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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리밀리 Mar 01. 2022

다가올 메타버스 시대, ‘나’는 ‘나’로서 말하자!

‘인터넷 다음 단계’, ‘디지털 세컨 라이프’ 라고 불리는 ‘메타버스’는 더 이상 미래의 일이 아니다. 온라인 화상회의 프로그램인 줌미팅(Zoom Meeting) 혹은 행아웃(Hangout)으로 회의를 하고 수업도 하며 배달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비대면으로 음식주문을 하기도 한다. 이제는 화페나 카드 없이도 핸드폰에 저장해둔 신용 카드를 통해 결제가 가능하고 오큘라스와 같은 기계를 통해 방안에서 3D 세계여행을 즐기기도 한다. 이렇게 초세계 , 메타버스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지 간에 이미 우리의 삶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코로나19로 시공간의 제약에 얽매여있던 우리에게 매타버스는 현실 공간의 물리적 제약을 넘어선 새로운 우주로서 다가왔다. 인간관계의 지속, 만남과 커뮤니케이션, 자유로운 비즈니스와 상거래, 회사 업무 등 모든 분야에 걸쳐 활동영역을 디지털의 방향으로 확장시켜놓았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신기술이 제반된 언택트 즉 비대면의 공간인 디지털 공간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면서 SNS 혹은 메타버스 등에서 또 다른 자아로 자연스럽게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디지털 공간 활동의 주체로 자신과 똑같이 생긴 아바타를 만들 수도 있고 자신과는 다른 외모와 성격을 부여한 가상의 정체성을 창조할 수도 있다. 한마디로 부캐의 활용이 가능해진 것이다. 현실과 가상, 진짜와 가짜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있는 현실과 미래에 대비해 메타버스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하는 철학적 고민들이 요구되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처사다. 현실과 메타버스에서 어떤 정체성으로 진입해야할 것인가에 관한 것들에 대한 것들은 특히 더 그렇다.


본연의 자아의 모습과는 다른 꾸며낸 자신의 모습으로 세상을 산다면 그 인생은 참 불편할 것이다. 특히나 SNS을 통해 소통으로 하고 관계를 이어나가며 자신의 모습을 멋지게 포장해 보여주기식 삶을 사는 요즘 시대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문제들이 남의 일이 아니다. 디지털 세상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자 가상의 자아를 만드는데 심취해 이와는 다른 현실의 모습과의 괴리감으로 심리적 불안과 초조함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남들에게는 부러운 삶으로 비춰지길 원하면서 정작 본인은 그것이 자신의 실재가 아닌 진실에 우울해 한다.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언정 스스로를 속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옌예인들의 삶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다. 연예인들은 이미지 메이킹을 통해 스타의 가공된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러기 위해 소속사는 그들의 삶을 통제하고 자유를 제한하기도 한다. 심지어 연애 금지 조항을 계약사항으로 명시하는 곳도 있다. 뿐만 아니라 연애를 하는 이들에게 거짓을 말할 것을 장요하기도 한다. 소속사에서 정해준 이미지에 나를 맞춰 나간다는 건 수많은 심리적 긴장감과 부담감을 야기한다. 혹여 자신의 진짜 모습에 사람들을 실망이라도 시킬까봐 거짓된 자아로 이를 꽁꽁 누르게 되면서 그야말로 가짜가 진짜를 점령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사람들 앞에 숨겨야 하는 비밀이 많으면 많을수록 삶은 고단해지기 마련이다.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고 있는지에 대해 감추고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여기에 다른 사람의 행색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런 삶이 정말 최악인 것은 ‘나 자신’으로서 사랑받을 기회를 박탈당하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살아야만 가치 있는 삶이라는 것을 무의식중에 학습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자신의 삶은 공중분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미국의 가족 상담 이론가 버지니아 사티어는 의사소통유형이라는 이론을 통해 ‘일치형’의 의사소통방식을 소개했다. 이는 상대방과 소통을 할 때 자신이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로 표현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인데 이렇게 이런 대화의 방식을 취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상황을 고려해 자신의 감정을 적절하게 잘 표현할 수 있어야 심리적으로 가장 건강한 소통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나’로서 ‘나’를 말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이것은 당연한 일 같지만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이 당연한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해 사회적 가면을 쓰기도 하고, 때로는 부모를 통해 때로는 친구를 통해 자신을 말하고자 한다. “우리 아빠가 누군 줄 알아?”, “내 친구 누구누구가 말이야.”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주변을 너무 의식해서 살다보면 나만이 가지고 있는 ‘나다움’을 발현시키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된다. 자신이 원하는 자신의 모습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남의 눈치를 보고 혹은 타인의 인생을 좇아가는 삶 말이다. 


사람은 ‘나’로서 당당할 수 있어야 심적으로 편한 상태가 된다.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순간순간들을 소중히 여기며 좀 더 멋진 자신의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주체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삶을 살아가는 노력들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가장 공을 들여 해야 하는 질문은 ‘나 자신’에 관한 것이며, 가장 진실 되게 답해야하는 것 또한 ‘나 자신’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남의 생각과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가치관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분석해 놓는 힘을 바탕으로 자신의 언어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지향해야하는 인문학적인 삶일 것이다. 이를 실현해 나가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가치 체계가 확고하게 세워나가는 것은 물론 나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런 마음가짐에서 당당함이 나오고 자신만의 매력이 발산이 된다. 그런데 ‘나 자신’을 다져가고 형성해 나가는 과정 없이 나 아닌 가짜의 나에 몰두하게 된다면 삶은 방향성을 잃고 말 것이다. 


‘제 4의 물결’, 메타버스의 혁명 앞에 서 있는 시점에서 우리는 시대를 앞서 간 개혁사상가 연암 박지원이 ‘천 년 뒤에도 천만 명의 사람과 다를 나로 살고 싶다.’고 말했던 것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다움’을 상실할 수 있는 시대 속에 스며들지도 모를 일이기에. 그것도 너무도 쉽게. 이럴 때일수록 나의 존재가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서 본연의 가치의 의미를 다시금 상기해야할 때가 아닌가 싶다.  



생각해볼 문제

다가오는 메타버스 시대를 대비해 요구되는 것에는 어떤 것이 있을지 생각해보자.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진정성 있게 해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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