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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리밀리 Feb 01. 2022

다름 속에 있는 특별함을 보라

‘점이 여섯 개뿐인 무당벌레’라는 이야기가 있다. 칠점 무당벌레들의 마을에 사는 육점 무당벌레가 외톨이로 쓸쓸하게 살다가 마을을 떠나 여행을 시작하면서 그의 인생이 변화하는 모습을 담은 내용이다. 그가 여행 중에 만났던 메뚜기, 나비, 바퀴벌레에게는 무당벌레의 외모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점 하나 부족하다고 해서 소외되지 않았고 존재가 부정당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거미와 개구리를 만났을 때는 점이 여섯 개여서 죽을 위기를 모면하기까지 했다. 무당벌레는 더 많은 인물들을 만나고 더 다양한 경험들을 쌓아가면서 ‘다르다’는 것에 대한 다른 인식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가 입었던 불행의 옷을 벗고 행복이라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 이야기는 ‘다름’의 다른 인식을 강조하고 있는 이야기기도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이 안에 담겨 있는 다수의 횡포 즉 왕따 문제가 크게 다가 왔다. 외눈박이 외계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 두 눈을 가진 사람이 들어가 ‘다르다’는 점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고 생각을 해보자. 도대체 ‘다르다’는 기준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이 생기게 될 것이다. 정말 사람들이 옳다고 믿고 있는 기준은 과연 절대적으로 옳은 것인지... 행여 그것이 옳다고 해도 그 기준에서 벗어난다는 이유로 차별을 가하는 건 정당한 것인지 생각을 확장시키면서 나는 이 이야기에서 제기된 문제를 우리 사회로 끌고 와봤다.  


그러고 보면 우리 인류는 ‘다르다’는 것을 죄악인 것처럼 취급해 온 이력을 가지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피부색이 다르다고 다른 종교를 믿는다고 혹은 성별에 차이가 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고 차별과 불이익을 당하는 일들이 자행되고 있다. 물론 이런 행위에 대해 불법적인 요소가 있는 행동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은 국가도 존재하고 부당한 행위라는 것에 규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생김새, 생각과 행동 등이 ‘다르다’고 선을 긋는 등의 횡포는 여전히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다.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말이다. ‘우리’라는 소속감을 형성하는 것은 나쁠 것이 없다.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은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이기 때문에  그것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라는 집단의 경계를 벗어나는 사람들을 구별 짓고 소외시키고 괴롭히는 건 분명 잘못이다.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욕설과 비난을 받아야 하는 건 다양성을 존중하자고 외치는 21세기에서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다수의 기준에 따르고 그 무리 속에 조용히 묻혀가는 것이 최선인양 살아가는 몰개성의 시대는 이미 과거가 되어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암묵적으로 대세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노력 속에서 튀지 않으려 애쓰고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게 자기도 인식하지 못하는 스트레스를 떠안는 안타까움 속에 살아가고 있다. 


미국에서 만난 일본인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자신이 미국에서 살고 있는 것에 매우 만족해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곳에서는 남들 신경 안 써서 속 편한 게 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살았을 시절 자신의 학창시절을 돌아보면 옷이며, 학용품이며 하나에서 열까지 친구들을 따라하고 그들에 맞추고 남을 의식하는 게 적잖은 스트레스였다고 한다. 같은 동양문화권이자 단일민족으로 구성된 집단을 경험했던 나는 그 얘기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어린 시절 또한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행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남들과 다르지 않기 위해.. 살았던 지난날이 스쳐지나갔다. 나는 심지어 결혼할 때 맞춘 한복 색까지도 같은 시기에 결혼식을 올렸던 친구와 비슷한 색으로 골랐었다. 그야말로 나에게도 나만의 고유성을 놓친 채 이도저도 아닌 시기를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남들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 또한 모른 채 남들의 기준과 잣대를 내 인생의 표준으로 여기면서 말이다.


모두가 같은 기준을 가지고 그 안에 생각과 행위를 맞추고 그렇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규제되고 그런 사회는 사람들의 개별성은 말살해 버린다. 이곳에서 ‘개별성’은 오류와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사회는 각 개인의 개별성을 존중하고 이를 발전시켜 이것이 사회 전체에도 이로운 방향이 되게끔 선순환을 일궈내는데 그렇지 사회 속에서는 개인들이 다수의 의견 속에 묻혀 조용히 살도록 압박한다. 조금이라도 개성이 드러나는 것 같으면 ‘나댄다’, ‘설친다’, ‘관종’, ‘튄다’ 등의 말로 억누른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다르다’고 죄인 취급을 하는 행위가 ‘틀린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나온다. 프로크루스테스가 지나가는 행인을 잡아다 침대에 눕히고 키가 침대보다 크면 잘라서 죽이고 침대보다 작으면 늘려서 죽였다. 그야말로 사이코패스의 박멸스토리다. 그런데 사실은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기준이나 생각에 맞춰 타인을 재단하고 심지어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통에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살아가고 있다. 사회가 획일화 된 기준과 잣대를 들이대고 구성원들이 거기에 맞춰 살도록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자 횡포인지도 모른 채 말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단 한 사람의 다른 생각이라도 누르지 말자. 모두 같은 생각을 한다면 진보는 없다. 반대 목소리 억압 말고 키워라. 그럴수록 사회적 가치는 생동감을 얻으니 무질서와 비효율을 감내하더라도 왜 민주주의는 필요한가 그 답을 준다.” 전체 인류 중에서 단 한 사람이 다르게 생각한다고 그를 억누르는 것은 역으로 단 한 사람이 인류 전체를 억누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쁘다고 역설했다. 아무리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국가라 할지라도 국가 권력이 개인의 자유를 위협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다. 자유민주주의에서 구성원들이 목소리는 소중하다. 그 누구도 가난하다고 못 배웠다고 유색인종이라고 여성이라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올라가 남들의 평가와 규정에 난도질당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불의에 위축되지 않고 맞서 싸우고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편견을 타파해나갈 때 우리는 다름 속의 특별함으로 ‘나다움’을 세우고 세상을 주체적으로 살아나가는 소신이 필요할 것이다.  


*생각해볼문제   

세상의 기준과 잣대에 규제를 당했던 기억이 있었는지 떠올려보자


나의 ‘나다움’은 무엇인지 그리고 이를 멋지게 발현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이 필요한지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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