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4. 다시
내가 가진 가능성. 나를 필요로 하는 일자리. 자기 분석이 쉽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답을 질질 끌고 있어야 할 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불현듯 화가 났다.
‘난 뭐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람인가? 그래도 학교 다닐 땐 줄곧 우등상을 받아왔던 나인데... 지금 도대체 이 꼴이 뭐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집 앞에 나가 벼룩시장 한 부를 빼왔다. 소일거리라도 찾아 해야 했으니 말이다. 뒤적뒤적 거리다가 나름 쉽게 일을 구할 수 있고, 월급이 웬만한 회사 초봉보다 높은 학원 강사 구직란에 내 눈길이 어느새 멈춰져 있었다.
‘아, 내가 왜 이 생각을 못했지?’
문제집 집필하면서 매일같이 학원에 대한 얘기를 들어 놓고도 학원 강사를 해야겠단 생각을 해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보면 나도 대학교 때 성당 야학을 봉사를 했던 나름 전직 강사아닌가?
구인란에 서너 군데 동그라미를 하고 표시를 해놓은 학원에 전화를 했다. 그렇게 학원과 면접 날짜를 잡고, 해당 날짜에 면접을 보러 갔다.
이력서를 훑어보던 원장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다시 머리에 안착시켰다. 그리고 몇 안 되는 가닥가닥을 손가락으로 흩어 내어 대머리를 능숙하고 자연스럽게 커버하는 중에 어떻게 문제집을 쓰게 됐냐고 물어봤다. 강사 이력이 없어서인지.. 그저 출판사 작업에 지대한 관심을 보일 뿐이었다. 하긴 그도 그럴 게 이쪽 일에 전혀 연고도 없이 집필을 하게 되었으니, 이쪽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궁금도 할 법했다. 그치만 그쪽일을 하게 된 경위는 이쪽 취업과는 큰 상관은 없었는데.. 불필요한 관심처럼 불편했다.
시범 강의를 해보라는 원장 앞에서 나는 강의를 시작했다. 준비를 해간 것도 아닌게 강의가 술술 나왔다. 안경 너머에 보이는 원장의 흑갈색 동공이 확장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문제집을 쓰는 일이 이런 마법을 부릴 줄 꿈에도 몰랐는데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교과서를 달달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수거한 전국의 중학교 국어 문제들을 체크하고 그 안에서 기출 문제를 만들어 내는 작업이 이렇게 이어진다는 말이지? 월급도 나쁘진 않은 거 같고, 다른 학원을 구하는 것도 귀찮고 해서 처음 면접 본 학원에서 일을 하고 싶었다. 원장도 나의 강의를 매우 흡족해 하는 것 같았기에 나는 이미 마음에 결정을 다 해놓고 있었다.
강의를 마치고 원장은 나에게 말했다.
"선생님, 이 정도 이력이면 이런 동네 학원에서 일하지 말고 좀 더 나아가서 대치동에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뜨억! 뭐지? 지금 난 뭘 한 걸지?'
그렇게 나는 정말로 강의 경력 하나 없이 대치동 종합 학원에 이력서를 준비해서 냈고 연락이 와서 면접을 갔다. 빼빼마른 스포츠 머리를 한 남자가 나를 맞아주고는 자신은 이 학원의 실무를 담당하는 부장이라고 소개를 했다. 그리고 별 말 없이 설문지 같은 걸 주더니만 작성을 하라고 건네주었다. 여러개 문항이 있었는데.. 대략적으로 전학원을 그만두게 된 이유, 희망하는 월급에 관한 질문들이 담겨 있었다. 뭐 직접 물어봐도 될 걸 굳이 적는다 싶은 감이 없지 않았지만.. 또 굳이 내 입으로 내가 얼마를 원하는지 말하는 것도 썩 마음 편한 일은 아니니.. 이렇게 하는 게 낫다 싶기도 했다. 질문지를 다 작성하고 나니.. 시강을 해보라는 부장의 말에 따라 우리는 강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시강자료를 건네 줬는데 그 안에는 자음, 모음 분류표가 그려져 있었다. 문제집을 만들 때 집필진이 대부분 학원 강사였기 때문에 가끔 서로의 강의 노하우를 나누곤 했는데 그때 우리 중 가장 연세가 많았던 한 남자 강사분이 춤을 추듯 온 몸을 이용해 자음, 모음표를 분류 기준 따라 나누고 그걸 쉽게 외우는 방법을 알려줬던 기억이 떠올라 그걸 그대로 따라했다. 그걸 보고 있던 부장은 정말이지 깜짝 놀란 표정을 하면서 자신의 당혹감을 감추지 않았다. 나를 돌은 아이로 보는 분위기가 전해져 강의실은 순식간에 어색한 분위기로 에워싸였다. 웃을 법도 했는데 그는 웃지 않았다. 그리고 강의 잘봤다며 차후 연락을 준다고 했다. 양 옆이 강의실로 되어 있는 그 기다란 복도길을 배웅나오면서 "선생님, 끼가 많으신가봅니다." 이 한 마디 건낼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학원을 나왔다.
