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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리밀리 Feb 13. 2022

'아이와 나의 바다' 그리고 '바다와 나비'

아이유의 ‘아이와 나의 바다’는 그녀의 20대를 담은 이야기라고 한다. 20대를 초반- 중반- 후반 이렇게 세 파트로 나눠 담고 있는데, 5분 16초라는 짧은 노래 안에서 10년 동안의 자아가 변해가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아 놓은 것이다. 그래서인가? 이 노래는 그 흔한 구간 반복이나 운율 형성도 후렴구와 같은 군더더기가 전혀 없다. 심지어 화자가 처음 이야기를 꺼내는 시작 또한 예사롭지 않게 깔끔하다. 앞부분의 서사를 통째로 생략해 버린 후 '그러나' 이 심상치 않은 접속부사를 던지면서 단도직입적인 본론으로 포문을 열기 때문이다. 이런 당혹감으로 작품을 처음 접하는 이들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늘어 놓길래 파격적으로 시작을 할까하는 생각으로 작품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렇게 펼쳐진 이야기는 "아무리 시간이 약이라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괜찮아지지 않는 것들이 있더라."는 화자의 경험적 깨달음이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하는 위로 따위는 먹히지 않는 고통들도 우리의 삶속에는 포진되어 있다. 

‘아이’는 이렇게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지난날을 고백한다. 만족할 수 없는 그래서 실망스럽고 싫기까지한 자아를 말이다. 현실적 자아와 이상적 자아의 괴리감 때문이었을까? 화해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관계가 나아질 게 없을 것만 같은 고착된 상태에 흡착되어버린 '아이'에게 그나마 참 다행인 건 가물지 않는 '바다'의 존재함이었다. 모든 것들이 고갈되어 더 이상 무엇도 나올 것 없는 상황 속에서도 넘쳐나는 풍요와 같은 바다가 있다. 아이가 세상을 나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주는 '바다', 그렇지만 그것이 확실히 무엇일지 모르겠는 모호함의 ‘바다’.


아이의 부정적인 자아의 인식 그리고 그런 아이에게 있어주었던 바다 이 둘은 시간이 흘러  이전의 모습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다. 세상에 대한 의심을 품고 자라난 아이는 어느새 거부하고 싶은 자신의 모습들조차 외면하지 않고 포용할 줄 아는 성숙을 이뤄냈지만 아이에게 영영 가물지 않을 것만 같던 바다는 흔적만 남고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아이는 말한다. '바다'가 탄생한 곳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도 그리고 그 과정 속에 물결에 휩쓸린다해도 더이상 두렵거나 불안하지 않다고. 아이가 작은 두려움 속에서 맞이한 세상은 그에게 눈부신 선물이 되어 줬고 그러면서 아이는 지난날의 자신에게 '대답'을 줄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이렇게 일방적이고도 어쩌면 너무도 순탄한 전개가 해피엔딩으로 치닫는 스토리일 것만 같던 노래는 '그럼에도'로 이어지는 P.S 로 개연성을 얻게 된다. 이렇게 우연히 흘러갔던 핑크빛 인생의 주인공 또한 '삶에게 지는 날도 있는' 현실을 살고 있고 원래 인생은 숱한 시련과 고난이 넘실대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힘들면 어쩌지?”, “실패하면 어쩌지?”가 아니라 “힘들 수 있지. 왜 안 힘들겠어?”, “실패할 수 있지. 암 그렇고 말고” 그렇지만 “그럼에도 괜찮아. 길을 잃어도 돌아오는 길을 알잖아.”라며 걱정하고 의심하던 예전과는 다른 삶의 지혜를 꺼내놓는다. 시도와 노력을 해봤다면 참혹한 결과에도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갈 수 있는 현명하고 강한 ‘마음가짐’이 있으면 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인생이라는 게 그렇다. 꽃길 속에서 시작되고 그로 끝맺으면 참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모두가 바라는 순탄한 삶은 눈 씻고 찾아봐도 찾기 힘들다. 인생에는 늘 크고 작은 시련과 풍파가 따르기 마련이다.  

