도 전에 죽은 거지. 억울하지 않으냐고? 억울하지. 나도 남들처럼 살고 싶었어. 학교에 다니고 친구를 만나고 결혼하여 자식을 키우고... 그런데 말이야, 억울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는 게 우리 삶이야. 다리병신 된 첫째도, 손가락 잘린 둘째도, 성장판이 닫히기도 전에 공장 문을 열어야 했던 막내도 억울하지. 이 모든 것을 짊어져야만 했던 엄마의 삶은 또 얼마나 억울하겠어. 하지만 우리는 찌그러지지 않았어. 운명이란 놈이 거대한 프레스처럼 머리를 짓눌렀지만 악착같이 버텨내었지. 우리는 잘 살았고, 잘 살아내었지. 삶은 멋있지도 아름답지도 않아. 살다 보면 가끔 멋있고 아름다운 순간이 있는 거지. 그래도 삶은 고마운 거야.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그 시간이 얼마가 되었건, 어느 곳에서 어떻게 살아왔건 삶은 고마운 거야. 너무 고마워서 하늘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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