엄마는 내가 아주 어려서부터.. 내 사주에 일복이 많아 일이 끊기진 않을 거란 얘기를 누누이 하셨다. 돈이 끊길 만하면 어디선가 일자리가 굴러 들어오고, 또 힘들어질만 하면, 일을 구하게 될 거란 이야기였을까? 정말 나는 그랬다. 물론 그 일이 내가 원하는 일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하나가 가면 하나가 오고 이런 근근덕스러운 방식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래서였는지 나는 이 학원의 연락을 기다리면서 다른 학원의 면접은 일단 보류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면접보고 다니는 것도 귀찮고 복수의 학원에서 합격이 된다고 하면 그 뒤처리가 귀찮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고, 부장은 나에게 전화를 했다. 학원에서 같이 일해줬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나는 그렇게 쉽게 대치동 강사로 입문을 하게 됐다. 그러고 보니 나는 대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때도 대치동에서 초등학생들 국어 강의를 아르바이트로 했던 경험이 있었다. 학원에서 처음으로 강의를 하기로 되어 있던 날.. 나는 친구 은정이네 집에서 고등학교 동창들과 밤을 새고 놀았던 기억도 곁달아 떠올랐다. 그래서였을까 대치동 강사가 되는 게 힘들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입사가 힘든 취업군이든 그렇지 않든 어쨌든 나는 아르바이트가 아닌 직업으로서의 일자리를 구했다. 그리고 이 기쁜 소식을 설하에게 먼저 알렸다. 내 기쁨에 대해서는 세상 누구보다도 기뻐해주는 나의 연인 설하.
“현아~ 축하해~! 근데 거기 남자 선생님들 많은 데 아니지?”
“남자야 많지, 그런데 총각이 없지. 죄다 유부남이야. 말 말자.”
“하하, 너무 잘됐다!”
“좀 있다가 만날까? 내가 학교로 갈게.”
“아니, 오늘은 학교 행사가 있어서 좀 힘들고... 이따가 집에 가서 내가 전화할게.”
“그래...”
설하와 함께 축하주라도 해야 하는 건데.. 담배 한 대 물고 길게 공허함을 달래고 있다. 고등학교 동창들이자 동네 친구들인 경민이와 윤채를 불러내어 간만에 한 턱 쐈다. 물론 현금 아닌 신용카드로~ 다름 달에 결제가 되면 월급일과 맞물려 부담이 없을 테니까. 친구들과 수다를 실컷 떨고 있었는데 설하의 전화가 왔다. 담배를 길게 내뿜으며 전화를 걸었다. 밖이 많이 춥다는 것이 소리를 통해 전해졌다.
“현아~ 우리 아부지가 너 집으로 좀 데리고 오래. 보고 싶다고”
“나 싫은데... 아니 벌써 부모님 얼굴을 보자고? 부담스러워~”
“그러지 말고 그냥 가볍게 보면 되잖아~”
원래 내가 싫다는 건 우기지 않는 성격인 설하가 작정을 해도 아주 단단히 작정을 한 것 같아 보였다. 몇 번의 실갱이가 계속 되었어도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이 지겹게 반복되는 말장난이 싫어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첫 수업을 했다. 몇 백 명 앞이어도 학점만 더 준다고 하면 망설임 없이 앞에 나가 발표하던 내가 고작 20명 고등학생들 앞에서 긴장을 했다. 다른 선생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린 내가 무슨 자기네들 앞에서 시강이라도 하는 줄 알고 빤히 쳐다보는 아이들의 눈빛이 나를 움츠려들게 했다. 그렇지만, 난 설하와의 연애담이 아닌, 첫사랑 얘기로 이 긴장되는 분위기를 풀었다. 수업만 나갈 줄 알았는데 이게 웬 떡인가 싶었는지 아이들은 나의 이야기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도 나에게 연애란 첫사랑 그 애와 했던 모든 것들이 그 범주와 정의에 포함되는 것 같다. 그애와 함께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면 연애 세포들이 자극되는 묘한 매력을 가진 남자. 그에 비해 정말로 별감정없이 지금 나의 전부가 되어버린 설하. 내가 강사가 되어 아이들 앞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모습과도 같이 뭐라 설명되지 않는 복잡함이 갑자기 머릿속을 까맣게 밀고 들어왔다.
수업이 끝나자 원장선생님께서 수업이 어땠냐고 물어보셨다. 쉽게 대답이 안 나가자, 원장선생님은 “지금 이 나이에도 나도 여전히 첫 수업을 긴장이 된다고~”하며 말씀해주셨다. 그런 배려의 말을 듣고도 아무런 말도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원장선생님은 우리 학원에서 강의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학원일이 끝나고 같은 방향이지만 나보다 집이 한참이 먼 과학 선생님과 동행을 했다. 얼굴은 동안인데, 나이는 우리 큰오빠벌이라 나와 7살 차이나 났다. 조잘조잘 수다쟁이처럼 이것저것 말을 해서 낯가림이 심한 나에겐 적격인 직장동료라 생각되었다. 물론 머릿속 여전히 복잡해서 과학 선생님의 말을 100% 다 들리진 않았지만, 아무튼 이 사람 참 밝고 괜찮은 사람이란 느낌은 충분히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