블록놀이를 하는 아이가 블록을 쌓는 중에 그것이 무너지면 너무 속상한 나머지 울음을 터트리게 된다. 그런데 아이에게 이런 경험이 하나 둘 쌓이다보면 '블럭은 원래 쉽게 무너지는 거야. 그렇지만 무너져도 괜찮아. 나는 이걸 다시 잘 쌓는 법을 알아.'하는 선험적 인지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렇게 블록 따위가 무너진다고 해서 심적 동요가 생기는 꼬꼬마의 시간은 언젠가 종지부를 찍게 된다. 노래의 화자도 마찬가지다. 인생이 순탄치만은 않을지라도 더 이상 그런 사실에 낙관하는 어린이가 아닌 이를 덤덤하게 마주하는 인생의 변곡점을 찾은 것이다. 그렇게 아이는 어른이 되었다. 

그렇다면 '바다'는 무엇일까? 내 마음 속에 있는 화수분 같았던 그러나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는 바다. 아이에게 긍정적인 작용을 했으나 아이가 성장을 이루고서는 사라져버린 그것.  그건 아마도 '꿈', '희망' '내면의 동기' '나를 이끄는 힘'이 아니었을까? 미숙하고 미비한 ‘아이’의 마음속에 충만하게 깃들여져 있던 것들. 그리고 아이가 바다가 주는 자양분을 토대로 꿈을 이루고 나니 ‘그런 게 있었다.’는 전설 속 증거물처럼 흔적만 남기고 가버릴 만한 것들은 ‘꿈’에 관련된 모든 것들이 아니었을까? 내 생각은 그렇다.  


이와 제목에서부터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시가 한 편 더 있다. 바로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가 그렇다. ‘바다와 나비’는 근대화라는 거대한 바다 앞에서 무력감을 느낀 지식인이다. 새로운 세계를 동경했던 세상을 모르고 경험이 부족한 나비가 바다로 내려간 것은 그것이 혹시 자신이 찾는 이상향이 아닌가 해서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렇지만 바다는 나약한 나비에게 일말의 자비심도 없었다. 나비가 자신에게 다가온다고 해서 낮게 밀물지지 않은 것이다. 나비의 날개는 그대로 물결에 절어버리고 냉혹한 현실을 온몸으로 시리게 인식한다. 바다와 나비의 그 어떤 따뜻함의 상호 작용이 없는 이 시는 이 둘의 특징과 속성을 파란색과 흰색 두 선명한 색채를 통해 대비를 시켜놓고 ‘감성’ 보다는 ‘이성’을 강조하는 방법으로 풀어낸다. 그래서 이 시는 이미지와 지성을 강조한 ‘주지시’의 범주에 포괄이 된다.  


‘아이와 나의 바다’와 ‘바다와 나비’에서의 ‘아이’와 ‘나비’는 둘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순진한 존재라는 점에서 맥을 같이한다. 그렇지만 경험 부족으로 인해 아이는 세상이 두렵지만 나비는 세상 무서울 것이 없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 대한 객관적 인지를 하지 못하고 강자에게 덤비는 그런 무모함도 있다. 아이는 세상에 나가면서 그런 가냘픈 존재에서 강한 어른으로 변화를 이루고 나비는 좌절을 하고 만다. 이 둘에게 있어 ‘바다’는 자신들이 성장에 겪어야만 하는 필수적 대상이다. 그러나 아이에게 있어 바다는 꿈과 희망 같은 긍정적인 존재로 작용을 하고, 나비한테 있어서 바다는 상처를 주는 냉혹한 현실 그 자체였던 것이다.


우리는 과연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나비’의 모습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바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어떤 것들일까? 이런 생각들은 나 자신을 돌아보고 좀 더 깊이 있게 알아가는 ‘자아 정체성’을 확립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심리학자 에릭슨에 의하면 10대들에게 정체성의 형성은 그 시기에 달성해야하는 과업이다. 이 때 자신에 통찰을 통해 자아 정체성을 이루느냐 마느냐는 가치관을 확립하느냐 아니면 가치관에 대한 심한 갈등과 혼란을 일으키느냐로 연결이 된다. 이는 다시 향후 인생에 있어서 정서적 안정을 이루느냐 불안 속에 사느냐와도 이어진다. 따라서 이 시기에 가장 많은 연구를 해야하는 대상은 바로 ‘나 자신’이 되야 한다. 끊임없이 자신 스스로를 돌아보고 조금씩 더 알아가고 채워나고 건설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흔히들 사람이 스스로에게 가장 공들여서 해야 하는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이며 또한 가장 공들여서 답해야하는 것 역시 “나”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는 다소 철학적인 말이 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생각해볼 문제   

두 작품 속의 ‘바다’의 의미를 찾고 내 삶에 있어서 ‘바다’는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나’에 대해 진심으로 묻고 싶은 질문과 그것에 대한 답을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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