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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리밀리 Feb 18. 2022

빠른 철폐가 답인 구시대적 산물?

미국인들의 최대 이벤트는 단연 미식축구 결승전 슈퍼볼이다. 2022년 슈퍼볼 입장권이 평균 7542달러(약 905만원)이었고 최저 금액 입장권이 4500달러(약 540만원)이다. 그런데 이게 돈이 있다고 해서 다 입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입장권 추첨에 당첨이 돼야 구매 자격이 주어진다.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인 셈이다. 심지어 오하이오 신시내티 공립학교는 오하이오 뱅골팀이 결승에 진출했다는 이유만으로 경기 다음 날인 2월 14일 월요일을 휴교로 정했다고 하니 미국인들이 미식축구에 얼마나 진심인지를 알 수가 있다. 이런 슈퍼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프타임쇼다. 경기 2쿼터 종료 후 쉬는 시간에 하는 15분가량의 공연으로 그 해 아이콘이자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뮤직 아티스트가 무대를 꾸미는데 여기에는 전설적인 퍼포먼스들이 수두룩하다. 2022 슈퍼볼 하프타임은 미국의 힙합 래퍼이자 프로듀셔인 닥터 드레와 그가 프로듀싱했던 래퍼들 스눕 독, 50센트, 켄드릭 라마, 에미넴 등 힙합 레전드들이 총출동했는데, 이때 에미넴은 ‘Forget about Dre’, ‘Lose Yourself’를 불렀다. 그리고 자신의 퍼포먼스가 끝나자 곧바로 무릎 꿇는 행위를 했다. 이는 인종차별에 항거하는 상징적인 것으로 2016년 미식축구 샌프란시스코 포서나이어스 쿼터백, 콜린 랜드 캐퍼닉(Colin Rand Kaepernick)이 경기가 있던 날 국가가 울려 퍼질 때 기립을 하지 않고 무릎을 꿇은 것이 시작이 되었다.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흑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항의하는 의미로 이와 같은 행위를 한 것이다. 그 후 흑인 인권 운동의 집회 현장에서는 무릎 꿇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고 경찰들 또한 시위자들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 흑인 인권 운동의 시발점은 대부분 경찰의 흑인에 대한 과잉진압으로 촉발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와 같은 모습은 경찰들 또한 인종차별을 반대한다는 동참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경찰 대 흑인의 대결이 아닌 인종차별주의자와 인종의 평등과 정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구도로 인권 운동의 메시지가 평화적으로 전달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데 일조했다. 


‘Black Lives Matter(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이 한창일 때 많은 유색인종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이 운동에 동참을 했었다. 그런데 코로나가 터지고 미국 내에서는 아시안 혐오 범죄들이 발생을 하기 시작했다. 전세계에 바이러스를 퍼트렸다는 이유에서다. 그리고 그 가해자는 공교롭게도 인종의 평등을 누구보다도 간절히 외치고 있는 흑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사실 흑인 인권 운동이 결국에는 폭동으로 이어져 ‘흑인들은 어쩔 수가 없어.’, ‘폭력적으로 약탈을 일삼는 시위대를 지지할 수 없는 일이지.’식의 악순환 되는 면이 없지 않았다. 그렇지만 여기에 특정인종을 범죄 집단의 시각으로 보고 ‘모든 흑인은 약탈자’라는 프레임을 덮어씌우는 것은 일반화의 오류이자, 다른 선량한 흑인들에 대한 또 다른 가해가 되는 일이다. 그러니 그저 법을 어기고 약탈하는 사람은 그의 인종을 떠나 법적 처벌의 대상자로 분류를 해서 인식을 하려는 이성적 노력들이 있어야 한다. 물론 나 또한 그런 맥락에서 이를 이해하고 있었지만 아시안을 무차별 공격하는 흑인 뉴스를 보면 미국에 사는 아시안으로서 공포와 반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확산되자 앞집에 사는 헤나 아줌마는 혹시나 내가 아시안이어서 이곳에서 불미스러운 일을 당하는 건 아닌지 염려를 하셨다. 그리고 혹시 그런 일이 없었는지 조심스럽게 물어보셨다. 그때 내가 겪었던 일이 하나 있어 이를 공유했다. 어느 날 마트에 갔다가 기분 나쁜 일을 겪었던 이야기다. 흑인 할머니가 옷을 고르는 통에 카트로 통로를 막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길 좀 비켜달라고 했던 것이다. 그랬더니 할머니는 차가운 태도로 “너가 돌아갈 수도 있는 거잖아.” 딱 잘라 말하고는 계속 옷을 골랐다. “나도 웬만하면 그럴 생각이었는데 돌아가는 길이 멀어서 부탁한 거야.”했더니 그 옆에 있던 딸이 미안하다면서 길을 비켜 준 적이 있다. 원래 미국은 진로가 방해가 될 때 “Excuse me” 한마디 하면 상대방이 길을 비켜주는 문화가 있는데 할머니는 이를 무시하고 의도적으로 길을 막아버린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헤나 아줌마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친정어머니도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고 병원에 가서 흑인 의사가 진료를 봐주려고 하면 몸에 손도 못 대게 하셨다는 것이었다. 본인은 그게 잘못됐다는 걸 명백히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어머니를 변화시킬 수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살아온 세대니까. 그렇지만 자기는 어머니 세대의 인종차별적 인습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다고... 이와 마찬가지로 그 흑인 할머니의 행동도 그녀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가 나타난 걸로 받아들이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다. 그렇지만 그 딸은 그게 잘못된 일인 걸 알고 길을 비켜주었으니 우리는 딸의 행동에 의미를 크게 두어야 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이곳에서 사귄 미국 백인 친구들도 자신들의 부모님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얘기를 꺼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자기 어렸을 때만해도 학교에 동양인은 거의 없었고 한 둘 있다 해도 입양된 아이들이어서 동양의 문화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시대가 변하면서 이렇게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배울 수 있어서 우리와 아이들 세대는 얼마나 좋으냐는 이야기들을 종종 해주곤 했다. 흔히들 미국을 멜팅팟(melting pot)이라고 부른다. 다양한 민족 문화가 서로 융합되어 이루어진 나라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상 또 그렇게 잘 어우러진 건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디트로이트 인근 8마일 지역에 마트만 가도 그렇다. 정말 여기가 미국인가 싶을 정도로 마트 이용객은 죄다 흑인이다. 사실 이곳의 인종차별의 역사는 길고 하루 아침에 이를 끝내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피부색이 다르다고 차별을 이 잘못된 관행과 폐습을 청산하는 과정 중에 서 있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의 행동은 내일의 역사가 된다는 의미기도 하다.


