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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리밀리 Feb 05. 2022

인간을 위하는 것이 인간을 죽이는 것이 되는 기괴함

기억전달자

모든 인간은 감각에 사로잡혀 있고 그것에 의해 인식되는 세상이 진짜라고 믿는다. 마치 동굴의 속에서 결박되어 있는 죄수들이 벽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실체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다. 얼핏 듣기엔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나 싶겠지만 평생 자유가 제한된 채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을 그림자로만 인식을 해왔다면 동굴 밖에 있는 진짜 세상을 말하는 사람이 이상해지는 상황은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그리고 누군가 동굴 밖 진짜 세상으로 나가자고 하면 모두가 그를 비난하고 지탄하게 되는 다음 상황까지도 말이다. 기억전달자 속의 마을은 마치 플라톤의 동굴과도 같은 공간이다. 사람들이 쇠사슬에 묶여 있는 것처럼 색이 없는 세상 속에서 자신들의 행복을 믿어 의심치 않는 상태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억을 보유하고 감정을 느끼는 ‘조너스’가 오히려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하고, 더 나아가 마을 원로들은 조너스를 위험인물로 간주해버리기도 한다.


조너스는 전쟁, 굶주림, 차별 등의 사회악으로부터 안전한 미래의 어느 마을에 살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아주 행복하고 평화로운 상태 속에서 삶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는 이와 같은 혜택을 사람들에게 주기 위해 사랑 우정과 같은 인간적 감정들을 통제한다. 개인의 선택, 그리고 자유 이런 것들은 철저히 배재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마치 플라톤의 동굴 속 죄수들처럼 말이다. 


심지어 이 마을 사람들은 아이를 신청해 배급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며 직업 또한 12살 기념식에 주어지는 것에 따라야 한다. 물론 직업에 따른 불이익도 없다. 빈부차, 폭력, 불의 그 어떤 차별도 없이 안정적이고 편안한 (아니 그렇다고 여겨지는) 사회 속에서 이들은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작품 속에서는 '늘 같은 상태(Sameness)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 마을에는 아주 독특한 직위가 있었다. 그건 바로 기억보유자다. 그리고 이 직위를 부여 받은 사람에게 지금 사회 이전의 기억들을 품고 있다가 전달해주는 기억보유자. 이들은 마을에서 '늘 같음 상태(sameness)가 깨지는 상황이 발생하면 기억으로 얻어내는 지혜를 마을 원로에게 알려줌으로 이 비상상태를 해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조너스가 기억보유자의 직위를 받게 되면서부터 그가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든 경험들을 하게 된다. 그가 철학자로 성장하게 해주는 경험들 말이다. 눈, 햇빛, 굶주림, 전쟁, 공포, 사랑, 즐거움 등의 감정을 한꺼번에 보유하게 된 그는 이 마을의 불편한 진실을 아주 불편한 채로 인식하게 된다. 마을의 영예라 할 수 있는 노인의 '임무 해제'는 사실상 그 뒤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 없다. 일정 나이가 되고 기력이 없고 노쇠해지면 정맥 주사를 맞고 안락사를 당하기 때문이다. 뿐만이 아니다. 장애를 안고 태어난 아기, 그리고 쌍둥이로 태어나서 몸무게가 적은 아이 이들 모두 '임무 해제'상태가 된다. 모두의 행복을 보장하는 완벽한 상태의 사회가 사실은 신체 조건, 장애인, 노인 차별을 자행하고 있고 심지어 이 방법은 모독과 멸시의 차원이 아닌 '안락사'였다는 걸 알았을 때 찾아오는 인지의 부조화 상태? 조너스는 그로 인해 의식의 폭발하고 만다.


