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아이가 다니는 중학교는 '크로스 컨츄리'라는 달리기 활동을 한다. 주 2회 방과 후에 한 시간 정도 연습을 하고 매주 금요일에는 같은 학군의 중학교 아이들이 모여 1.5마일 정도를 다 같이 달리는데, 정말 잘 달리는 아이들부터 거의 걷다시피 해서 들어오는 우리 집 아이들도 있다.
나는 아침에 우리 집 개를 산책시키자는 이유로 출근하기 전에 십분 내외를 잠깐 산책 플러스 다리기를 한다. 아침에 일어나는 일은 매우 싫지만, 막상 일어나 나가서 걷기 시작하며 이렇게 시원한 아침에 좀 더 일찍 나와서 오래 걷지 못하는 게 아쉬어진다. 대체로 항상 해가 나는 캘리포니아는 아침에는 흐리고 시원하다.
담배를 끊고 나서 뭔가 폐활량이 무진장 좋아지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당장 오분을 달리는 것도 쉽지 않다.
조금만 뛰어도 숨이 막힌다.
걷다시피 해서 걸어 들어오는 딸을 보며 좀 더 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내가 아침에 오분도 채 뛰지 못하는 걸 생각하면, 그 길을 완주한 것만 해도 대단하다는 생각으로 바뀐다.
고등학교 때 체력장이라는 것을 매년 하곤 했다. 그중에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오래 달리기였다. 1.5킬로미터를 달리는 건 정말 괴롭기 그지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시골에서 뛰어노는 걸 즐겼던 나는, 단거리는 자신 있었지만 장거리는 쥐약이었다. 단거리에서는 일등을 해도 장거리는 꼴찌를 면치못했다.
그런데 웃긴 건, 뭐든 연습하기 나름이라 생각이 들었던 이유가, 대학교 때 연극동아리를 하면서 연극연습 전에 항상 기초체력운동을 하면서다. 기본 체력과 발성이 중요하다고, 선배들은 학교 운동장 4바퀴를 매일 뛰게 하고, 허공에 대고 발성연습을 삼십 분 이상 했다. 복식호흡도 했던 듯하다. 그렇게 반년쯤 지나자 운동장 네 바퀴를 뛰어도 힘들지 않은 순간이 온 것이다.
마지막 바퀴를 돌 때는 혼자 기운이 남아 빨리 뛰어나가기도 해 선배들이 '넌 체력이 남아도냐'라는 말까지 듣기도 했다.
그때 생각이 나서, 내일부터는 아침에 좀 더 한계치를 넘어 달려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에 온 이후로 일주일에 한 번씩은 한국에 계신 양쪽 부모님께 전화를 한다. 나는 가끔 일을 핑계로 빠지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얼굴이라도 보여야 만족들을 하신다. 전화 통화가 아니고 카카오톡으로 얼굴을 보며 얘기하는 것을 부모님들은 좋아하시지만, 목소리가 작은 내가 큰소리로 얘기해야 하는 것은 나름 힘이 든다.
시어머니는 좀 더 의무적인 느낌을 주시고, 친정엄마는 딸과 대화하고 싶어 하는 애정을 표현한다. 그래서 엄마와의 통화는 대체로 부담이 없는데, 어제는 유난히 엄마가 할 말이 많으신 듯했다.
친하게 지내는 고등학교 친구분의 딸과 손주들이 뭔가 더 잘되고 공부도 잘하는 듯해서 나름 비교심이 드신 듯했다. 명색이 의사딸과 미국 수의사딸을 둔 엄마는 대부분의 친구들한테 부러움의 대상이지만, 실상 의사딸의 아들을 대신 키우시며 드는 스트레스가 남에게 말하지 못하는 핸디캡이기도 하다.
엄마의 비교대상이 되는 엄마친구딸은 공부가 천성이 아닌듯한데 결국 박사까지 해서 시간강사를 십 년 넘게 하더니 결국 어딘가에 교수로 결국 임용된 듯하다. 그리고 그 집 아이가 특목고를 간 것이 엄마한테는 스트레스를 불러온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친구들과 얘기할 때 아이들 얘기하는 걸 즐기지 않는다. 지금 성적이 조금 좋다고 해서 인 서울대를 가는 것도 쉽지 않은 건 불 보듯 뻔하고, 설사 좋은 대학을 갔다고 해서 미래가 보장되는 것도 아닌데, 이제 시작하는 아이들에 대해 일희일비하는 건 시간낭비라고 생각이 되기 때문이다.
예전에 읽었던 내가 너무나 좋아했던 책이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책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 책의 한 일화에서 예수가 등장한다. 예수는 축구 경기장에서 A와 B팀의 경기를 응원하면서, A가 이길 때는 'A팀 잘한다! 최고다!'를 외치고, B팀이 잘할 때는 'B팀 최고다!'를 외친다. 그걸 지켜보던 사람들은 '저런 무신론자 같으니라고!'말하며 그를 비난한다.
그리고 한 중년의 여인이 죽어서 천국의 심판대에 서는 얘기가 나온다. 그는 이런 질문을 받는다.
'너는 누구나?'
그리고 그 여인은 '나는 ㅇㅇㅇ시장의 부인입니다'라고 한다. 그러자 심판자는
'누구의 부인이냐고 묻지 않았고, 네가 누구냐고 물었다'라고 말한다.
여인은 다시 '나는 세 아이의 어머니고 우리 아이들은 무슨 무슨 일을 한다'라고 했다.
그러자 다시 심판자는
'누구의 어머니냐고도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라고 했다.
나는 이 글을 보면서 '나는 누구일까' 아니 '나는 어떤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에 대해 생각한 적인 있다. 그리고 아직 나는 그 답을 모른다.
한국에 한 직장맘인 친구가 매일 강남의 복잡한 길을 뚫고 자가용으로 출퇴근을 하는 걸 보고 '왜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냐'라고 물었더니, 출퇴근에 '혼자 차 안에 있는 것이 자신의 유일한 혼자만의 시간이라 그걸 즐기고 싶다'라고 했다.
인생을 바빠도 즐겁게, 한가해도 가슴벅차게 살수는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