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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리밀리 Feb 08. 2022

이제 경험기계는 현실이다!

로버트 노직의 경험기계

나는 아이들과 논술 수업을 할 때 교재를 직접 만들다보니 아이들 또한 교재 제작에 참여할 수 있도록 늘 기회를 열어둔다. 그래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노래나 드리마, 영화로 수업을 구성할 일이 종종 생긴다. 그렇게 가인의 ‘카니발’을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과도 엮어 ‘죽음’에 대한 고찰을 함께 하기도 해보기도 하고 유라의 ‘서울 사이보그’와 이상의 초현실적주의 문학 ‘거울’과 ‘날개’를 살펴보면서 ‘의식의 흐름’에 대한 내용을 다루기도 한다. 이렇게 아이들이 배우고 싶은 소재를 가지고 수업을 만들면 아이는 아이대로 수업에 집중해서 좋고 나는 나대로 이와 관계된 다양한 내용을 한 데 엮을 수 있어 좋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프로젝트 수업이 구성되고 이는 한 가지 주제를 여러 차례에 걸쳐하다 보니 심도 깊게 다룰 수 있어 그야말로 돌 하나로 새 두 마리 잡는 공부가 된다. 


또한 아이들은 자신이 재밌게 읽었던 책을 수업으로 다뤘으면 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추천 받은 책 중 하나가 바로 ‘달러구트 꿈백화점’이었다. 소설 속에서 ‘꿈’을 작품처럼 사고 팔 수 있다는 기발한 상상력은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그렇게 펼쳐지는 이야기는 마치 솜사탕이라도 먹으며 봐야하는가 아닌 생각이 들 정도로 놀이공원 감성을 자아냈다. 사람에게 특정한 꿈을 주입할 수 있다는 설정은 우리를 정서상으로만 들뜨게 했던 것만이 아니었다. 이는 신경과 의사 김종성의 <뇌에 관해 풀리지 않는 의문들> 중에서 ‘잠은 왜 잘까?’를 통해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철학적인 내용인 로버트 노직의 ‘경험기계’와 연결해서 볼 수 있었다. 더 나아가 ‘가짜 세계’와 ‘진짜 세계’의 이분법의 원형인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로도 이어졌다. 그리고 이를 미디어로 잘 구현해놓은 영화 ‘매트릭스’, ‘기억전달자’ 미래세계를 그려놓은 허구적 작품의 내용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메타버스’로 이어져 다소 장기간에 걸친 프로젝트 수업으로 탄생했다. 이게 아이들이 교재 제작에 참여할 때 벌어지는 일이다. 


먼저 경험기계에 대해 설명을 하자면 로버트 노직이라는 미국의 천재 철학자가 사람들에게 뇌자극을 통해 쾌락 중추를 활성화하는 단계를 넘어 완벽하고 현실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경험기계와 예측할 수 없는 고난이 도사리고 있는 현실 이 둘 중 하나라를 선택하라고 하면 대다수의 사람은 현실을 택할 것이라고 주장을 했다.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무규정의 형체 없는 경험 기계 속 일부의 덩어리가 아닌 어떤 종류의 의미라도 가지고 있는 인간이기를 원하는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직접 체험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에 경험기계를 통해서 얻어지는 가상의 경험에 대해서 만족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인간을 ‘배부른 돼지’가 되느니 차라리 ‘배고픈 소크라테스’로 만들어주는 데 기여했다. 인간이 쾌락만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주기 때문이다. 만약 ‘쾌락주의’의 관점에서 인간에 대한 설명을 하고자 한다면 인간은 당연히 경험기계를 선택해야 한다. 그 안에는 노력 없이 주어지는 다양한 쾌락이 담겨 있는데 굳이 고단한 현실을 살아갈 이유가 없으니까. 하지만 로버트 노직은 이러한 쾌락주의를 이론적으로 가볍게 따돌려 놓는 쾌거를 달성한다.