사실 노예제가 합법화되던 시절 흑인들에게는 가족문화라는 게 없었다. 노예가 재산처럼 취급되어 거래가 됐기 때문에 주인은 매매를 통해 흑인 노예 가족을 뿔뿔이 흩어 놓았다. 그래야 흑인들끼리 연대를 할 수도 없고 다루기도 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가족도 없고 가정교육이라는 개념자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글을 배우거나 하는 것들은 불법사항이어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여건도 아니었다. 링컨 대통령 재임시절 노예 해방이 되면서 흑인이 백인과 평등해진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짐 크로법(흑인 차별법)이 1965년까지 시행되면서 흑인은 공공시설에서 백인과 흑인의 분리를 합법화한 것이다. 그래서 흑인들은 백인들과 함께 식당, 화장실, 극장, 버스 등 공공시설에서 분리돼 차별 대우를 받아야만 했다. 은행 업무도 도착순서와 상관없이 백인이 있을 경우 백인에 대한 흑인의 양보는 너무도 당연시 되었다. 버스도 마찬가지였다. 흑인들의 승차거부는 일상이었고 백인이 버스에 오르면 흑인은 일어서 자리를 내어줘야만 했다. 물론 지금은 이런 지난 역사와는 또 많은 부분 변하긴 했고  사정 또한 다르긴 하지만 윗세대로 올라갈수록 그 잔재가 많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현세대도 분명 그 영향이 남아 있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이어져온 역사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이들도 세대를 거듭할수록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에 의의를 둬야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변화의 과정 속에 있는 거라는 생각하면서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 모든 변화에는 기다림이 요구되는 법이니까. 


하버드 정치철학과 교수 마이클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미국 백인이 미국 흑인과의 관계에서 역사적으로 도덕적 책임을 질 의무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자신이 사는 특정 공동체에서 나오는 특별한 의무 가운데 같은 공동체 구성원에 대한 의무도 있는데 역사적 부당 행위에 대한 집단적 사죄와 보상은 결국 구성원들이 연대와 소속감을 가지고 내 나라에 대한 진정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고 했다. 그래서 내 나라가 저지른 과거의 잘못을 현재로 끄집어내어 도덕적인 빚을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까지 역설했다. 다시 말해 미국은 인종 차별에 대한 모든 과오를 인정하고 이를 하루 빨리 종결시킬 필요가 있다. 이건 비단 흑인만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이 지구상의 모든 인종을 위한 일이 될 것이다. 어떤 집단을 핍박하고 탄압하는 것은 결국 사회의 악이 되어 되돌아오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피해자가 아닌 사람이 없게 된다.


인정의 평등과 정의라는 대의는 반드시 이뤄야하는 것이지만 그 여정에는 이뤄나가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아시안 혐오 범죄자들처럼 이 길로 가는 길을 더 멀게 만드는 사람들도 나올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일부의 ‘Hater(혐오자)’들에 걸려 ‘흑인들은 차별 받아 마땅한 인종이야.’하는 또 다른 가해의 프레임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인종의 평등과 정의가 바르게 세워진 다음에 일어나는 모든 혐오 범죄는 특정인종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람’을 해하는 것이 된다. 우리 모두는 어떤 특정 인종이기 전에 평등한 인권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임을 잊지 말아야하겠다. 어떠한 이유로도 함부로 다뤄져서 마땅한 인권은 없다. 이것이 우리가 인종차별, 구시대적 산물을 철폐해야하는 이유다. 


   

생각해볼 문제


“모든 무슬림은 테러리스트, 모든 동양인은 바이러스, 모든 흑인은 폭도, 모든 남미사람들은 불법체류자, 모든 인디언은 야만인.” 이와 같은 인식이 또 다른 가해가 된다는 말은 무슨뜻일지 생각해보자.


왜 인종차별을 철폐해야하는지 그리고 인종의 평등과 정의를 이룰 때 그 수혜자는 누가 될 것인지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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