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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리밀리 Feb 02. 2022

나를 거부하는 그들을 대하는 방법

나는 개인적으로 소수의 입장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과 그들이 펼치는 논리와 태도에 관심이 많다. 세기를 바꿔줄 혁명적 선지자가 나타나면 그걸 알아보는 일은 의외로 간단하다는 말이 있다. 성난 군중들이 공격을 해대기 때문이라고.. 우스갯소리 같지만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말은 진리다. 세기의 천재를 한 눈에 알아볼 시대와 대중은 흔치않다. 후대가 되어서야 그가 옳았다고 인정해주는 수순을 따르는 것이 순리였다. 따라서 세상의 인식을 바꾸는 시작점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의 공격에 대처하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그들의 이론을 공부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하겠다. 그 안에는 극한 갈등 상황에서의 인간관계 대처법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누구나 옳다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이론도 처음 세상에 나올 때는 그것에 대한 지탄과 저항이 따랐다. 이에 ‘지동설’을 주장했던 갈릴레이나 ‘진화론’을 주장했던 다윈처럼 자신의 이론을 접어두기도 하고 아니면 이와 반대로 손에 세균이 있다는 걸 주장했던 제멜바이스처럼 자신을 공격하는 자들과 똑같이 맞서 싸우기도 한다. 때로는 흑인 인권 운동의 아버지 프레드릭 더글라스처럼 ‘투쟁 없이는 진보도 없다.’며 혁명적으로 자신의 뜻을 펼치기도 한다. 방식은 사람마다 다다르긴 하지만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어쨌거나 개인이 다수와 맞서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특히나 이럴 땐 강하게 나가면 나갈수록 부러지기가 쉽다. 그것이 운명이다. 자신을 지지해줄 세력이 없다면 인생이 망가지는 비극적 결말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세기를 앞선 선지자 박지원처럼 문학적 도구를 구사해 자신의 새로운 사상이나 이념 혹은 이론을 내놓는다면 세상이 이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겠지만 모두가 이렇게 문학적 힘을 발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는 살면서 이러한 극단적 세기의 갈등은 아닐지라도 인생 속에 크고 작은 마찰들 속에 살고 있다. 사연 없는 집은 없다고 겉으로 멀쩡해 보여도 문 열고 들어가면 저마다의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이 펼쳐지기 마련이다. 이렇게 인생의 굽이굽이 찾아오는 관계의 불협 혹은 갈등을 슬기롭고 현명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이런 상황 속에 놓인 인물들의 방법들을 살펴보고 이를 내 인생 속에서 쓸모가 있게 매뉴얼처럼 만들어 내는 일이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나는 우연히 미국의 젠더 이론가이자 퀴어 이론의 창지사라고 불리는 주디스 버틀러의 강연을 접하게 되었다. 번역가가 번역을 하다 포기할 정도로 책을 어렵게 쓰기로 악명이 높은 사람인데 지인의 동창이 책의 번역을 맡았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갑자기 그녀에 대한 궁금증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나온 그녀의 모습은 강렬해보였다. 짧은 커트 머리에 가죽 자켓을 입고 나왔는데 딱 봐도 자신의 주장을 강력한 어조로 호소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영어 ‘젠더(Gender)-성’를 다른 언어로 표현해 내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을 다른 언어로 얼마나 온전하게 번역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제기를 하면서 말이다. 순간 이 사람은 자문화 우월주의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기들이 쓰는 언어를 어떻게 다른 나라의 언어로 표현을 해낼 수 있겠는가 하는 어조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을 끝까지 듣고 있으니 ‘언어’ 자체가 ‘우리’를 규정하고 표현해 내는데 한계가 있음을 설명하기 위한 예를 들고 있었던 것이다. ‘레즈비언’, ‘게이’, ‘트렌스젠더’, ‘양성애자’, ‘퀴어’ 등 소수의 사람들을 파악하고 정의하는 언어가 지금 현재의 것이 아닌 역사적으로부터 내려 온 것이라면 우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문화제국주의 안에서 파생된 언어만이 옳은 것이 아니라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언어와 다양한 개성을 인정, 그것이 기정의 것들과 함께 공존하는 방식을 제안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녀가 가진 ‘새로움’에 대해 이러한 수식을 덧붙인다. “우리는 기존의 그 어떤 것도 파괴하지 않는다.”고 그러면서 “그저 세상의 일부가 되고 싶을 뿐이다.”와 같은 논리를 펼치는 것이다. 구세대를 뒤엎고 기존의 가치를 전복시키며 새로운 시대를 도래하는 획기적이고도 혁명적인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세상에 없던 다시 말해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다양한 개념을 인정하고 공존하는 세계 속에서 살만한 방식으로 새로운 존재 또한 그 자체의 가치로서 존중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전해주는 것이다. 이처럼 꼭 기존의 편견을 부수는 과정이 거칠고 공격적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어차피 세상 이는 이 세상의 모든 진보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상을 바꾸기 전에 먼저 기존 세상의 일부가 되어야 하고 그렇게 인정받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대부분 투쟁을 통해 쟁취해 온 것이 맞다. 그런데 버틀리가 보여준 투쟁의 방식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반대편 선상의 사람들을 밀어내고 새로운 세상을 세우는 게 아니라 그저 기존에 없던 새로움을 지닌 소수자들에게도 세상의 일부를 내어달라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강연의 끝을 자신의 언어를 번역해 준 것에 대해 “세상의 일부가 되도록 도와주셨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마무리했다. 


버틀리는 페미니즘이자 여성인권운동가라 생각했는데... 그녀는 그 이전에 철학자였다. 우리의 삶을 좀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고민하는 참된 철학자 말이다.  


*생각해볼 문제   

버틀리의 방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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