이들이 이렇게까지 인구를 제한하는 이유는 인구 증가로 인한 식량부족, 빈곤 혹은 전쟁발발과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인데.. 철저하게 산아 제한을 위해 사람들을 사랑을 나눌 수 없고 약을 통해 성욕을 통제를 해버린다. 당연히 배우자를 선택할 수 없고 아이를 낳을 권리 또한 없다. 이곳에서는 산모라는 직위를 부여 받은 사람들만이 출산을 할 수 있고 이 아이 또한 산모를 떠나 보육원에서 공동 양육되어진다. 마치 맬서스의 '인구론'처럼 말이다. 인구를 줄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회악을 조장해도 된다는 세기의 독설과도 같았던 그 유명한 이론이 여기서 제도적으로 시행되고 있던 것이다. 

이런 마을에서 조너스는. 인간을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나중에 후회하고 고통받는 존재로 치부해버린 세상 속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고 만다. 그리고 일생의 단 한번도 한 적이 없던 선택을.. 그 마을의 경계를 넘어버리는데 써버린다. 그렇게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기억을 되찾아 주며 기억보유자에서 기억전달자가 되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 동굴에서 사슬을 끊고 진짜 세상으로 나아가는 사람을 ‘철학자’라 했다. 그렇게 실체를 바로 깨닫고 이데아 즉 현실 세계를 알게 된 철학자가 다시 동굴로 돌아와 다른 죄수들에게 자유를 주고 그들을 계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이것이 그가 말한 ‘철인정치’의 핵심이다. 국가의 통치자는 철학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 


그렇다면 조너스는 분명 플라톤이 말한 소수의 깨달은 자, 바로 ‘철학자’의 모습과 일치한다. 그는 기억을 보유한 채 그의 동굴 밖으로 나가는 선택을 했고 또 동굴 밖 진짜의 것들을 동굴 속 사람들과 나누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 때 조너스가 동굴의 밖을 나갈 때 임무해제가 될 운명의 아기 ‘가브리엘’을 함께 하는 것은 새로운 희망이자 시작을 의미하는 동시해 이상적 사회라고 여겨졌던 동굴의 잘못된 논리로 인한 오류적 제도 즉 산아 제한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인간을 위하는 것이 곧 인간을 죽이는 데로 이어지는 기괴함, 그에 대한 투쟁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도 작가가 이를 두고 작품을 만든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조너스는 플라톤이 말한 철학자의 아바타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맥이 같다. 또한 플라톤의 국가에서 제시하고 있는 이상국이 곧 기억전달자의 마을이고 기억전달자의 아믈이 곧 플라톤의 이상국이기 때문이다.그런데 기억전달자의 작가 로이스 로이는 플라톤을 뛰어넘는다. 조너스는 이를 가짜 세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제시하는 이상국은 국법에 의해 우생학적 결혼이 이뤄지며 이곳에서 태어나는 아이도 출생과 동시에 모친의 품에서 떨어져 공동 육아소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 아이들 가운데서 우수한 아이들은 양질의 교육을 받고 국가 통치 계급으로 길러진다. 이렇게 국가가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제한하고 아이들의 올바른 교육을 위해 검열된 내용만을 가르쳐야하는 곳이 바로 플라톤이 말하는 '유토피아'다. 그리고 이것이 구현된 공간이 바로 기억전달자의 마을 즉 조너스의 '디스토피아'다. 죄가 없음에도 인구수를 조절한다는 명목하게 임무해제가 되어야 하는 사회, 그게 그가 박차고 나와야만 했던 '동굴'인 것이다. 


‘깨달은 자’에 대한 인식과 필요성이 강조되는 ‘동굴의 비유’와 ‘기억전달자’ 속에서의 불협화음은 바로 다음과 같다. 인간의 행복은 ‘통제’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아니면 ‘자유’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당신의 답변이 궁금하다.                 


*생각해볼 문제

1. 플라톤의 철학자와 기억전달자의 조너스는 어떤 점에서 유사한가?

2. 플라톤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국가를 왜 조너스는 떠나고자 했을까?

3. 인간의 행복은 '통제'에서 오는 것일까? '자유'에서 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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