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개의 방
밤새 윤재현의 노트엔 문장보다 원이 많았다.
잉크는 푸른 원을 닮아 돌았지만, 끝마다 아주 조금씩 비뚤어졌다.
손을 멈출 때마다, 어제 화면 구석에서 깜빡이던 붉은 점과 짧게 터지던 아기의 울음이 같이 떠올랐다.
그는 메모의 마지막 줄을 한 번 더 훑었다.
모형 외 과정 데이터 확인 ... 분쟁·민원·보증인·톤.
아침의 회사는 늘 같은 속도로 돌아갔다.
복도에선 프린터 열이 새어 나왔고, 탕비실 커피 머신은 전날과 같은 소리를 냈다. 그래도 오늘, 그는 일부러 엘리베이터 버튼을 하나 더 눌렀다. 12층. 파일럿 이후 가장 먼저 공기의 결이 달라진 층.
유리문을 열자 두 개의 방이 마주 보였다.
문 사이 거리는 열 걸음도 채 안 됐지만,
한쪽은 바람이 서늘했고, 다른 한쪽은 온기가 돌았다.
추심실. 스크립트의 방
왼쪽 문틈에서 전화벨이 일정한 규칙으로 울렸다.
헤드셋을 낀 직원들이 화면 하단의 스크립트를 따라 읽어 내려갔다.
“고객님, 연체 30일 경과. 금일 납부 안 되면 법적 조치 진행됩니다.”
“상환 계획 불이행 시 압류 절차가....
네, 안내드렸습니다.”
목소리는 매끈했으나, 체온은 희미했다.
윤재현은 잠깐 눈을 감았다.
낭독되는 문장 사이로 어제의 경고가 끼어들었다. 허용되지 않은 입력 감지.
붉은 점이 망막에 잠깐 찍히는 느낌.
그 점은 곧장 스크립트의 쉼표 자리에 가서 박혔다.
컴퓨터 화면에는 파일럿 이후 업무량을 보여 주는 차트가 붙어 있었다.
D등급→집중관리 전환 TAT 23% 단축,
회수 프로세스 자동 연계율 91%.
숫자는 성공을 설명했지만, 방 안의 공기를 부드럽게 하지는 못했다.
상담실. 호흡의 방
오른쪽 문 앞, 작은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신용회복위원회 협업 상담실 D등급 채권 일부 이관]
윤재현은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파일럿 설계안의 각주에서만 보던 조항이 현실로 구현돼 있었다.
자동화 전환 이후, 상각 직전 고객 일부를 외부 상담 기관에 먼저 이관해 민원 리스크를 줄인다는 시범 제도.
그 제도의 현장이, 바로 이 문 안쪽이었다.
문을 열자 공기가 달라졌다.
낮은 조명 아래, 작은 탁자 위에 따뜻한 차가 김을 올리고 있었다. 창가에는 작은 화분이 매달려 있었고, 벽 시계는 조용히 45분을 가리켰다.
그녀가 있었다. 최가온 ...신용회복위원회 파견 상담원.
검푸른 가디건과 낮은 굽의 구두. 긴 머리는 느슨하게 묶여 어깨선에 내려앉았다.
말을 꺼내기 전, 가온은 세 번 짧게 들이마시고 한 번 길게 내쉬었다.
듣기 위한 준비의 리듬이었다.
청년 하나가 마주 앉아 있었다.
손은 무릎 위 같은 자리를 계속 두드렸고, 눈 밑은 뜬 눈으로 보낸 밤처럼 눅눅했다.
“계약이 분쟁으로 묶여 있군요.”
가온이 아주 천천히 확인했다.
“원래 상환 스케줄을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습니다. 지금까지의 과정을 들려주세요. 제가 ‘결과’ 말고 ‘과정’을 기록할 수 있게요.”
청년이 머뭇거리다 쏟아내듯 말했다.
보증금 반환 지연, 접수한 민원 번호, 병원에 누운 보증인 아버지, 콜센터에서 “규정상 불가”라는 답변이 반복된 순간의 절망.
가온은 끼어들지 않았다.
대신 노트에 자음을 먼저 찍고, 청년이 멈추면 모음을 채워 단어를 완성했다.
그 글씨는 정사각형처럼 단정했지만, 줄과 줄 사이 여백은 넉넉했다.
말의 숨이 앉을 자리를 남겨둔 필체.
“등급에는 D가 찍혀 있죠.
하지만 그 글자 사이사이에 빠진 게 있습니다.
분쟁·민원·보증인·(말의) 톤.
저는 그 공백을 듣고, 공백을 문장으로 만드는 일을 합니다.”
청년의 무릎 위 손가락이 멈췄다.
어깨가 한 뼘 내려앉았다.
유리문 밖에서 지켜보던 윤재현의 등줄기를 전율이 스쳤다.
어제 자신이 억지로 입력했던 회색 칸 네 개가, 지금 이 방에선 사람의 목소리와 손글씨로 살아나고 있었다.
숫자에서 밀려난 것들이, 여백을 얻고 호흡을 얻고 있었다.
잠시 후, 최가온이 윤재현을 발견했다.
문을 나서며 그녀가 먼저 다가와 말했다.
“윤 과장님이시죠? 저는 신용회복위원회에서 파견 나왔습니다. 자동화 이후 일부 케이스가 저희 쪽으로 먼저 옵니다. 오늘 청년도 그 경우예요.”
윤재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를 믿습니다. 하지만 숫자가 말하지 못한 게 있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가온은 노트 한 귀퉁이를 접어 그에게 보여 주었다.
오늘의 숨, 내일의 문장
짧은 메모였지만,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모든 침묵이 담긴 문장 같았다.
오후, 전무의 전화가 울렸다.
“윤 과장, 전세사기 케이스 결과는?”
윤재현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정식 모델은 D등급, 회수 권고입니다.”
“좋아. 보고서는 그걸로 끝내. 숫자는 틀리지 않아. 정식 결과만.”
통화가 끊긴 뒤, 윤재현은 창가에 서서 노트를 펼쳤다.
이번 원은 번지지 않았다. 대신 안쪽에서 찻잔의 김이 옅게 돌았다.
닫힌 도형 안에서, 천천히 숨 쉬는 선.
숫자는 닫힌 원.
사람은 그 원의 바깥에서, 때로는 원 안쪽에서 숨을 쉰다.
그는 마지막 줄에 작은 글씨로 적었다.
“여백을 기록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