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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의 미학

2. 시험, 시험

by 이제야

2. 시험, 시험....


나는 책상에 앉아서 시험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안을 가득 매운 응시자들과 함께. 그리고... 시험지를 빽빽하게 채워갔다.


점심시간, 나이 상으로는 나보다 언니지만, 한 학번 후배였던 영희 후배도 이 학교 시험을 보러 온 것을 알고 반가움에 자리를 같이 했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틀은 대개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을 한다. 영희도 나도,, 우리가 방황하다 만난 곳은 대학원 입학 시험장. 물론 둘 다 죽을 둥, 살 둥 공부한 것도 아니라, 널널하게 공부하고 나서 합격은 운에 맡기고... 하는 마인드로 온 것이다. 하여 마냥 웃었다. 우리 처지가 너무 엇비슷해서,,,


구술 면접,

제비뽑기로 문제를 고르는 방법인데, 문제 하나를 골라잡고 나는 마구 헛소리를 해대 버렸다. 교수들도 나의 이런 상황이 안타까웠는지, 다시 문제를 고르라고 하셨다. 또 하나의 문제를 뽑고, 참 이상하게도 그다음의 기억은 없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버벅거리다 나왔는지... 그래 단기 기억상실이라는 걸 이럴 때 경험해야, 내 정신 건강에도 좋을 테지..


그리고 기억나는 것은 내가 학교 벤치에 앉아 혼자 엉엉 울고 있었다는 것. 도대체 내가 할 줄 아는 일은 뭐가 있을까. 이 넓디넓은 세상에서..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만한 것은 뭐란 말인가.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난 후 나는 설하에게 전화를 했다. 3개월의 시간을 투자했던 나의 결과에 대해 궁금해할 나의 연인에게... 그러고 나서 한 말이


"아 짜증나. 집이나 가서 잠이나 자야겠다."


그렇게 하루 이틀,, 통장에 모아놓은 돈도,, 한 푼 두 푼...

어느 순간부터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소멸의 개념으로 다가왔다.

이 세상 모든 게... 결국.. 각자의 그린 마일을 그리고 가는 것이다. 그렇게 삶의 끝으로 다가가고 있는 거지 뭐.


3. 새로운 일거리


나는 다시 이력서를 작성해 내가 있을만한 곳들을 알아보고 뿌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자기 계발 따위를 허락할 경제적인 여유도 없다. 그렇지만 연락은 이력서를 넣지도 않았던 곳에서 왔다. 인터넷 카페에 사이트에서 국어지식에 관한 질문이 올라오면 심심풀이 삼아 답글을 달아주곤 했는데, 그게 인연이 되어, 출판사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중등부 국어 문제집 집필 일인데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지문을 받고, 문제를 만들고, 해설을 달고, 대강 뭐 이런 일이었다.


이 일은 참으로.. 나의 카오스 세계와 걸맞은 일이었다. 너무도 잘 맞았기 때문에 너저분한 나의 공간을 더 너저분하게 만들기도 했다.


참으로 신기하다. 일이라는 것이 원래 닥쳐야 하는 것이라지만, 나에게 주어진 대부분의 시간을 빈둥빈둥거리다가 꼭 원고 마감일이 되어서야 밤을 설쳐가며 작업을 하고 이로 인해 스트레스를 내 삶 속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이. 내가 일을 하는 스타일이 그랬다. 작업량을 할당받고 빈둥거리다가 마감일이 다가오면 그때서야 밤을 새우고 일을 하는 것. 그렇게 일을 하다 보니 통장 잔고가 떨어지는 걸 늘 걱정하던 나였지만 세상 돈 버는 일 참 쉽다는 오만을 떨게 되었다.


출판사에서 어느덧 나는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다만 안타까운 사실은 좋은 쪽이 아니라는 것. 아이디어 회의를 하는 날이면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공격적인 자세로 대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 대한 고려도 없이 거침없이 쏟아 내어 연륜 없는 티를 경박하게 냈다고 해야 할까. 원고를 같이 쓰는 다른 선생님은 새파랗게 어린것이 “대대 대대” 떠들어대는 내가 탐탁지 않은 잔소리꾼, 완전 밉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젊음이 있으니, 누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상관없었다.


내가 이렇게 일을 하는 것에 대해 출판사 직원들은 별 말이 없었다. 중등 문제집 업계에서 독점하다시피 한 타 출판사 문제집을 겨냥해 기존의 틀을 엎고 한 단계 발전한 문제집을 집필진에게 요구했던 터라, 나 같은 사람이 필요했을 테고, 이런 역할을 그들이 맡기는 싫었을 테고...


한 번은 출판사 팀장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선생님, 사실 다른 선생님들의 경우는 말만 앞섰지, 일을 꼼꼼하게 하질 않아서 실제로 원고는 제멋대로 마무리해 넘기기가 일쑤예요. 그나마 선생님은 마구 퍼부어대는 지적질에 상응해 원고를 마무리해주시지만 말이죠.”

“그럼 왜, 원고에 대한 엄청난 관용을 베풀고 있어요? 다른 사람을 구하면 되지.”

“아... 그렇다고 같이 일하시는 선생님들한테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 안 되죠.”


아 그럼 나보고 어쩌라는 거지? 같이 일하는 선생님들의 험담을 시작한 건 그쪽인데, 내가 그쪽 편에 서서 얘기를 했더니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이건 뭐 반대를 위한 반대도 이런 게 없다 싶을 정도다. 상대방이 뭐라 얘기하면 그저 그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서 대화를 하는 거다. 이건 다 승자독식의 교육방식이 만든 폐단이 아닐까... ‘나만 옳고 너는 틀렸다.’ 이런 프레임이 우리의 무의식 깊숙이 깔려 있다. 네가 틀려야지 내가 맞게 되니까 말이다. 헌데 이 대화의 핵심은 ‘너 성격 지랄 같은 거 우리도 다 알지만 원고 깔끔하게 해 주니까 참는 거야. 작작 좀 해.’ 이거였던 것일까? 암튼 나는 팀장의 의도는 알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이를 모른다 해도 전혀 문제 될 것은 없었기에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냥 단지 좀 기분이 나빠졌다는 것. 그게 다였다.


아무튼 나와 같이 공동 작업을 했던 책의 저자들은 대부분 학원 강사들이었기에 사정상 밤샘 작업을 많이 했고, 그러한 노고도 마다하지 않던 사람들의 열정 덕분으로 판매 실적이 아주 좋았다. 사실상 원고료는 판매량과 상관이 없는 터라 내 알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해 만들었던 문제집은 입소문을 좋게 타서, 문제집 시장에 독점을 하고 있던 타사의 문제집에 치명적 이리만큼 큰 타격을 안겨주었다. 이렇게 유명해진 책의 집필진이니, 어딜 가서 이 책에 대해 말하는 것이 즐거웠고, 서점을 지날 때마다 책에 적혀 있는 내 이름 석 자를 확인하는 게 흐뭇했다. 일은 바꿨지만 유치한 건 핸드폰 분실물 센터 회사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 흐뭇함도 잠시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경제적인 압박에 쪼들리게 되었다. 출판사의 일이라는 것이 이러했다. 정해진 기간도 없고, 정해져 있는 일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경제적으로 어디 도움 하나 받을 곳 없는 나에게 걸맞지 않은.. 그러니까 같이 일했던 선생님들처럼 세컨드 잡으로 적당한 일을 나는 전업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다고 실험실에 박혀 있는 설하에게 손을 내밀만한 처지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자기 계발을 해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나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두루 아울러 장점으로 활용할 수 있을만한 일거리는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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