그런데 로버트 노직의 주장은 어째 좀 이상한 구석이 있다. 물론 인간이 이성적으로 경험기계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현실의 삶을 선택한다는 건 인간을 인간답게 해준다는 점에서 가슴이 벅차오르는 결말이 아닐 수 없다. 역시는 역시다. 그런데 이런 감동을 깨어 버리는 것은 노직의 간과한 인간의 성향에 있다. 그건 바로 ‘현상유지편향’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현 상태를 유지하려는 심리적인 편향이 있는데 이 관점에서 놓고 보면 사람이 경험기계를 경험해보지 못한 상태에서 현실을 선택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아무리 모두에게 유익이 된다할지라도 새로운 것은 늘 변화에 적응하는 노력을 요구한다. 그래서 어리석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수고로움과 번거로움 대신 기존의 익숙한 것들을 보수하려고자 한다. 일예로 미국의 단위계(United States customary units)를 들 수가 있다. 미국은 길이, 질량, 온도, 속도 등에서 세계 표준 단위와 별도의 단위계를 사용하고 있다. 미터법 대신 야드파운드법, 섭씨 온도 대신 화씨 온도, 킬로미터 대신 마일을 쓴다. 미국과 국경을 두고 인접해 있는 캐나다, 멕시코의 경우 과속 표지판이 킬로미터로 되어 있는데 미국은 마일로 표기가 되어 있다. 1999년 9월 미국은 단위 착오 때문에 3억 3천만 달러 상당의 화성기후 궤도선을 과소분사 시켜 파괴한 적이 있다. 록히드 마틴측에서 궤도선의 화성 진입을 위해 필요한 로켓 분사의 총 운동량 변화를 파운드. 초 단위로 계산해 NASA에 전달했는데 나사의 엔지니어들은 이를 킬로그램/초 단위로 생각하고 그대로 집어 넣어 계한한 것이다. 이렇듯 세계 도량형 표준화를 거부하는 미국 단위계의 비합리성은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일단인들도 다 아는 것인데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전혀 문제의식이 없다. 이미 이 시스템에 익숙해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도 여러번 주의회 차원에서 미터법 도입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있다. 단위를 바꾸면 자살하겠다고 나서는 미국인들이 너무나 많다. 오죽하면 미국 단위계를 세계 도량형으로 바꾸는 대통령이 미국에 나온다면 노벨물리학상은 물론 평화상까지 거머쥘 것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노직의 말대로 아무리 경험기계가 좋다한들 ‘진정성’ 있는 현실 속에는 참된 행복을 대신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주체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진짜’이기에 거기에는 분명 가치와 의미가 담겨 있을 테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현실을 택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경험기계로의 모험을 하느니, 구관이 명관이라고 이미 알고 있는 현실을 택하는 건 이상할 것도 없다. 마치 미국인들이 세계 단위를 못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굳이 여기에 숭고한 서사가 필요할까? 이미 노직의 주장은 두 조건이 동등하지가 않은 상태에서 나온 것인데... 어쨌든 근거가 빈약한 것은 사실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또다른 측면에서 접근해볼 수도 있다. 경험기계를 선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말이다. 영화 주만지 3편의 시작은 이렇다. 2편에서 목숨을 담보로 하는 아슬아슬한 줄타기식의 게임을 종료하고 현실 속으로 돌아온 주인공은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게임 속 캐릭터로서의 경험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다시 게임 속으로 들어가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역시나 우여곡절 끝에 게임을 마무리하면서 현실로 돌아오는데 이 상황 속에 게임에 참여했던 한 할아버지는 게임 속의 캐릭터에 매료되어 현실로 돌아오는 것을 포기한 채 게임 속에 남는다. 이는 드라마 라이프 온 마스(Life on Mars)에서도 마찬가지다. 사고로 의식불명 상태가 된 주인공은 무의식의 세계 속에서 다른 시간, 다른 장소, 그리고 다른 주변인들과 함께 새로운 삶을 펼쳐낸다. 그렇게 무의식과 삶의 경계에 있다가 의료진의 치료로 인해 결국 주인공은 의식을 되찾고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그런데 그는 무의식 세계 속의 삶을 잊을 수가 없어 결국 그 곳으로 되돌아가는 선택을 하고 만다. 그때 그를 담당했던 의사의 말이 다음과 같다. “현실이든 꿈이든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그곳이 현실이다.” 이 두 작품을 보면 그들의 선택을 찬성 혹은 반대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게 되는 것보다 그냥 ‘그럴 수도 있겠다.’는 시선에서 받아들이게 된다. 


경험기계가 있다면 거기로 들어가겠냐는 질문이 대학 논술 시험 문제로 출제된 적이 있다. ‘경험기계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가정하자. 당신은 경험기계에 들어가겠는가? 들어가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2013년 서울대 논술 문제였다. 그런데 이 논제는 더 이상 시험지에 그대로 박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왔다. 상상인 것만 같았던 경험기계가 실체가 되어 우리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제는 안대 같이 생긴 VR 헤드셋을 쓰고 눈앞에 보이는 입체 스크린 상에 표시된 OTT 플랫폼 클릭하면 스위스 알프스 산장의 스크린을 통해 영화를 즐길 수 있는 경험할 수가 있다. 왼쪽에는 벽면을 가득 채운 유리창으로 눈 덮힌 설산을 감상할 수 있고 오른쪽에는 장작을 태우고 있는 벽난로가 있다. 천장 위로는 거대한 샹들리에가 산장의 아늑함을 보태준다. 뿐만 아니라 뉴욕에 가고 싶으면 뉴욕을 클릭, 그곳의 랜드 마트나 주요 관광지로 데려가준다. 그러면 그 장소에 서서 앞뒤 양옆 위아래를 다원적으로 바라볼 수가 있다. 게임도 마찬가지다. 사이버 공간으로 구축된 3D 입체공간에 들어가 직접 캐릭터가 되어 참여할 수가 있다. 그야말로 메타버스, 가상 현실의 디지털 세계가 눈앞의 현실이 되어 다가온 것이다. 경험기계에 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논하는 때는 이미 가고 이제는 어떻게 이 기술들을 활용할 것인가, 그리고 여기에 유의할 점은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해 볼 시점에 와있는 것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이미 메타버스 세상 안으로 와버렸기 때문이다. 


*생각해볼 문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 유지 편향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생각해보자.


메타버스 시대로 펼쳐지는 미래에 대비해 요구되는 것들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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